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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연말이면 진행되는 조용필의 예술의전당 공연 리뷰입니다.

2005년 연말 공연을 보고 쓴 글이니 벌써 세월이 참 흐를대로 흘렀군요.

한때 조용필은 '마마미아' 스타일의 공연을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미 그 욕심은 버렸다는군요. 하지만 그의 공연에는 여전히 뮤지컬의 향취가 풍깁니다.




[송원섭의 through*2] 두얼굴의 조용필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을, 비켜갈수 없다는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조용필, '바람의 노래' 중에서


몇해 전부터 조용필의 콘서트는 항상 2부로 나뉜다. 2부는 보통 가수들과 별로 다를 게 없지만 1부는 뮤지컬 스타일의 독특한 콘서트가 펼쳐진다.

한동안 '마마미아'(아바) '위 윌 록 유'(퀸)처럼 한 뮤지션의 노래들로만 채워지는 '가수 뮤지컬'을 제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조용필은 최근 "기존의 곡들을 죽 배열하는 식의 뮤지컬은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매년 갖는 연말 공연의 1부다.

올해 공연의 1부였던 '정글 시티'에서 고정된 캐릭터는 한 사나이(조용필)와 영원의 여인(이상은) 뿐이다. 캐주얼 러브가 판을 치는 도시 한 복판에서 지쳐가는 주인공은 문득 먼 기억의 저편에서 어린 시절 사랑했던 그녀를 떠올리고, 마침내 그녀를 찾아낸다는 것이 '정글 시티'의 줄거리다.

줄거리는 있으나 거의 모든 노래는 조용필 혼자 이끌어간다. '명성황후'의 주역이었던 이상은과 코러스, 어린이 합창단이 부분적으로 도움을 주지만, 가수 혼자 노래를 하면서 나머지 출연자들이 춤을 통해 스토리를 전달한다는 기본적인 형식은 빌리 조엘의 노래를 이용한 브로드웨이 쇼 '무빙 아웃(Movin' Out)'을 연상시킨다.

'무빙 아웃'은 무대 상단에 밴드와 가수(물론 빌리 조엘 본인은 아니다)가 위치하고, 하단의 배우들은 무용을 통해 1960년대에 고교를 졸업한 뉴욕 출신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반항의 나날과 월남전의 상처를 딛고 세상과 화해하게 되는가를 연기한다. 물론 그 시대의 젊음을 노래에 담았던 빌리 조엘의 노랫말들이 나레이션 역할을 한다.

뉴욕에 '피아노 맨' 조엘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조용필이 있었다. 가왕 조용필은 '추억 속의 재회' '눈물의 파티' '꿈' 등 주옥같은 노래와 노랫말을 통해 도시와 고독, 소외와 절망의 극복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했다. 특히 구원의 여인을 향해 부르는 노래,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라는 '바람의 노래'는 대체 한 가수가 이룰 수 있는 성취의 끝은 어디인가를 의심케 하는 찌릿한 전율이 객석에 차고 넘치게 했다.

1부 공연에서 하늘 위로 올라갔던 조용필은 2부 시작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와 다시 팬들을 만났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겼던 1부와는 달리 2부의 조용필은 때로 친근한 동네 아저씨처럼("밀지들 말어, 다쳐, 여기 상주 만들 일 있어?"), 아니면 옛날 그대로의 '오빠'처럼("아유, 알았다니까, 소리좀 고만 질러") 팬들을 품에 안았다. 그렇다. 그의 얼굴은 정확하게 두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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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못찾겠다 꾀꼬리' '정' '눈물로 보이는 그대' '미지의 세계' '잊혀진 사랑' '여행을 떠나요' '모나리자'... 불러도 불러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히트곡의 퍼레이드는 마침내 앵콜곡 '단발머리'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자존심'으로 막을 내렸다. '감사합니다'라고 쓰인 막이 내려와도 팬들의 아우성이 끊기지 않자 조용필은 퇴장하는 밴드를 다시 불러세워 관객들과 함께 '친구여'를 합창했다.

문득 공연 전 조용필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욕심 같아선 전 공연을 1부처럼 하고 싶은데, 팬들 마음이 다 똑같지가 않아요. 어떤 노장 하나가 '난 허공 들으러 왔는데 지금 이게 뭐야' 하면 어떻게 할거야. 그분들 생각도 해야 돼요."

그러고 보니 '허공'은 없었다. '촛불'도, '물망초'도, '큐'도, '간양록'도,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그 겨울의 찻집'도 이날 공연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미워 미워 미워'도, '비련'도, '아시아의 불꽃'도, '마도요'도 연주되지 않았다. 대체 이 노래들은 언제 다 들려주려는걸까. 문득 '그분'이 오래 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나는 '조빠'였구나.

송원섭 JES 기자
five@je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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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셨나요? 이 영화에서 짜장을 얼굴에 묻힌 최진실과, 김 서린 창문에 하트를 그리던 박중훈의 모습이 기억나시나요?

그런 분들이 읽어보시면 잠시나마 옛 기억이 살아나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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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섭의 through*2?> '형사'의 부활에 대한 단상

재미란 무엇인가. '엔터테인먼트'를 취재 대상으로 10년 이상 종사하다 보니 '재미'라는 말의 벽에 부딪힐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나마 결론을 내린 것이 있다면, '결국 재미란 음식 맛과 같다. 어느 정도 일반적인 기준은 있을 수 있지만 결국은 개개인의 취향이 절대적인 기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이명세 감독의 '형사'가 디지털 판으로 재상영된다는 소식을 접한 다음의 일이다. 디지털 버전의 '형사'는 CGV강변 인디영화관에서 23일부터 일주일간 하루 2차례씩 상영되며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 상영기간이나 회수가 늘어날 수도 있다. 연말 영평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을 휩쓴 이후의 쾌거라고 할 만 하다.

기자는 분명 이명세 감독의 팬이 아니다. '형사'를 재미있게 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한때는 그에게 심각한 반감을 갖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너무도 한심한 것인데 여기서 한번 공개해보기로 한다.

대부분의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기자도 이명세 감독을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통해 처음 만났다. 경직 일변도의 한국영화계에 한줄기 훈풍으로 다가왔던 이 영화에는 신랑 박중훈이 유리창에 하트를 그려 창문 너머에 있는 신부 최진실에게 사랑을 전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좀 더 자세히 복기해 보자. 추운 겨울날, 집들이를 마치고 친구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던 박중훈은 김 서린 창 너머로 최진실이 설겆이하는 광경을 본다. 박중훈은 손을 호호 불며 하트를 그리고, 창을 두드려 최진실이 그 하트를 보게 한다.

흐뭇한 장면. 그러나 기자는 이 장면에서 심사가 마구 뒤틀렸다. 생각해보라. 추운 겨울이면, 창문에 김이 서리는 것은 따뜻한 집 안쪽이지 바람이 쌩쌩 부는 바깥쪽이 아니다. 그러므로 박중훈은 창문에 하트를 그릴 수도 없고, 설사 그린다 해도 안쪽에 서린 김 때문에 최진실은 하트를 볼 수도 없다.

기자는 '이런 기초적인 자연법칙조차도 무시하고 영화를 만든' 이명세라는 감독을 향해 치기 어린 비난을 퍼부었고, 그 뒤로는 그의 영화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괴로워'는 물론이고 '인정사정 볼것없다' 또한 허점 투성이의 영화일 뿐이었다(그러면서 참 많이도 봤다).

지난 9월 개봉됐던 이명세 감독의 영화 '형사'는 일반 관객들을 상대로는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 열광하던 팬들은 이 영화가 극장에서 간판을 내린 것을 견디지 못하고 직접 돈을 걷어 단관 상영회를 계속해왔다. 팬카페에서는 이 영화를 몇번 봤느냐를 가지고 경쟁을 펼치기도 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극장에서 몇명이 이 영화를 봤느냐는 그 다음 문제. 이명세 감독은 행운아다. 적지만 자신의 영화를 호응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데 스필버그인들 부러울까.

영화든 드라마든, 만듦새나 수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된 평가의 기준도 있고, 누구라도 그 기준으로 영화를 농단할 수 있다. 하지만 시청률이나 관객수가 그 영화의 '재미'까지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 결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에겐 최악의 드라마가 남들에겐 인생 최고의 걸작일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유명한 평론가라도, 이런 면에서는 '수많은 관객(또는 시청자)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송원섭 JES 기자 five@jesnews.co.kr

*<Through*2>는 연예계의 다양한 사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칼럼입니다. 제목인 <Through*2>는 걸리는 곳 없이 이리저리 통한다는 <Through+Through>, 한글로는 <두루두루>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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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사생결단', 황정민과 류승범의 낭비 조회(2268) / 추천(1)
등록일 : 2006-05-01 11:50:17



흐린 날이라 그런지, 일부러 노출을 줄였는지 칙칙한 부산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뜨는 고전미 넘치는 <사생결단>이라는 로고. 흐르는 음악조차도 이소룡의 <용쟁호투>다. 70년대의 아우라가 도입부에서 뿜어나온다.

물론 이건 그냥 포장지에 불과하다. 이 영화 안에 70년대는 없다. 장르 영화, 혹은 느와르에 대한 애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그저 느낄 수 있는 것은 감독의 불필요한 사회적 책임감 뿐이다.

마약 중간판매상 이상도(류승범)는 황금구역인 연산동을 관리하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어느날 살짝 맛이 간 형사 도진광(황정민)으로부터 협박을 겸한 유혹을 받는다. 못이긴 채 도진광에게 협력하지만 이상도에게 돌아온 것은 쇠고랑 뿐. 그런 그에게 도진광은 다시 협력을 요청해온다.

두 주인공이 쓰레기 중의 쓰레기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약범 집안의 자손인 이상도는 어려서부터 약 심부름을 하며 자랐고, 충성이며 우정, 의리라고는 모르는 캐릭터다.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부분은 마지막 시퀀스에서나 등장한다.

도진광은 투박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신경쇠약의 증세를 보이는 형사(이 부분이 이 영화 최대의 실패 요인이다). 선배 형사가 마약범 장철의 염산 세례를 맞고 죽은 뒤부터 그는 정신병자가 되어 살아간다. 갑자기 그는 장철을 잡지 못한 것이 그의 인생을 꼬이게 한 계기라고 생각하게 되고,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

최호 감독은 시사회 직전 "장르영화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그 장르영화가 사회를 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번역하자면 "내가 만든게 아무 생각 없는 양아치 영화인 것 같지만, 나는 나름대로 그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사생결단'을 보고 있으면 노력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리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잘 만든 양아치 영화에는 저절로 그 시대가 담긴다. 공연히 더 큰 노력을 기울이면 그때부터는 관객이 영화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시대가 담기지 않았다면, 그건 그 시대의 양아치들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는 뜻이고, 그런 영화는 애당초 성공할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본 거의 모든 사람들은 '두 주인공이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나쁜 놈들이라 정 줄 곳이 없다'고 말한다. 솔직히 소악당이 대악당을 무너뜨리는, 즉 '덜 나쁜 놈이 더 나쁜 놈들을 잡는' 영화는 쌔고 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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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들의 공통점은 소악당 캐릭터에 관객들이 애정을 기울일 수 있게 하는 세심한 배려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소악당들에게 애정을 갖는 것이 불합리한 일이 되지 않도록, 대악당은 진정한 악당으로 그려져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짜 악당인 대 마약상 장철은 별 존재감이 없다. 그는 이상도나 도진광에 비해 별로 나쁜 놈으로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영화 안에서 장철은 그저 머리가 약간 좋은 약장사에 불과하다. 별로 미움받을 소지가 없고, 이상도나 도진광에 비해 별로 더 나쁜 놈이 아니다.

당연히 장철을 잡아야 한다는 데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고, 그나마 도진광에 비해 조금은 애정이 가는 캐릭터인 이상도는 느슨하게 '좋은 악당'으로의 변신을 노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후반부의 느린 진행은 엔딩 크레딧을 구원의 신호로 여기게 만들 정도로 지루하다.

결말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총소리가 울리고 나면 참으로 허무한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다. 전혀 독창성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페이소스도 없고, 해소의 쾌감도 없다. 과연 이런 결말을 위해서 두 시간 동안 그렇게 힘겹게 달려왔나 하는 허탈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등장인물들을 이런 파국으로 몰고 가는 감정에 대해 납득이 갈 만한 과정이 보이질 않는다.

류승범과 황정민의 연기는 글자 그대로 불을 뿜고,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두 인물이 마주보고 앉아서 국어책만 읽고 있어도 충분히 볼 거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 30분이 완전히 관객의 맥을 뽑아놓는다는 것은 역시 감독의 실수다.

p.s. 황-류도 황-류지만, 온주완은 잘 몰랐던 배우인데 이번 영화에선 정말 훌륭했다. 그 또래에서 보기 드문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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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연말, 패닉의 앨범을 듣고 쓴 글입니다.

'두루두루(Through*2)'라는 제목을 정하고 가장 먼저 쓴 글이죠.





<송원섭의 Through*2> 패닉은 '취업재수생' 정서, 서태지는 '자퇴생' 정서?

듀오 패닉이 7년만에 4집으로 복귀했다. 이적과 김진표, 비록 패닉이라는 이름으로는 아니었지만 두 뮤지션은 모두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활동했던 프로젝트나 팀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원고지 한장은 충분히 채울 정도다. 그렇지만 패닉 이후의 어떤 움직임도 그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지난 95년 데뷔한 패닉의 등장과 성공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와 맞닿아 있다는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많은 팬들은 패닉을 통해 서태지의 공백에서 온 아쉬움을 달랬다. 고만고만한 목소리의 '대중가요 가수들' 사이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새로운 뮤지션의 등장이야말로 대중이 애타게 찾던 것이었다.

한때 신해철은 "서태지는 '낙오자 정서', 내가 대변하는 것은 '비겁자 정서'"라고 정리한 적이 있다. 패닉은 이런 구분에 따르면 역시 '낙오자 정서'에 속하는 그룹을 대변해왔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지금까지 패닉은 비록 낙오자이기는 하나 언제든 현실을 딛고 성공하고 말겠다는 '취업 재수생의 정서', 서태지는 세상은 세상, 나는 나라는 '자퇴생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구별할 수 있다.
패닉의 노랫말들은 현실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는 자신을 노래하긴 하지만, 항상 '현실에의 복귀', 혹은 '언젠가의 화려한 성공'을 동경하고 있다. 4집의 대표곡이 '로시난테'로 뽑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뮤지컬 '라 만차의 사나이'에 나오는 '임파서블 드림(Impossible Dream)'과 일맥상통하는 이 노래에서 이적은 '라만차의 풍차를 향해 달려보자/ 언제고 떨쳐낼 수 없는 꿈이라면', 김진표는 '절대 포기하면 안돼/ 모든 걸 할 수 있는 바로 난데'라고 노래한다. 1집의 대표곡인 '달팽이'에서도 이적은 '언젠가/ 저 멀고 거치른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노래했다.

이적이 불렀던 토이의 5집 수록곡인 '모두 어디로 간 걸까'는 비록 이적이 쓴 가사는 아니지만 이런 맥락에서 너무나도 패닉적인 노래다. '말해줘/ 난 잘하고 있다고/ 나 혼자만 외로운 건 아니라고'라는 가사는 '지금은 비록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지만 나는 결코 이렇게 뒤처져 있지는 않을 거야'라는, 결코 현실을 포기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 사회를 탓하던 분노가/ 마침내 증오가 됐어', '거칠은 인생속에/ 떠나간 마음보다 따뜻한/ 나를 완성하겠어(컴백홈)'라는, 서태지가 갖고 있던 '이 세상을 등져도 어쨌든 나는 나'라는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서태지만큼 강한 의지를 부르짖지는 않지만,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패닉의 목소리가 한층 따뜻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이런 패닉의 목소리가 7년간의 공백을 딛고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어쩌면 7년 전보다, 사람들은 한층 더 이렇게 옆에서 격려해주는 목소리에 목말라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7년 전에 10대였던 패닉의 팬들이라면 이제 사회의 차가운 바람을 정면에서 맞게 된 시점에 만난 옛 친구가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표곡의 제목이 돈키호테의 애마 '로시난테'라는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일찌기 삼국지에 나오는 위무제 조조는 귀수가(龜首歌)라는 시에서 '노기복력, 지재천리(老驥伏?, 志在千里)'라고 읊었다. '늙은 천리마는 구유에 엎드려 있어도 그 뜻은 천리 밖에 있다'는 뜻. 이 시의 댓구인 열사모년 장심불이(烈士暮年 壯心不已), '절개 있는 선비는 비록 늙었어도 당당한 뜻은 사라지지 않는다'와 맞춰 읽으면 바로 마음에 와 닿는다. 그래, 로시난테면 어떠냐. 비록 잠시 뜻을 잃었어도, 또는 이미 늙었어도 타고 떠날 말 한필만 있으면 우리는 모두 정의의 기사 돈키호테인 것을.

송원섭 JES기자 fivecard@jesnews.co.kr

*<Through*2>는 연예계의 다양한 사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칼럼입니다. 제목인 <Through*2>는 걸리는 곳 없이 이리저리 통한다는 <Through+Through>, 한글로는 <두루두루>라는 뜻입니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조는 뛰어난 무장인 동시에 대단한 문장가임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편에 나오는 횡삭부(橫朔賦)도 훌륭하지만 여기서 예로 든 귀수가는 감히 조조의 대표작이라고 부를 만 합니다.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龜雖歌

神龜雖壽, 신령스런 거북이 오래 산다 하나,
猷有竟時. 반드시 죽을 때가 있고
騰蛇乘霧, 이무기(騰蛇), 안개를 타고 오르나,
終爲土灰. 결국은 흙먼지가 되고 만다.

老驥伏? 늙은 준마는 구유에 엎드려 있어도
志在千里, 뜻은 천리밖에 있으며,
烈士暮年 열사는 늙어도
壯心不已. 장한 뜻은 사라지지 않네.

盈縮之期, 넘치고 모자란 때가
不但在天    하늘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네.
養怡之福, 몸간수를 잘 하고 마음을 즐겁게 가지면
可得永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을.

幸甚至哉, 얼마나 행복한가,
歌以詠志. 노래로써 뜻을 읊을 수 있으니.





노기복력(老驥伏력)의 '력'은 木자 옆에 歷자가 붙은 것으로, '말구유 력'이라고 불리는 글자입니다. '노기복력 지재천리, 열사모년 장심불이'. 나이 먹은 뒤에 들으면 다시금 가슴이 뛰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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