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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6일(080706이군요)은 한국 연예계의 국경일 같았습니다.

사실 연예인들은 서로 너무나 잘 알 것 같아도 실제로 그리 친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TV 오락 프로그램이 파티 분위기가 된 것도 몇년 된 얘기지만, 그런 걸 진짜 인간관계로 착각하면 나중에 눈물 흘릴 일이 생깁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박경림이나 유재석의 결혼식은 정말 대단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 연예인 하객으로는 유재석이 단연 역대 최고라고 해야 할 정도더군요. 방송-가요-영화 등 3개 분야를 통틀어 엄청난 하객들이 왔으니까요. 물론 박경림의 경우엔 히딩크나 이명박 대통령 같은 '타 분야 인사'들까지 밀려왔으니 어느 하객들이 더 화려했느냐는 딱 비교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에 비길만한 연예인 결혼식으론 윤태영-임유진 커플의 경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연예계와 정-재계의 초절정 인물들이 운집했죠.)

아무튼 연예계 참석자로만 따지만 앞으로도 유재석의 결혼식을 넘어서는 결혼식이 나오기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17년 전, 유재석이 데뷔할 때만 해도 과연 이런 성공을 기대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을 거란 쪽에 걸겠습니다. 그럼 대체 그는 어떻게 이런 성공을 일궜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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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계 정글 제패한 ‘완소 리더십’
6일 결혼한 ‘국민MC’ 유재석
송원섭 기자 | 제69호 | 20080705 입력  
 
스타들은 대부분 ‘자고 일어나 보니’ 스타가 되어 있더라고 말한다. 대개 그들의 성공은 하나하나 계단을 밟아 이뤄지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무명 인사에서 대중의 영웅으로 변신하는 게 스타의 길이다.하지만 6일 나경은 MBC 아나운서와 결혼하는 MC 유재석에겐 이런 말들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 왔고, 천천히 인정받았다. 최근 유재석이 진행하는 KBS-2TV ‘해피투게더’에 선배 김한국과 김미화가 출연했다. 여기서 김한국은 유재석을 향해 뜨끔한 코멘트를 던졌다. “안 될 줄 알았는데 됐어. 참 신기해.”아무리 후배라도 너무 심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올 만한 말이지만 유재석의 성장사를 TV를 통해 본 시청자라면 은근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를 설명하자면 KBS가 주최한 1991년 ‘대학 개그제’를 빼고 얘기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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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입상자들은 지금 봐도 화려하기 짝이 없다. 한국 개그계 최초로 이적 파문을 일으켰던 김국진·김용만·박수홍·김수용 등 ‘감자꼴 4인방’을 비롯해 남희석·양원경 등이 동기생이 된 것이다. 서울예대 1학년이던 만 19세의 유재석은 지금은 탤런트 임채원의 남편으로 유명한 최승경과 짝을 이뤄 이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당시 유재석이 스타가 되기엔 다른 입상자들의 그늘이 너무 짙었다.

더구나 현재 ‘순발력의 제왕’으로 불리는 그가 초년병 시절 연출자들로부터 ‘콩트는 되는데 토크가 안 된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의 성장을 지켜본 김석윤(영화 ‘올드 미스 다이어리’ 감독) KBS PD도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성의와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 계속 기회를 줬지만 대중의 반응은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세원 쇼’의 ‘토크박스’에 출연한 유재석을 봤는데 약점으로 지적되던 토크가 일취월장해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겠더라”고 회상했다.


 
<유재석이 '웃기기 시작한' 역사적인 순간...^^>

그를 아는 사람들에겐 그의 지나치게 소심한 성격이 불가사의다. 동갑내기 친구인 이휘재에게도 “결혼식 사회를 봐 달라”는 말을 직접 하지 못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요청하는 게 그의 스타일이다. 물론 이런 소심함을 ‘세심함’이란 말로 바꾸면 그의 강점이 된다.

유재석은 본래 스트라이커로 나서 득점왕이 되기보단 어시스트왕이 천직인 사람이었다. 그가 스타가 되기 전에 그와 함께 손발을 맞추던 MC들이 그를 앞질러 스타덤에 올랐다. 강호동이나 이휘재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 그였기에 여섯 명의 ‘무한도전’ 팀원들로부터 자신에게 없는 각기 다른 개성을 뽑아내 모두 스타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는 평가다.

그의 결혼은 과연 대한민국 연예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잘나가던 스타 MC가 결혼하면서 인기가 내리막을 걸은 예는 꽤 있다. 탁재훈과 남희석이 좋은 예다. 강호동이나 김용만처럼 결혼 후에 더욱 주목받은 경우도 있지만 유독 여성 팬이 많은 유재석은 이들과는 좀 달라 보인다. 그럼 유재석에게도 어느 정도 슬럼프가 있을까?

답은 ‘유재석에게 달렸다’다. 남희석과 탁재훈은 결혼 직후 보다 점잖은 이미지로의 변신을 꾀했고, 시청자는 갑작스레 바뀐 이들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했다. 유재석의 경우도 결혼 뒤의 급격한 이미지 변신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유재석이 지금까지 방송에서 보여줬듯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타인을 배려하는 진행 태도’를 유지할 경우 그가 결혼으로 인해 추락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현재 강호동과 예능계 지존을 다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유재석은 지난해에 비해 다소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가 SBS-TV ‘일요일이 좋다’에서 내놓은 새 코너 ‘패밀리가 떴다’는 경쟁 프로그램인 KBS-2TV ‘해피선데이’ 팀이 내세우고 있는 강호동의 ‘1박2일’에 의해 강력한 견제를 당하고 있다.

MBC-TV ‘놀러와’는 KBS-2TV ‘미녀들의 수다’에 재역전을 당했고, MBC-TV ‘무한도전’은 더 이상의 성장동력이 있는지를 의심받는 중이다. 어쩌면 결혼 뒤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이 위기인데, 오히려 결혼을 통한 화제와 관심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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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데뷔초를 지켜본 사람들은 주로 KBS 예능 PD들입니다. 당시 한창 앞서 나갔던 사람들은 김국진 김용만 등 '감자꼴 4인방'이었죠. 이들은 상대적으로 신인들이 약했던 MBC 예능국의 스카우트 제의에 전격 이적을 선언합니다. 코미디언들이 상대적으로 전속 의식이 강하긴 하지만,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닙니다.

KBS 희극인실에서는 이런 '배신'에 대해 난리가 났는데, 진짜 문제는 MBC 희극인실까지 여기에 동참했다는 겁니다. 겉으로는 '의리'가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이들이 넘어와서 MBC 개그맨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걸 경계했던 거죠. 그래서 4인방은 한국 방송계에서 설 자리를 잃었고, 김국진-김용만은 한동안 미국에서 야인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 옛날 얘긴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들 4인방이 이렇게 빠져나가지 않았으면 그들과 함께 데뷔한 어린 유재석에게는 아예 기회가 안 왔을 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어쩌면 이것이 유재석의 운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운이 좋다기엔 초반의 유재석은 너무도 '못' 떴습니다. 그리고 윗글에도 있듯, 유재석은 그 기간을 엄청난 노력으로 보냈죠. 지금의 김신영이나 신봉선이 가끔 얘기하는 '토크 울렁증(대본 대로 하는 콩트는 되는데 오락 프로그램에서의 애들립에 입이 안 트인 상태)'이 누구보다 심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일단 입이 트이고 나자 '나도 그렇게 입이 안 열린 적이 있었다'는 경험이 대단한 자산이 됩니다. 말이 안 되는 출연자들을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이끌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윗글의 제목에 나오는 '완소 리더십'입니다. 여기서의 '완소'는 '완전 소중'이 아니라 '완전 소심'의 약자-라고 제목을 단 사람이 얘기하더군요(당연히 제목은 제가 단 게 아닙니다). 최근 어디선가 '유재석의 롤 모델은 서세원'이라는 제목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얘깁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 하는 유재석 식의 진행과, 출연자를 '가지고 놀면서' 약점을 끄집어 내는 서세원 식의 진행은 출발점이 아예 다릅니다. 아무튼 그가 이렇게 톱스타가 된 마당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유재석이 스타가 된 데에 본인의 노력만이 주효한 것은 아닙니다. 몇 차례의 행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죠. 다음번에는 그 행운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특히 미모의 여배우가 관련된 행운이 있었죠. 오늘은 여기까지.



결혼 축하 의미에서 결혼식 하객 사진을 몇장 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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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빅 3... 뭐 이 정도면 다 본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유난히 이날은 부부 동반 하객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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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용 연예인'의 결혼식이란 뜻일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날의 워스트 드레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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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촬영 가는 참이었을까요?

알고 보니 SBS TV '행복발전소' 출연 의상이군요. 워스트는 아닙니다.

잠시나마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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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영웅 존 핸콕(윌 스미스)은 항상 사람들을 돕지만, 주위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성격 때문에 감사보다는 욕을 더 많이 듣는 캐릭터입니다. 어느날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이상주의자 PR전문가 레이(제이슨 베이트먼)는 그의 나쁜 이미지를 고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지만, 그의 아내 메리(샤를리즈 테론)는 헛수고 하지 말라며 남편을 설득합니다. 어쨌든 핸콕과 레이는 의기투합해 이미지 쇄신 작전을 짭니다.-

'핸콕'을 보고 나오는데 영 느낌이 깔끔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기대했던 영화가 아니더군요. 미국의 '유치한 흥행작의 대가'로 불러도 과언이 아닐 아키바 골즈먼(2편의 배트맨 시리즈와 '아이 로봇', '뷰티풀 마인즈' 등등을 쓴 시나리오 작가 겸 제작자)이나 조나선 모스토가 손을 댔다 하면 모든 영화가 안 봐도 본듯하게 흘러가는게 보통이죠.

그런데 이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을 합쳐도 못 당할 것 같은 슈퍼히어로가 있는데 성격은 최악이라 하는 짓마다 사고만 친다. 이런 슈퍼히어로를 어떻게 계도할 것인가?'라는 설정에다 주인공이 윌 스미스라면 관객들이 어떤 흐름을 기대할 지는 웬만한 제작자라면 짐작하고도 남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의 진행 방향은 이상하게도, 대다수 관객들이 기대했을 '아무 생각 없이 때려부수고 시원하게 즐기세' 와는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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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에 몰입할 수 없었던 건, 이 영화를 그냥 오락영화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자꾸 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는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영화를 보다 보니 핸콕의 모습이 왠지 미국의 은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처음 핸콕이 누워 자고 있던 벤치에 새겨진 흰 독수리, 거기에 이마에 떡하니 붙은 독수리... 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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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는 바로 미국의 상징이죠.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는 짓거리도 미국과 어쩐지 비슷합니다. 세계 최강의 힘을 가졌지만 도대체 철학도 없고, 타자(외국, 타 문화 등등)와의 공존에 대해서는 영 젬병이란 점, 나름 좋은 일을 한답시고 여기 저기 나서는데, 이상하게 도움을 받았다는 쪽이 그리 고마워하질 않는다는 점, 그리고 정작 자기가 왜 욕을 먹는지 본인은 모른다는 것도 비슷하죠. (이를테면 이런 식이죠. "한쿡? 거기 우리 아미가 가서 목숨 걸고 공산화를 막아 준 나라 아니야? 우리 때문에 잘 살고 있는 나라잖아. 그런데 그런 나라가 반미? 걔들은 대체 왜 그래?")

일단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점점 더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웹 검색을 해 봤더니 역시나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 뉴욕포스트의 영화 칼럼니스트 카일 스미스(Kyle Smith)였습니다(그밖에도 여러 명 있겠지만 귀찮아서 다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아무튼 수많은 사람들이 카일 스미스의 칼럼에 대해 자기 생각을 덧붙인 글들을 내놨더군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 분, 상당히 우경화된 분입니다.

“Hancock,” directed by Peter Berg, who also made last year’s pro-America Middle East crime drama “The Kingdom,” is superficially a blockbuster aimed at the masses who like to see cars thrown around and wish they could fly, but for those who read into a film it’s a sly allegory about America’s place in the world today.

원문을 보시려면: http://kylesmithonline.com/?p=1333
(영화를 보신 분들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존 핸콕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찾아봤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핸콕이 자신의 이름이 핸콕이 된 이유에 대해 "...그때 병원에서 간호사가 존 핸콕 어쩌고 하길래..."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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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핸콕은 미국이 독립하기 전 영국의 식민지였을때 자치기구격인 대륙회의 의장을 지낸 인물입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에겐 유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 1776년 7월 4일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큼지막하게 사인을 한 사람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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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문서가 끝나는 부분에 유난히 눈에 띄는 사인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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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존 핸콕의 사인이라는군요. 그런데 왜 하필 병원에서 핸콕이 '존 핸콕'이란 이름을 듣게 됐을까요. 사실 이건 매우 코믹한 부분입니다. 존 핸콕은 저렇게 유명한 위인의 이름인 동시에 미국의 유명한 보험 회사 이름이기 때문이죠.^^

자, 독수리로 도배를 하고, 이름인 존 핸콕도 원래 이런 인물이라면 피터 버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핸콕=미국'이라고 읽어 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 그 의도는 어떤 방향일까... 생각해 보는데, 영화가 영화다 보니 '미국의 권력 남용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억울한 오해에 대한 푸념' 쪽의 성격이 강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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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핸콕이 비록 망나니 짓을 하지만,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도 핸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핸콕의 행위가 선의에 입각한 것이고, 핸콕이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지도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핸콕이 욕을 먹는 것도 나쁜 짓을 해서라기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는 해명입니다. 상당히 핸콕을 옹호하는 시선이 느껴지죠.

게다가 '핸콕이 없어지면 2주도 못가 사방에서 찾고 난리가 날 것'이라는 접근도 "니들이 맨날 미국 욕을 하지만 정작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세상이 더 개판이 될 걸?"이라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냄새를 풍깁니다.

피터 버그 감독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배경으로 만든 전작 '킹덤'에서도 은근히 '미국이 온 세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행을 외면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정의 실현에 기여해야 한다'는 시각을 보여줬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뭐, 미국 감독이니 '미국의 국제 활동에 대한 건설적인 조언을 했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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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그냥 제 생각일 뿐이고, 이런 생각들은 영화 '핸콕'을 즐기는 데 별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냥 특이한 슈퍼히어로 무비로 소비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죠.

하지만, 그냥 순수한 오락영화라고만 본다면, '핸콕'의 주인공들이 너무 심각하게 꼬여버린다는 점이 좀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중반 이후에 영화가 초반의 경쾌한 유머 감각을 잃고 발이 무거워진다는 점도 약간 거슬리죠. 꽤 놀라운 반전(!)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 여러분들이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할 장면들은 바로 여러분이 예고편에서 본 그 장면들이라는 이야기를 빠뜨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째 예고편이 너무 길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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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배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의 윌 스미스는 매우 훌륭합니다. 반면 한때 영장류 최고의 미모를 자랑했던 샤를리즈 테론은 이 영화에서 역할이 너무 작아 보이죠. 뒷부분으로 가면 꽤 활약이 있기도 합니다만, 근래 테론의 괜찮은 작품을 본 기억이 없고 보면 아카데미 후유증이 너무 오래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깊이 얘기를 하려면 줄거리를 건드려야 하는 영화라 참 뭐라 쓰기가 민감합니다. 아무튼 '핸콕'은 아무 생각 없는 코믹 액션을 보고 싶은 사람들이나, 영화를 보면서 자꾸만 이상한 가정을 세워 보는 사람들 모두가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비록 그중 어느 한 쪽도 '최고의 영화'라고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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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영화 속에서 핸콕이 나발을 불고 다니는 버본 위스키의 상표를 혹시 보신 분이 있으신가요? 실제로 존재하는 술인지 그냥 가상의 술인지가 궁금합니다. 찾아보니 참 어이없게도 '핸콕'이라는 이름의 버본 위스키가 있더군요. 그런데 영화 속의 병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럼 대체 그 술의 정체는 뭐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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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다 보면 비밀이 없어지는 법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정준호군으로부터 들을 때만 해도, 그는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혼자만 킥킥거리고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긴 세월이 흘렀고, 어느날 TV를 보니 정준호 본인과 신현준이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물론 방송용이기 때문에 살짝 달라진 부분도 있고, 또 본인 이외의 다른 사람이 본 시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냥 흥미거리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나자나 정군, 빨리 장가를 가야 할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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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선택으로 <친구>를 날려 버린 정준호

캐스팅을 둘러싼 뒷얘기는 결국 연기자의 입장에선 '놓친 고기가 크다'로 요약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작품에 출연해 달라고 매달리는 제작진을 간신히 거절하고 자신이 평소 생각해온 작품을 선택했을 때, 공교롭게도 거절한 작품은 대박이 나고 고심 끝에 선택한 작품이 악평과 흥행부진 속에 묻혀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은 그리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얼마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현준이 "영화 <친구>의 장동건 역할은 원래 정준호 거였다. 내가 반대해서 정준호가 그 작품을 놓친 것"이라고 얘기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사실은 사연이 좀 더 길다. 이야기는 지난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곽경택 감독과 <친구> 제작진은 처음부터 두 주인공을 유오성과 정준호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당시 정준호는 MBC TV 드라마 <왕초>에서 50년대의 정치주먹 이정재 역할을 멋지게 해내며 곱상한 용모 이상의 배우임을 만천하에 인정받았던 터. 이 때문에 <친구> 팀도 정준호에게 선이 굵은 남성적 연기를 기대했고, 정준호도 90% 이상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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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친구>팀은 제작비 조달 문제로 촬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고 정준호의 주변에는 <친구> 출연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곽경택 감독이 <친구> 이전에 연출한 <억수탕>과 <닥터K>가 흥행은 물론이고 작품성에 대한 평가마저도 신통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준호는 절친한 후배 장동건으로부터 상담 요청을 받았다. 술자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고민을 얘기하다가 대본을 바꿔서 읽어 보기로 했다. 장동건이 정준호에게 건넨 시나리오는 <싸이렌>. 소방관들의 이야기로 역시 선 굵은 남성 드라마를 표방하는 작품이었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말이 맞았는지, 두 사람은 서로 바꿔 본 대본에 푹 빠졌다. 장동건은 장동건대로 자신의 꽃미남 이미지를 깨 버릴 수 있는 조폭 동수 역할에 끌렸고, 정준호도 <싸이렌>에서의 지적인 소방관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 이미 <싸이렌> 출연이 결정된 신현준도 "같이 하자"며 정준호를 부추겼다. 결국 정준호는 며칠 뒤 장동건을 만나 "작품을 맞바꾸자"는데 의기투합했다.

결단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2000년 개봉한 <싸이렌>은 곧이어 개봉한 <리베라메>와 함께 그해 최대의 재난영화(재난을 소재로 다뤄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재난이 된)로 기억되게 됐지만 이듬해 개봉한 <친구>는 82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 장동건은 이 작품으로 '얼굴만 잘 생긴 배우가 아니었다'는 호평을 얻었고, 그가 연기한 동수 역은 지금까지도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대사와 함께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싸이렌>의 실패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친구>가 대박이 나자 정준호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불과 며칠만에 내린 '맞바꾸기'가 이렇게 큰 차이로 남을 줄이야. 울화를 달래기 위한 술자리가 잦아졌다.

이 무렵 정준호의 후배 하나가 혼자 술집에 앉아 있는 정준호를 발견했다. 본래 두주불사인 정준호였지만 이날은 꽤나 취해 수첩에 깨알같이 뭔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알 만한 사람, 모를만한 사람 합쳐 20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형, 뭐 적어요?"
"응. 명단.
"무슨 명단?"
"<친구> 하지 말라고 말리던 놈들 명단."

후배도 뭔가 서늘한게 느껴졌지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런데 이걸 왜 적어요?"
"다시는 아는 척도 안 하려구. 내가 앞으로 이 놈들이랑 어울리면 성을 간다."

그러나 사람 좋은 정준호에게 이런 원한이 오래 갈 리 만무한 일. 게다가 <친구>를 놓친 대신 그해 <두사부일체>, 이듬해 <가문의 영광>으로 한국 영화계 최고의 달러 박스로 우뚝 일어섰으니 한때 그토록 가슴아팠던 <친구>얘기도 이제는 웃으며 할 수 있는 추억담이 돼 버렸다는 얘기다. 이처럼 '순간의 선택'으로 배우의 운명이 갈리는 건 연예계에선 그야말로 비일비재한 일이다. (End)





그러니까 그림으로 재구성하면 이런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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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친구' 동수 역 제가 하는게 맞을거같지 않슴까? 이렇게 연습까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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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동건이가 건달 연기를? 하지만 사랑하는 후배를 위해 그 정도는 양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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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나도 현준이형이랑 '싸이렌'을 하는게 나을거 같으니까."
"그래. 역시 우리는 같이 가는게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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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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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 연기? '해안선'에서 하던 대로 하니깐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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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싸이렌... 헉, 그런데 왜 다들 날 외면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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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감사합니다. 인기랑 돈이랑 상이랑 제가 다 가져갑니다.
"..."
(주위: 웅성웅성 "우리가 잘못 권한 모양인데..;;" "당분간 피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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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대체 왜 날 꼬신거야. 왜 그랬어, 응?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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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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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언제나 그렇듯, 그냥 그랬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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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너무나 많아서 뭐부터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딱 한마디만 하라면,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은 대재난이란 말을 해야겠군요. 한마디 더 하라면,'삼국지-용의 부활' 제작진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적벽대전'을 보고 나니 그만하면 '삼국지-용의 부활'은 걸작이라고 불러도 좋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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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을 기다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저도 그중 하납니다. 그래서 더 배신감이 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불안한 전조가 비치긴 했습니다. 기사 인용입니다.

'그래서 제작진은 <적벽>이 무협판타지가 아니라 좀더 사실적인 역사극이라는 걸 누누이 강조한다. 특히 오우삼은 “<삼국지>보다는 <삼국사기>를 주로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극적으로 왜곡된 캐릭터와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좀더 적확하게 고증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 굴지의 영화전문지 기사입니다. 그런데 내용이 뭔가 찜찜합니다. '삼국사기'? '후한서'도 아니고, 진수의 정사 '삼국지'도 아니고, '삼국사기'? 설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아니겠지요? 중국 사서에 '삼국사기'라는 책이 있다는 얘기는 도무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 영화사 쇼박스가 제작에 참여하는 바람에 한국 역사책을 참고했다는 뜻일까요?

아무튼 삼국사기건 뭐건 정말 정사를 참고해 고증에 충실했다는 뜻일 것 같은데, 문제는 만들어 놓은 영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고증에 충실했느냐가 좋은 영화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일단 그 부분에선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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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 조조(장풍의)는 헌제를 협박, 유비와 손권의 토벌을 허락받고 대군을 움직입니다. 유비는 백성들을 다 데리고 가느라 박살이 나고, 조운(호군)은 아두를 구합니다. 제갈양(금성무)은 손권(장진)을 설득해 함께 조조에 대항하려 합니다. 손권을 만난 제갈양은 그 하나만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님을 깨닫고 적벽에 주둔한 주유(양조위)를 설득하러 갑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의기투합, 조조를 무찌르기 위해 공동 전선을 폅니다.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 (赤壁: Red Cliff, 2008)'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절정을 이루는 적벽대전 전후의 이야기를 다룬 오우삼 감독의 4시간 짜리 대작의 앞부분입니다. 일단 절반은 북경 올림픽 전에 개봉하고, 나머지 절반은 연말쯤 개봉할 예정입니다. 당연히 진짜 적벽대전의 화공 신은 후반부에 있고, 전반부는 대륙의 영웅들이 어떻게 결전을 준비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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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행히도, 앞부분의 '적벽대전'에서는 전혀 박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일단 소설과 영화는 결코 작지 않은 차이를 보입니다. 오나라의 군웅들을 압박하는 제갈양의 현하 달변은 1분 정도로 압축돼 버렸습니다. 제갈양 혼자 오나라 군중에 머물지도 않고, 아예 유비와 손권, 주유가 연합 사령부를 만들고 함께 작전을 의논하고 군사훈련도 함께 합니다. 감녕과 조운이 친한 사이가 될 정도죠. 박진감 넘치는 소설 속의 사건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주유와 제갈양은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관객들을 졸음에 빠뜨립니다.

'삼국사기'(?)를 참고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고 소설과 벗어나 정사에 충실한 것도 아닙니다. 도입부에서 조조가 유비와 손권의 정벌을 허락받는 장면부터 엇나가기 시작합니다. 조조는 당시에 유비와 손권을 정벌하러 길을 나선게 아니었죠. 유표를 정벌하러 갔다가 형주가 의외로 쉽게 떨어지자 그 길로 동오 정벌에 나선 겁니다. 게다가 조조의 군대가 80만이라는 건 소설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으로 저지른 뻥의 결과죠.

정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이 어정쩡한 대본은 오우삼 본인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특히 삼국지연의든 정사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유비-손권 연합군의 합동 군사훈련 이라니, 마치 영화 '젠틀맨 리그'를 보는 듯 합니다. 삼국지를 읽은 초등학생의 상상을 대본으로 옮겨놓은 거라고나 할까요.

사실 이 부분을 보다 보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결국은 적이 될 운명이지만 서로 끌리는 두 인물, 제갈양과 주유는 왠지 '첩혈쌍웅'의 주윤발과 이수현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조조를 응징하기 위해 서로 씩 웃으며 협력하는 영웅들은 어딘가 '영웅본색 2'의 다시 만난 삼총사를 보는 듯 합니다. 어쨌든 이런 설정은 기존의 삼국지와 썩 잘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15세 이하용 삼국지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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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이 이 수준이니 천하의 명배우가 온 들 어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주유 역의 양조위와 제갈양 역의 금성무를 비롯해 도대체 이 대본으로는 캐릭터가 그려지질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나마 사람처럼 보이는 건 조조 역의 장풍의와 손권 역의 장진, 그리고 손상향 역의 조미 정도입니다.

미스캐스팅의 냄새도 짙습니다. 아마도 감독의 의도는 진짜 주인공을 주유로 놓고 있는 것 같은데 양조위는 이 역할에서 그만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상향 역의 조미는 '남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상무 공주'는 커녕 천방지축 날뛰는 말괄량이 '황제의 딸' 연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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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 손상향, 아래가 유비...)

뭐 딱이 나쁜 건 아니지만 유비와 짝을 이룰 일이 걱정스럽습니다. 유비 역에 뭔가 있어 보이는 미중년 배우가 나섰더라면(...주윤발?) 모를까, 정말 지금의 유비로는 너무 심각한 아버지와 딸 구도밖에 안 그려집니다.

그럼 액션은 어떨까요.

일단 개인전은 게임 '진 삼국무쌍'의 실사 화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관우와 장비, 조운은 '소설 원작' 대로 수백명의 적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게임 화면같은 전투를 벌입니다. 물론 말을 타지 않고 땅 위에서 말입니다. 너무 비슷한 전투가 계속 펼쳐지는 바람에 나중엔 지루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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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전도 안습 수준입니다. 동양식의 전쟁 묘사라면 지금까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비길 만한 것이 없었다는게 중론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들면서 오우삼은 두 편의 할리우드 에픽에서 따 온 장면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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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되는 방패는 킹 비더 감독의 1959년작 '솔로몬과 시바'에서 나온 것이고, 팔괘진에 갇힌 조조 기병대의 모습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1970년작 '워털루'에서 영국 보병대의 방진에 갇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폴레옹 기병대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특히 전장 전체를 조망하며 내려오는 부감 촬영은 같은 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죠.

모방은 했으되, 기본적으로 전쟁이라는 것을 연구하지 않은 태가 역력합니다. 조조군의 마지막 무기(?)인 방패작전 같은 것이 그렇죠.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만한 병력을 진영 속에 가둬 뒀으면 화살 몇 대로 끝날 일을 갖고 장난감 쇼를 합니다.

오우삼이 '란'이나 '가게무샤', 혹은 가도카와 하루키의 '하늘과 땅과' 등을 한번이라도 봤다면 이런 유치한 장난은 하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명장'의 전투 장면도 이 영화보다는 훨씬 더 리얼하게 느껴지고, 무려 19년전 영화인 정소동의 '진용'의 기마 전투 신도 이 영화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오우삼과 연출진이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무술감독으로 개인간의 액션에 강한 원규보다 집단 액션의 경험이 풍부한 정소동의 도움을 받았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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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 이후, '평이하고 지루하다'는 평과 '만화같고 재미있다'는 평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좋다는 의견도 상당수 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너무 실망이 커서인지 연말 개봉 예정인 '적벽대전' 후편을 보게 될지가 의문입니다. 욕을 하더라도 봐야 할지, 아니면 그나마 안 보는게 오우삼에 대한 지금까지의 추억을 보존할 수 있는 일이 될지 말입니다.


p.s. 삼국지를 읽지 않은 초등학생들에게는 좋은 오락영화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미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선택일 수 있겠군요. 오우삼에게 정통 대하 사극을 기대한게 잘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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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이런 장면은 후편에 나올 모양입니다. 삼국지 팬들은 보는 즉시 어떤 장면인지 아시겠죠. 참고로 왼쪽 인물은 노숙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이해하시는 분들은 개봉을 앞둔 '적벽대전'을 보시면 실망을 피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p.s.3. 오우삼의 영화답게 비둘기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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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짓을 포함해 7시간(시계상으로는 5시간. 한국보다 2시간 늦다)을 날아 씨엠립에 도착해 보니 오후 5시.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 정도 규모의 공항이 막 풀어놓은 한국인 관광객들로 복작복작한다. '자리만 비즈니스석'에 앉은 덕분에 일찍 나왔는데도 앞 비행기가 풀어놓은 손님들이 많은지 입국장은 빽빽하다.

 

입국장이 혼잡한 가장 큰 이유는 캄보디아가가 입국 비자 형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여행자들은 도착후 미화 20달러와 사진을 제출하고 비자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비행기 안에서 비자 서류를 작성하게 되어 있는데, 이 처리가 시간을 잡아먹는다.하지만 이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팁!일단 배운대로 실행을 했다. 시장통같은 입국장에서 일단 제복 입은 사람을 발견, "V.I.P"라고 말했다. 무슨 말이냐는 듯 한번 쳐다본다. 다시 한번, 또박 또박, "V.I.P"라고 말하자 그의 얼굴에 약간 난처하다는 듯도 하고,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도 한 미소가 떠오른다.몇명이냐고 묻고, 사진과 여권을 받아 가는 그에게 얼마냐고 물으니 "1인당 1불"이란다. 그렇다. 이게 바로 캄보디아판 급행료다. 이 급행료의 가격은 공항 직원 개개인의 성벽에 따라 1불부터 5불까지 다양한데 아직 5불을 넘는 거액(?)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비자 처리 테이블을 보니 고소를 금할 수가 없다. 20불씩 내고 비자를 만드는 사람들이 선 줄은 수백미터가 될 지경인데 이 줄을 처리하는 직원이 단 두명이다. 나머지 직원들은 V.I.P들(!)을 처리하거나 뭔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아무튼 1불씩을 더 낸 덕에 공항의 인파를 멀리 하고 얼른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가는 빗발이 뿌리는 가운데 택시 스탠드가 보인다. 시내 5불, 하루 임대는 25불. 뭔가 공인 가격인듯한 냄새가 풍기기에 주저하지 않고 호텔까지 5불을 내고 가기로 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소르(Sor) 시르니르낫(Sirnirnath). 소르는 성에 해당하고, 아는 사람들은 그저 니르낫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밝은 성격에, 흔히 볼 수 있는 동남아식의 '어쨌든 통하긴 통하는 영어'를 구사한다. 피차 짧은데 잘 됐다. 오히려 이런 쪽이 더 잘 통한다.  아무튼 우리의 니르낫 군은 자기가 내일부터 태우고 다닐테니 임대를 하란다. 대부분의 관광 책자에 20불이라고 돼 있긴 하지만 사실 하루 종일에 25불이라는 것은 한국적인 정서로는 대단히 싼 가격이다. 그리고 인상도 멀쩡해서 이 정도 기사 구하기도 힘들 것 같아 그러마고 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됐길래 명성이 자자한 평양랭면에 들렀다 가자고 했더니 OK.

 

식사를 마치고 보니 호텔은 바로 평양랭면 길 건너 골목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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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들의 미모는 상당한 수준. 노래와 춤도 수준급.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간드러진 평양말씨의 애교 넘치는 서비스 솜씨는 그야말로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합니다. 손님들이 식사를 끝낼 때쯤 가까이 와서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옆에 서서 말벗이 되어 줍니다. 물론 음식 맛도 훌륭합니다만, 누가 교육을 시켰는지 몰라도 사근사근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평양이 일찌기 조선 500년을 관통한 색향으로 군림했던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군무(?)입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건 혼자 춤추던 북한 처자의 모습. 화면 시작하고 10초만 있으면 환상적인 대회전 묘기를 볼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렇게 춤을 추고 바로 홀로 나가서 서빙을 시작한다는 것이죠.



아무튼 좀 안된 것은 철저하게 폐쇄 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사원 가 봤습니까?"하니 "저희는 쉬는날이 별로 없어서 못가봤습니다" 하는 겁니다. 아니, 씨엠립에서 앙코르 와트를 못 가보다니.

이들의 말에 따르면 휴일은 한달에 꼭 하루. 그날은 아예 가게 문을 닫고 미니버스 같은 차량으로 같이 가게를 나서 쇼핑을 하건 돌아다니건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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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냉면 맛은 기본.^^



첫날 밤을 그냥 보내기도 그렇고 해서 현지 레스토랑 쿨렌2(KULEN 2)에서의 압사라 공연을 예약했다. 뷔페를 포함하면 1인당 11불, 공연만은 6불이었다. 호텔에서 나갔다 들어오는 차편이 왕복 10불. 물론 돈을 더 절약하고 싶으면 오토바이 택시인 툭툭으로 왕복 6불 이내에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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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분위기가 동남아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장식당 분위기라 약간 실망도 했지만 공연의 수준은 상당했다. 한국도 오래 전에는 국악의 맥을 잇는 사람들이 관광객을 위한 식당에서 부채춤을 추는 것으로 연명해야 했었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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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계속 오는 가운데 씨엠립의 나이트 라이프 중심지라는 올드 마켓 에리어의 펍 스트리트(Pub Street)를 가 봤지만 진창 속에 인적이 드물다. 파타야나 푸껫의 유흥가는 여기에 비하면 타임즈 스퀘어로 보일 지경이다. 지나가는 툭툭을 타고 그냥 호텔로 귀환해 새 날의 일정에 대비하기로 했다. 자, 드디어 본격적인 사원 관광 시작이다.



1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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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앙코르 와트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뛰십니까? 아니면 씨엠립이라는 도시 이름을 들어 보신 적 있나요? 아니면 캄보디아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시는 편입니까?

 

블로그를 옮기면서 옛날 글들을 조금씩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글은 옛날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진이 전부 깨졌더군요. 옛날 블로그에서 손을 볼까 하다가 아예 옮기는 김에 새로 만지기로 했습니다.

요즘 부쩍 씨엠립과 앙코르 와트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들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적극 권장입니다. 특히 건기에 가실 수 있는 분들은 대단한 행운아라고 해야겠죠. 이 글들은 제가 무작정 다녀온 씨엠립 여행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벌써 2년전 얘기지만, 그래도 아직은 정보로 쓸만할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소년중앙>류의 책에서 '밀림 속의 신비, 앙코르 와트' 류의 글을 읽은 뒤부터 앙코르 와트에 한번 가 보는 것은 저의 변함없는 꿈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크메르라는 나라는 캄보디아로 이름을 바꿨고, 어느새 '절대 갈 수 없는 나라'에서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제대로라면 건기인 10월에서 12월 사이에 갔어야 했지만 그래도 갈 짬이 났다는 게 너무나 기뻤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아쉬웠지만 아직도 다녀왔다는 게 꿈만 같을 정도로 앙코르 와트는 멋진 곳이었습니다. 혹시나 가실 분이 있을까봐 지난 6월말부터 7월초까지 다녀온 경험을 기준으로 준비 과정을 상세히 적어 봅니다.

다른 곳에 써 있는 글을 퍼온 탓에 갑자기 반말을 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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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막연히 '직항기인 아시아나를 타고 씨엠립(앙코르 와트를 구경하기 위해 가야 할 도시)적당한 호텔에서 자면 되겠지' 정도로만 구상하고 있었다. S씨의 친척이 현지에 있다니 적당히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이한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일단 항공료. 씨엠립 직항 아시아나는 1년중 가장 싼 가격이 64만원이었다. 유류부담금(그런게 있다)을 합하면 73만원 정도 되고 두 사람이면 약 150만원이 항공료로 소요된다.

뭐 싸다면 싸다(아시아나의 7월 가격은 유류부담금을 합해 80만원쯤 된다). 하지만 이거보다는 더 싼게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베트남 항공은 가격에서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훨씬 불편하다. 그러나 원동항공이라는 대안이 있다.

 

원동항공은 6월말 가격이 30만원(+유류 39만원)이었다. 거의 절반 가격이다. 물론 직항이 5~6시간 정도 걸리는 반면 원동은 갈아타는데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해 7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기내식은 나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경험해본 결과 이 악평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내식 한번에 30만원을 걸 사람이 아니라면, 아시아나를 타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원동항공을 개별적으로 탑승하면 흔히 로열 이코노미라고 불리는 '좌석만 비즈니스석'에 배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같이 타는 승객의 90%가 패키지 여행객이다 보니, 이들 중에서는 누구 하나를 빼서 좌석 승급을 시켜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행사가 장사를 잘 해서 객석이 만석이 되면 개별 여행객들이 그 과실을 따먹게 된다.

불행히도 원동항공은 2008년 현재 서울-씨엠립 구간을 운행하지 않습니다(회사가 부도 났다는 설도 있더군요). 아무튼 그래서 현재로서는 이만치 싸게 날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떠나는 아시아나 직항의 여름 요금은 여전히 60만원대(유류할증료 포함). 방콕-씨엠립 구간의 항공편은 16만원 정도지만(http://www.bangkokair.com/en/index.php) 서울-방콕 요금을 생각하면 이쪽이 쌀 리는 없습니다. 방콕 구경을 겸할 거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가격만 생각한다면 개별적으로 가는 것이 역시 훨씬 비싸다. 우리 부부의 경우 항공권이 원동항공으로 2인 합계 78만원, 호텔비가 9만*4박 해서 36만원 들었다. 반면 적당한 패키지를 이용했다면 1인당 39만원+유류 9만원 해서 48만원, 곱하기 2하면 96만원 정도가 든다. 여기에 교통비, 식대, 가이드비(만약 쓴다면) 등을 감안하면 패키지는 개별 여행의 60% 가격 수준이 된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취향에 따른 선택이다. 만약 당신이 (1) 일단 관광지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싶고 (2) 호텔의 레벨이 좀 낮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고(사실 패키지로 여행을 가 보면 호텔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란 거의 자는 시간 뿐이다. 따라서 호텔 시설은 어쨌거나 상관이 없다) (3) 가이드가 가자는 대로 악어농장에서 사파이어 가게까지 온갖 쇼핑센터를 가도 참을 수 있고 (4) 피곤해도 절대 먼저 호텔에 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모두 웃어 넘길 수 있다면, 패키지 여행은 대단히 좋은 선택이다.

내가 패키지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1) 앙코르 지역의 사원들을 데리고 다니는대로 다 돌기에는 체력에 자신이 없었고 (2) 날도 더운데 좀 좋은 호텔에서 좋은 수영장의 혜택을 누리며 탱자탱자하고 싶었고 (3) 새벽에 나가서 저녁식사 후에 호텔로 기어들어와 기진맥진 잠이 드는 여행은 이젠 하고 싶지 않았고 (4)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곳만 골라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건 부수적인 거지만, 아무래도 개별 여행을 하게 되면 여행지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하게 되고,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뭐라도 더 남게 된다. 게다가 '이런 건 나만의 여행에서만 할 수 있다'는 경험도 몇가지 가질 수 있다. 지난 2004년 베이징에 갔을 때, 나는 북경짜장면도 먹어 보고 싶었고, 북한 식당의 평양냉면도 먹어 보고 싶었고, 명십삼릉 중에서 영락제의 장릉도 보고 싶었고, 북경 동물원의 팬더도 보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실크 이불이며 싸구려 진주 공장을 돌아봐야 했다.

Angkor Palace Resort & Spa는 분류에 따라 4성 또는 5성으로 의견이 갈리지만 아무튼 최고급의 호텔이었다. S씨의 추천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호텔이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었겠지만, 특히 그녀의 오라버니가 경영한다는 S사는 인터넷 가격 120~150불인 이 호텔을 90불에 예약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과정은 이렇다.

인터넷으로 이 호텔의 가격을 알아보다가 최저가로 85불을 발견했다. 이걸로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해 봤다. 전화를 안 받는다. 다시 걸어봤다.

현지인이 전화를 받아 쏼라쏼라한다.

S사에 전화했다.

S사: 식비는 끼니당 5불 정도, 호텔비는 40불 정도면 좋은 데서 주무실수 있습니다.
나: 저어, 호텔은 APR&S로 하려고 하는데...
S: 네? 거긴 좀 비싼데요.
나: 비싸다면 어느 정도...?
S: 우리가 예약해도 150불 정도 됩니다. 할인을 잘 안 해줘서 패키지가 잘 못 들어가죠.
나: 좀전에 인터넷에서 85불짜리를 봤는데요?
S: 그럴리가요. 그럼 확인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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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S: 확인해봤는데 우리가 해도 90불 정도까지밖에 안 된답니다.
나: 그래요? 생각보다 좀 비싸네요.
S: 네. 이제 저희가 90불보다 더 받을 수는 없고... 그 가격에 하려면 하세요.

전화를 끊고 생각해봤다. 어딘지도 모르는 호텔 예약 사이트에다 카드를 오픈하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5불 정도 더 내고 믿을만한 국내 회사에 하는게 훨씬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아무튼 이런 절차는 호텔 예약을 할 때 초보자들이 참고해야 할 부분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호텔비와 항공권에는 정가라는 것이 없다. 따라서 '호텔비 50% 할인'같은 문구야말로 사기 중의 사기다. 세상에 정가도 없는데 어디서 뭘 어떻게 할인을 한단 말인가? 국내 호텔들도 어떤 때에는 10만원, 어떤 때에는 30만원씩 하는게 보통이다. 따라서 적당한 가격을 골라 내는 데에는 제법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제법'이라고 해 봐야 구글을 이용해 약 1시간 정도만 웹서핑을 하면 충분하다.

이렇게 해서 항공권과 호텔을 잡았다. 이제 가기만 하면 된다. (계속)

p.s. 현지 여행사와 잘 얘기하면 7월초까지는 70불 정도에 잘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역시 저는 웹서핑 시간이 좀 짧았던 것 같습니다.





2편으로 넘어가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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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순탄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에나 밀러의 결혼이 결국 없던 일이 된데 이어 유부남과의 열애설이 한창입니다. 게다가 누드 사진까지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한다는군요.

그 유부남은 바로 발타자 게티. '게티'라는 이름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 제대로 보신 겁니다. 배우이기도 하지만 석유 재벌의 후손이라는군요. '알리아스' 등에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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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올해 역대 최강의 미녀와 야수 커플이 탄생할 거라던 뉴스는 이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미녀와 야수인지 밀러와 결혼할 뻔 했던 리스 이밴스의 얼굴을 보시면 알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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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팅 힐'에서 휴 그랜트와 함께 살던 괴짜 친구,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Rhys Ifans. 예전부터 리스 이판, 리스 아이판스 등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없게 하는 희한한 이름이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Reese Eevans', 즉 '리스 이밴스' 라고 읽는 것이 정확한 발음이라고 합니다.

1968년생이라 1981년생인 밀러와는 무려 13년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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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은 '노팅 힐'에서 줄리아 로버츠를 기다리던 파파라치 앞에서 팬티 바람으로 포즈를 취하는 장면, 그리고 왼쪽은 실생활에서 그가 파파라치에게 포착된 장면입니다.


자, 이 대목에서 시에나 밀러의 옛날 애인과 한번 비교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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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최고의 미남 스타 중 하나인 주드 로를 만나다가 리스 이밴스를 만난다는 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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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와 시에나 밀러가 데이트를 하던 시절부터 주위에선 '미녀와 야수' 운운하는 이야기가 적잖이 오갔는데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됐군요. 그런데 반드시 '노팅 힐'에서의 모습만을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밴스에게는 또 다른 모습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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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

그러니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니발 라이징'에서 한니발의 숙적인 악당 그루타스도 리스 이밴스가 연기했습니다. '노팅 힐'을 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죠. 이런 팔색조같은 면모가 시에나 밀러에게 매력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번 커플을 계기로 역대 할리우드의 미녀와 야수 커플들을 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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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화제를 모았던 가수 제임스 블런트와 슈퍼모델 페트라 넴코바.

네. 아무리 잘 봐줘도 블런트는 잘생긴 얼굴은 아닙니다. 물론 가수로는 톱스타죠.

한국에서도 CF로 잘 알려진 'You're Beautiful'이 그의 노랩니다. 하지만 노래의 마력이 시들었는지 지금은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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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로페즈와 마크 앤서니는 잉꼬부부로 잘 살고 있습니다.

사실 벤 애플렉과 비교해 마크 앤서니의 인물을 '웃기게 생겼다'고 비웃는 사람이 많지만 앤서니는 라틴 음악계에서 최고의 스타입니다. 리키 마틴이나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를 능가하는 인기남이죠.



가수들은 목소리로 어필한다면 남들도 뭔가 어필하는 점이 있어야겠죠.

이 경우엔 유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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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톰 그린과 드루 배리모어. '미녀삼총사' 커플인 셈이죠.

그가 출연한 영화를 틀어놓기만 해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IQ가 10포인트씩 떨어진다는 톰 그린의 유머감각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지금은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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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그의 마케터(우리나라로 치면 매니저?) 조던 브래트먼.

뭐 야수..라기 보단 좀 졸립게 생겼습니다. 심심찮게 구설에 오르지만 잘 삽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역대 최강은 이 커플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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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벌써 옛날 얘기가 돼 버렸지만, 일찌기 줄리아 로버츠가 라일 로빗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을 의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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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녀와 야수'류의 커플들은 윈윈 커플입니다. 남자의 경우엔 본래 능력이 빼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미녀와 맺어지는 순간 지금까지보다 두 배 이상 높은 평가를 누리게 됩니다. 일반인이고 평소에 별볼일 없는 친구로 통했더라도 미녀 여친이 드러나는 순간 '뭔가 있는 친구' 혹은 '대단한 친구' 로 불리게 되죠. 우스개로는 이런 커플이 다니면 그냥 '남자가 돈이 많은가봐'하고 만다지만, 그게 어딥니까.^^

여자 쪽에서도 이점이 있습니다. 여자들 가운데서도 '인물만 밝히는' 여자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죠. 하지만 용모가 떨어지는 남자를 사귀는 여자들에겐 '겉모습보다 내면을 볼 줄 아는 생각이 깊은 여자' 라는 호평이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죠. '리스 이밴스 정도가 해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라고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군요.

아무튼 간혹 주위에서 속 없는 사람들이 '네가 손해보는 느낌'이라고 부추길 수도 있겠지만, 누가 뭐라면 어떻습니까. 사실 자기만 좋으면 그만 아닙니까. 남의 얘기에야 신경 쓸 필요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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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자나 시에나 밀러는 언제쯤 정신을 차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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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주말에 볼 영화들을 고르다 보면 왠지 심각해지고 피곤해질 것 같은 영화들은 저절로 피하게 됩니다. 안 그래도 복잡하고 고민할 것 많은 세상, 극장에서 들어가서까지 힘들어 질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은 이건 그래도 봐야 할 것 같다는 작품들이 나옵니다. 지난해 본 영화 중에는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이 그랬죠. 질식할 것 같은 압제 사회에서 한 지식인과 그를 감시하는 남자 사이의 묘한 유대에 대한 영화...라는 설명만 듣고는 별로 볼 의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보고 나서는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되뇌게 되는 작품이었죠.

'크로싱'을 보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이런 현실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절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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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섭의 두루두루] 한국 영화 속의 새로운 북한, '크로싱'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막을 연 '쉬리' 이후 한국 영화에 나온 북한 또는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일정한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민식이 연기한 '쉬리'의 북한 특수부대 지휘관 박무영이나 송강호가 연기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오경필 중사가 대표적이다. 남한이 상징하는 물질적 풍요에는 전혀 굴하지 않고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인물들로 그려졌다.
 
북한의 '자존심', 혹은 '자주성'은 종종 젊은 세대에게 매력적으로 비쳐진다. 사사건건 강대국의 눈치를 보는 듯한 한국 정부가 주로 비굴해 보이는 반면, '우리를 건드리면 핵전쟁이 터진다'며 고개를 빳빳이 처드는 북한 정권의 모습이 시원스레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권 아래서 일반 국민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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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를 다룬 영화도 꽤 있었지만 '크로싱'과는 달랐다. '국경의 남쪽'의 차승원은 할아버지와의 편지 왕래가 없었다면 북한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인물이었다. '태풍'의 장동건의 주된 분노의 표적은 그들 가족을 받아주지 않은 남한 정부였다. 그의 가족이 왜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반면 '크로싱'의 김용수는 결핵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내의 약을 구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중국 국경을 넘어 벌목장에서 일하게 된 인물이다. 군사정권 시절 반공영화 이후로 이런 인물과 이런 북한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암시장을 방황하며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는 어린 꽃제비들의 모습, 월경에 실패한 사람들이 끌려간 수용소의 참상 또한 다른 영화에서 본 기억이 없다.

'크로싱'이 보여주고 있는 비참한 북한의 현실에 대해 탈북자들은 "햇볕정책으로 가려졌던 북한의 진실을 보여준 것은 고맙지만 실상은 영화보다 훨씬 참혹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대해 제작진은 "관객의 충격을 고려해 많이 수위를 낮춘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현재 '크로싱'에 대한 대중의 낮은 관심은 북한의 인권과 굶주림에 대한 관심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해 '화려한 휴가'에 열광했던 정치권도 애써 이 영화를 외면하고 있다. 장년층에게 이 영화가 지겹게 받았던 반공교육을 연상시킨다면, 젊은 층에게는 '먼 나라 일'로 여겨지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크로싱'의 주인공을 차인표가 연기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수년간 세계를 누비며 기아 아동을 돕고 입양아 문제에 직접 몸을 던진 그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나선 5만톤의 옥수수를 북한이 수령 거부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평소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기사에 눈길이 간 건 아마도 '크로싱'을 보고 난지 며칠 안 됐기 때문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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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선수 출신인 북한의 탄광 노동자 김용수(차인표)는 아내, 아들을 둔 가장입니다. 어느날 김용수는 자꾸 쓰러지는 아내가 임신중인데 영양실조와 결핵이 겹쳐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중국을 통해 약을 구해 보려던 김용수는 결국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죠. 하지만 불법으로 일하던 벌목 공사장을 공안이 덮치면서 가족에게 돌아가는 길은 점점 멀어집니다.

사실 영화적으로만 볼 때 '크로싱'의 완성도는 아주 높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덜 영악한 영화라고 할까요, 얼마든지 더 슬프게 만들 수 있는 영화입니다. 좀 더 상업영화의 논리에 맞추려면, 이 영화는 지금보다 몇배 더 눈물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연이나 에피소드가 좀 더 정교하게 추가될 수 있었고, 미선의 운명도 어찌 보면 너무 밋밋하게 그려졌죠. 미선에게 생기는 일로 인해 준이에게 생기는 변화도 영화상으로는 표현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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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용수의 캐릭터 구축에는 상당히 공이 들어간 반면 준이는 그저 북한 사회의 참상을 알리는 카메라의 눈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런 부분이 영화의 결말에서 폭발력을 떨어뜨렸다는 '냉정한' 분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준이의 눈이 담담하게 북한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좀 더 관객이 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진은 이 영화가 어린이를 앞세운 최루성 상업영화로 보이는 걸 일부러 기피했던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입장이 있을 겁니다. 또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몇몇 부분, 종교적인 문제가 언급된다는 점은 역시 흥행용 상품으로서의 이 영화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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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진정성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만든 사람들이나 출연한 사람들이 이 영화의 대의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죠. 특히 차인표가 중국의 아들과 통화하는 장면, 눈물 콧물에 침까지 흐르는 이 장면을 보고 '저건 연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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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얼굴없는 가수'였던 브라운아이즈, 란(위 사진입니다), 지아 등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얼굴없는 밴드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캐나다 출신의 클라투(Klaatu)도 2년만에 정체가 드러났죠. 정말 드러나지 않는 얼굴없는 가수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조성모나 스카이(최진영)으로 대표되는 얼굴없는 가수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됐을까요. 놀랍게도 70년이 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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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가수'의 역사

얼굴없는 가수의 원조격인 조성모가 곧 가요계로 복귀한다. 입대 직전 만난 조성모는 "어차피 공익(근무요원)인데요"라며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만 2년간 사회와의 인연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운 듯 했다(그런데 벌써 2년이 지났다니!). 그런 조성모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제가 왜 얼굴없는 가수가 됐는지 아세요?"

<투 헤븐>이 한동안 인기를 얻을 때까지 조성모는 매스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방송사 PD의 말 한마디 때문. 당시 연예계의 실력자로 불렸던 이 PD는 조성모와 소속사 사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방송(TV)은 하지 마. 노래 실력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얼굴로 방송 나가면 음반이고 뭐고 다 망해"라고 진지하게 충고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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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속사는 이병헌 김하늘 정웅인 등이 등장했던 <투 헤븐>의 뮤직비디오를 앞세운 홍보전을 폈다는 얘기. 요즘은 '왕년의 꽃미남 가수'로 분류되는 조성모가 이런 수모(?)를 겪었다니 말이 안 되는 얘기인 듯 싶지만 본인이 털어놓은 얘기인 바에야 의심의 여지가 없다.

<투 헤븐>이 공전의 인기를 끈 덕분에 조성모는 '얼굴없는 가수' 전략의 성공사례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은 원조와 거리가 멀다. 진짜 원조를 찾자면 193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요 연구서인 장유정의 <오빠는 풍각쟁이야>에 따르면 지난 34년 경성에서는 '미스 코리아'라는 이름의 가수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가수는 앨범 재킷에까지 눈을 검게 가린 사진을 넣어야 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가수 활동이 용납되지 않는 신분의 인물이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조성모 이후 가장 큰 주목을 끈 얼굴없는 가수로는 SKY라는 이름으로 일세를 풍미한 최진영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이름과 얼굴을 감추고 <영원>이라는 노래를 히트시킬 무렵, 방송가에서는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모 방송사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새로 맡게 된 PD A씨는 SKY의 정체가 최진영이라는 사실을 듣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 흥분은 살짝 '뒷북'이었다. 일반인들은 몰랐지만 방송가에서는 처음부터 SKY가 최진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베일에 가려진 가수 SKY…"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지만 이를 몰랐던 A PD는 촬영팀을 앞세워 최진영이 있던 기획사 사무실을 덮쳤다.

갑자기 나타난 ENG 카메라에 당황한 기획사 측은 즉시 문을 걸어 잠궜다. '얼굴없는 가수 전략'의 핵심은 '언제 얼굴을 공개하느냐'하는 것. 아직 공개의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기획사 사장에게 있어 분위기를 모르고 특종을 요구하는 A PD는 훼방꾼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이날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다고 전해진다.

이들 얼굴없는 가수군단의 공통점은 '결국 언젠가는 스스로 정체를 밝힌다'는 것. 그러나 아직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팀도 있다. 지난 90년대 초, 헤비스라는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김원준의 히트곡 <모두 잠든 후에>를 코믹한 가사로 편곡한 <모두 출근 후에>, 봄여름가을겨울의 <어떤이의 꿈>을 패러디한 <어떤이의 땅> 등을 히트시키며 "도대체 누구냐"는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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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헤비스의 핵심 멤버가 <너에게 난, 나에게 넌>으로 롱런하고 있는 포크 그룹 나무자전거의 강인봉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다. 당시 제일기획 광고음악 프로듀서로 일하던 강인봉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을 모아 헤비스라는 얼굴없는 그룹을 조직, 패러디 음반을 발표한 것이다. 헤비스는 예상외의 반향을 얻으며 2집까지 발매하는 호황을 누렸다.

가요계에는 요즘도 얼굴없는 가수들이 나오고 있고, 이런 얼굴없는 가수들은 재활용 가수들(아, 걔가 그때 걔었어?)의 새로운 포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얼굴없는 가수라는 것이 전혀 특이하게 여겨지지 않는 상황이고 보면, 가요계는 뭔가 좀 더 새로운 홍보 기법을 개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끝)



사실 이런 가수까지 나왔었는데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걸 짜내라는 것도 무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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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솔로. 저는 브라운관을 수놓았던 그 헤아릴 수 없는 첩보원과 액션 영웅들 중에서도 이보다 더 멋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2:8의 정교한 가르마가 인상적인 이 멋장이 첩보원은 일리야 쿠리야킨이라는 소련 출신의 스파이와 한 조를 이뤄 많은 사건을 해결했습니다.<첩보원 0011>, The Man from U.N.C.L.E 이라는 외화에 대해 쓰기 전에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제가 쓸데 없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습성의 소유자라고는 하지만 이 드라마가 방송될 때에는 너무나 어렸습니다.그렇다 보니 나폴레옹 솔로와 일리야의 멋진 모습은 기억이 나지만, 구체적인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아무래도 드라마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주변에 대한 것으로 채워질 것 같습니다.

시리즈 오프닝입니다.




아다시피 나폴레옹이 속해 있는 기구 U.N.C.L.E은 the United Network Command for Law Enforcement의 약자로, THRUSH(Technological Hierarchy for the Removal of Undesirables and the Subjugation of Humanity)라는 악의 단체와 경쟁관계에 있습니다.그런데 이들에 대해 우선 가장 궁금한 것은 0011이라는 숫자에 대한 것입니다. 대체 왜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는 '첩보원 0011'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게 된 것일까요?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이 드라마에는 0011이라는 숫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의 구성에 이언 플레밍이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임스 본드의 동료들인 살인번호 소유자들은 001부터 009까지의 코드를 사용합니다. 0011이 등장했던 유일한 시리즈는 일본 만화영화인 <달려라 009>였습니다. 어린 시절, 어린이날이면 단골로 재탕해서 보여줬던 <달려라 009>의 극장판에서 0011은 쌍둥이 0010와 함께 001-009까지의 주인공들을 공격하던 전자 사이보그였습니다.  막강한 미녀 사이보그 0012와 함께 악의 편이었죠.(또 삼천포로 빠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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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0011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직역하면 '엉클에서 온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불렸을 이 시리즈를 놓고 일본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을 겁니다. '첩보물 하면 007'이던 시절, 처음부터 '나폴레옹 솔로'라고 해 봐야 통할 리가 없고, '엉클에서 온 사나이'라고 직역해 봐야 '삼촌에서 오긴 뭘 와?'라는 반응밖에 없었을테니, 뭔가 첩보 드라마의 냄새를 풍기게 하려면 역시 00넘버를 부여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럼 왜 하필 0011일까요? 글쎄요, 001에서 009까지는 이미 007시리즈에서 다 써 먹었고, 0010은 뭔가 이진수같고 보기에 나쁘니 모양새가 그럴듯한 0011이 된 게 아닐까...했는데 사실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고편 동영상을 보시죠.




자, 동영상을 보시면 본부 출입을 위해 가슴에 인식표를 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0011의 비밀이 있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 내용의 번역입니다.


<뉴욕의 유엔 본부 가까이의 빌딩가운데에 있다.외관은 낡았지만, 내부는 최신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멤버가 본부에 들어가려면 , 빌딩의 큰길에 접한 세탁소 지하의 비밀 출입구를 사용한다.안에 들어오면 우선 게이트의 여성 오퍼레이터로부터 역삼각형의 인식 플레이트를 받아, 가슴에 댄다.플레이트는 부문 마다 색이 달라 각 멤버의 인식 번호가 쓰여져 있다(솔로는 11, 이리야는 2).이 플레이트는, 출입마다 미량의 방사성 물질이 도포되어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미처리 플레이트를 댄 것만으로 침입하려고 하면 경보가 울린다. >

네, 이것이 0011의 정체였습니다. 이 작은 단서로부터 일본인들은 0011이라는 스파이의 번호를 만들어낸 거였군요. 이런 소심쟁이들같으니.

아무튼 이 인상적인 주인공 나폴레옹 솔로의 얼굴을 잘 보다 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꽤 있습니다. 물론 이 나폴레옹 솔로 시리즈가 무려 9편의 극장용 영화로 재편집되어 상영되기도 했지만(정말 이런 면은 007 못지 않습니다), 이 나폴레옹 솔로 역을 맡았던 로버트 본의 출연작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바로 <황야의 7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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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율 브리너, 제임스 코번, 스티브 매퀸, 찰스 브론슨이 나온 그 <황야의 7인> 에 이 사람이 나온단 말이야?"하고 하시는 분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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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도 또 어딘가에서 '한국인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배우 릭 윤...'어쩌고 하는 얘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얘기가 안 나올때가 됐는데 싶었지만 뭐든 한번 잘못 알려지면 끝이 없더군요.얼마전 2006년 개봉된 '강적'의 리뷰를 이쪽 글로 옮겨왔는데, 거기에 연결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작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사람은?


 영화 퀴즈. 한국인 중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누구일까?

온 세상이 월드컵 판(주=이 글이 처음 쓰여진게 2006년이라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인데 무슨 뜬금없는 질문인가 하실 분도 있겠지만 잠시 머리를 써 보시기 바란다. 물론 <다이 어나더 데이>의 릭 윤이나 윌 윤 리를 꼽았다면 실격이다. 그렇게 쉬운 문제면 내지도 않았다. 만약 이 문제에 오순택이라는 답을 댔다면 당신의 잡학도도 만만치 않다.
오순택은 지난 1974년 007 시리즈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제임스 본드를 돕는 홍콩의 영국 정보요원 입 경위 역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의 본드는 로저 무어였고, 악당 역할은 전문 드라큘라 배우로 유명한(이제는 '<반지의 제왕>의 사루만'이라는 쪽이 더 알기 쉬운) 크리스토퍼 리가 맡았다.

필자는 이번 주초 영화 <강적>의 시사회에서 깜짝 놀랐다. 악의 거두인 황회장 역으로 오씨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70세인 오씨는 지난 59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도미한 뒤 100편에 달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한국 영화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강적> 촬영장에서도 오씨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조민호 감독과 박중훈 정도였던 것 같다. 조민호 감독은 "첫 작품인 <정글주스>에 출연했던 재미 배우 김만(79년작 <전우가 남긴 한마디>로 올드 팬들에겐 친숙한 이름이다)씨의 소개로 오씨에게 출연을 제의했다"고 말했다. "노역 배우 풀이 제한된 한국 영화계의 테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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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화 <뮬란>에서 아버지 목소리를 맡았던 오씨는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금세 '아아'하고 알아볼 만한 얼굴.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에 야마모토 제독 역할로 출연한 일본계 배우 마코와 함께 할리우드에서는 대표적인 동양인 배우로 꼽힌다. TV에서도 <미녀삼총사> <에어울프> <맥가이버> 등 추억의 외화들에 골고루 등장했고, 필자에게는 지난 82년작인 TV 미니시리즈 <마르코 폴로>에서 쿠빌라이 칸에 대항하는 남송의 재상 양저 역을 맡은 그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재 서울예대 연극과 석좌교수로 재직중인 오씨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한국 영화의 제작 현장을 이해해야 할 것 같아 출연하게 됐다"며 "출연 조건이 '수업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막상 해 보니 생각같지 않더라"며 웃었다.

박중훈과 오순택, 한국이 낳은 할리우드 배우 두 명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 <강적>이 22일, 월드컵 열풍과 정면으로 대결에 나서지만 이를 홍보하는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도 오씨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영화계가 할리우드에서 41년간 현역 배우로 활동했던 그의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도움은 차치하고라도, 모처럼 고국 영화에 출연한 노배우에 대한 예우가 이 정도라는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산 경험이야말로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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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택은 자신을 가리켜 '할리우드에 진출한 두번째 한국계 배우'라고 못박아 말합니다. 첫번째 배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필립 안이라는 것이죠. 필립 안은 <킬 빌>에서 빌 역할을 맡아 요즘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데이비드 캐러딘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시리즈 <쿵후>에서 캐러딘이 연기한 케인의 사부 역을 포함해 거의 200여편의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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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택의 출연작 중에는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파이널 카운트다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미 항공모함 니미츠호가 이상기류에 휘말려 진주만 기습 직전의 북태평양으로 시간이동을 하는 내용이었죠. 여기서 오씨는 니미츠호 함재기에 맞서다 포로가 되는 일본 제로전투기 조종사 역으로 출연합니다. 오씨는 "한국 사람 역할로는 출연할 만한 작품이 없었다. 이제 우리 나라도 잘 살게 됐으니 괜찮은 역할도 생길 텐데..."라며 허허 웃더군요.

오씨는 자신의 대표작을 <미저리>의 캐시 베이츠와 공연한 독립 영화 <Home of our own>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을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라고 부릅니다. 이 영화는 홍콩-태국 등 동남아를 무대로 한 영화라서 친숙한 배경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이 영화에 나오는 악당들의 근거지는 태국의 유명한 휴양지 푸껫의 팡아만에 있는 실제 지형으로, 지금은 '제임스 본드 섬'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경력을 가진 배우의 한국 영화 데뷔가 너무 조용한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참 아쉬웠습니다.  한동안 잊혀졌던 정창화 감독에 대한 재발견도 이뤄지는 시대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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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 김주성 하석주 고정운 홍명보 등 왕년의 스타들이 보입니다.
지난번에 이어 한국축구사 요약 족보 2탄. 좀 길어도 그냥 한방에 끝내기로 했습니다.



한국축구 100년사 (2)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하자 축구협회는 또다시 대표팀 이원화론을 들고나왔다. 이번에는 화랑과 충무.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이디어는 청룡-백호와 똑같았다. 아무튼 이 해 화랑팀의 일원으로 제6회 박스컵에 출전한 차범근은 첫 경기인 말레이시아전에서 1 대 4로 뒤지던 후반 38분부터 순식간에 3골을 넣으며 4 대 4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이날 이후 ‘한국 축구=차범근’이라는 등식은 그가 은퇴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은 남북 축구가 역사적인 첫 만남을 기록한 해였다. 청소년 대표팀은 1976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북한과 만나 0 대 1로 진 적이 있지만 성인 대표팀의 만남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 그동안 북한을 두려워해 맞상대를 꺼렸던 한국은 1978년 메르데카컵과 박스컵의 우승으로 자신감을 갖고 북한과 격돌했다.

12월 20일 방콕 국립경기장. 결승에서 만난 양팀은 연장전까지 격돌했으나 상대를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 골은 터지지 않았고 결과는 공동우승이었다. 경기 후 열린 시상식에서 “기진맥진했고, 비기기를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는 남한팀 주장 김호곤은 북한팀 주장 김종민에게 “우리, 손 잡읍시다”라고 제안하며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사진기자들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두 선수가 어깨동무를 한 이 사진은 지금껏 남북화해의 상징처럼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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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대결 당시 김호곤의 축구화.

차범근은 아시안게임 직후 서독 분데스리가 테스트를 받았고 이듬해 6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유럽 무대 진출의 막을 열었다. 1980년에는 허정무도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했고 이후 김진국 박상인 박종원 등이 앞다퉈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이 해 12월에는 국내에서도 국가대표 이영무를 주축으로 한 1호 프로구단 할렐루야가 창단, 프로화를 재촉했다.

1981년 5공화국의 스포츠 드라이브는 축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결정됐고 프로축구 수퍼리그가 개막됐다. 한편으론 멕시코 세계 청소년대회 출전권을 따냈던 북한이 아시안게임에서 주심 폭행사건으로 2년간 각종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당하면서 한국은 대타로 멕시코행 티켓을 따내는 행운을 차지했다.

박종환 감독은 1983년 대회를 앞두고 개최지가 고지대라는 점을 감안, 선수들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우는 등 가혹할 정도의 체력훈련으로 팀워크를 다졌다. 마침내 그 해 6월. 한국은 스코틀랜드에 첫 경기를 0 대 2로 내주며 한숨을 자아냈지만 홈팀 멕시코와 호주를 각각 2 대 1로 연파하며 예선을 통과, 8강에 진출했다.

김종부 신연호 이문영을 주축으로 한 한국이 6월 11일 우루과이를 연장전 끝에 2 대 1로 꺾고 4강에 오르자 전국은 축구 붐으로 불타올랐고 외신은 연일 한국의 선전에 찬사를 날렸다. ‘붉은 악마’라는 호칭은 바로 이때 등장했다. 비록 6월 15일 브라질에 1 대 2로 패해 결승 진출은 좌절됐지만 첫 ‘세계 4강 진출’에 쏟아지는 갈채는 끊일 줄을 몰랐다.

박종환 감독은 일약 국민적인 스타가 됐고 축구협회는 이 선수들을 주축으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비한다는 뜻으로 박종환 감독에게 ‘88팀’을 맡겨 육성하게 했다. 이 88팀을 모체로 해 ‘올림픽 대표팀’이 마련됐고 성인 대표팀인 ‘월드컵 대표팀’은 문정식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사실 ‘올림픽 축구 출전 선수는 23세 이하여야 한다’는 연령제한 규정이 나온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부터의 일이었으므로 굳이 올림픽 대표팀의 나이가 어릴 필요는 없었다.

결국 올림픽 대표팀은 1984년 LA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월드컵 대표팀 역시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예선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감독직을 사퇴한 문정식 감독 대신 김정남 감독을 내세워 대표팀을 일원화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 나선 한국은 승승장구 끝에 최종 예선에서 일본을 2 대 1, 1 대 0으로 연파하고 1954년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의 비원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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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독일에서 뛰고 있던 차범근까지 가세한 한국 대표팀의 기세는 충천해 있었으나 국제대회에서 매번 한국을 괴롭혔던 대진의 불운은 여전했다. 첫 상대는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0 대 3으로 뒤졌던 한국은 후반 28분 박창선의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사상 첫 득점을 기록했다. 이어 한국은 불가리아전에서 후반 26분 김종부의 동점골로 1 대 1 무승부를 기록, 첫 승점을 올렸다. 세계적인 강호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도 3 대 2까지 추격해 접전을 벌인 것은 그리 실망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1무2패, 예선 탈락이었지만 국민은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월드컵 대표팀 멤버들은 홈에서 열린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사실상 첫 월드컵 진출’이라는 점을 감안해 관대한 눈으로 바라보던 국민은 이회택 감독이 이끈 1990년 이탈리아 대회의 3전 전패, 김호 사단이 출전한 1994년 미국 대회의 2무1패,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해임된 1998년 프랑스 대회의 1무2패 등 거듭되는 월드컵 본선의 실패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미 아시아 예선 통과는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1990년대 한국 축구의 최대 과제는 ‘월드컵 16강 진출’이었지만, 이 목표를 이루기까지는 10년이 넘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3년 정몽준 의원이 47대 축구협회장에 당선되면서 한국 축구는 또 하나의 전기를 맞는다. 바로 2002년 월드컵 개최 추진 발표. 10월 카타르에서 열린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한국이 대회 마지막 날 일본을 득실차로 제치고 출전권을 따내는 ‘도하의 기적’(일본에서는 ‘도하의 참변’)을 이룬 직후, 정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월드컵 유치전 참가를 선언했다. 이미 일본은 5년 전인 1988년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천명해 놓은 상태. 결국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 끝에 1996년 5월 31일, 공동개최에 사인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단독개최를 천명했던 일본에 비하면 공동개최는 뒤늦게 뛰어든 한국의 승리인 셈이었다.

이제 문제는 한국 팀의 성적. 허정무 사단이 1998년 아시안게임 부진(8강)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탈락의 고배를 마시자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성론이 축구계를 강타했다. 2002년에도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총체적 위기감으로 각성한 축구협회는 2000년 11월 14일, 1998년 월드컵 당시 한국에 0 대 5의 치욕을 안긴 네덜란드 감독 거스 히딩크를 사령탑으로 초빙한다.

물론 히딩크도 처음부터 신화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히딩크 사단은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과 2002년 초 유럽 원정에서 각각 프랑스와 체코에 0 대 5로 무너지는 등 신통찮은 모습을 보이며 극렬한 비난 여론에 부딪혔다. 하지만 히딩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월드컵 이전의 모든 경기는 연습경기”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했다.

마침내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고 6월 4일, 한국은 부산에서 강호 폴란드를 2 대 0으로 가볍게 누르며 월드컵 진출사에 마침내 첫승을 신고했다. 이때 이미 대다수 국민은 ‘목표 달성’의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2002년의 기적은 이제 시작이었다. 한국은 6월 10일 미국과 1 대 1로 비긴 뒤 6월 14일 포르투갈을 1 대 0으로 누르고 사상 첫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온 나라가 흥분의 붉은 물결로 뒤덮였지만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히딩크 감독은 6월 18일 이탈리아와 16강전을 앞두고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I’m still hungry)”는 명언을 남기며 선수들의 분발을 독려했다. 결과는 연장전 끝에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뜨린 한국의 2 대 1 승리. 6월 22일 한국은 스페인마저 승부차기로 꺾고 아시아 국가 최초로 세계 4강에 올랐다. 1966년 북한이 영국 월드컵에서 이뤄낸 8강 신화를 넘어선 것이다.

비록 4강전에서 독일에 0 대 1로 패했고 3·4위전에서도 터키에 2 대 3으로 져 종합성적은 4위에 그쳤지만 흥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히딩크는 한국인의 영웅이 됐다. 대표팀 서포터인 ‘붉은 악마’와 100만 인파를 동원한 거리 응원의 장관도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졌다.

3년 뒤인 2005년, 한국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 6회 연속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뤘으나 국민의 시선은 냉담했다. 이미 신화가 된 ‘불패의 명장’ 히딩크의 그림자는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게만 보였던 두 후임자, 코엘류와 본프레레를 낙마시켰다. 과연 2006년, 다시 한번 세계 무대에 나서는 한국 축구는 국민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끝)



그 뒤의 일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아드보카트는 1승을 거뒀지만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한국은 핌 베어벡을 사령탑으로 내세웠지만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과 아시안컵에서 모두 4강에 그치며 국민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허정무 사단은 2010년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천적 이란-사우디아라비아와 두 장의 티켓을 다퉈야하는 위기를 맞았죠. 과연 허감독의 '옛날축구'가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월드컵 본선 연속진출 회수를 6에서 마감해버릴까요?





1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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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은 변명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산'의 방송이 끝난 주, 이병훈 감독님을 금주의 인물로 소개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축하 인사도 드릴 겸,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미 '이산'팀과 함께 종영 자축 여행을 떠나신 뒤더군요. 어쩔수 없이, 새로운 장을 보지 못하고 그냥 냉장고(?)를 열어서 쓴 글입니다. 물론 박은혜씨가 약간의 도움을 줬죠(그 얘기는 맨 마지막에. 감안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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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돈·음식 등 일상사로 승부
‘이산’ 종영한 정통 사극 연출가 이병훈
송원섭 기자
| 제67호 | 20080622 입력  

최근 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드라마 ‘이산’의 방송을 마친 이병훈 PD의 전설 중에는 그의 놀라운 설득력과 관련된 것이 많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1990년대까지 미스코리아 대회는 반드시 MBC에서 중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각종 여성단체로부터 왜 공영방송에서 그런 외모지상주의를 전파하는 행사를 중계하느냐는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여성단체 대표들은 사회적 지위가 남다른 사람이 많아 MBC에서도 그런 항의를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 구사대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병훈 당시 MBC 드라마국 PD였다는 것이다. 사장실로 호출받아 올라간 이 PD가 중재에 나서면 어느새 분위기는 봄눈 녹듯 풀어지고, 웃음이 넘치는 자리가 되면서 항의는 유야무야되곤 했다는 얘기다.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이라면 이 일화가 결코 전설만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사실 그의 전설은 현재진행형이다. 44년생이니 올해 64세. 현역 드라마 PD 가운데 최고참이지만 촬영장에서도 젊은 연기자들과 수시로 대화하고, 돌아서선 휴대전화 문자를 주고받는 참신한 감각을 유지한다. ‘대장금’ 때만 해도 현장 스태프는 “산 위에서 촬영할 때도 감독님(이병훈 PD)보다 앞서 올라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며 그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스태프·출연진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호걸형 PD가 아니면서도(그는 30년째 금주 중이다), 현장을 휘어잡는 힘이 정평 나 있다.

많은 배우가 “옛 말투 대사가 어려워서 사극을 못한다”고 할 때 과감하게 현대어 대사를 도입해 사극의 새 바람을 일으켰고, 그런 가운데서도 발성이 만족스럽지 않은 배우는 주인공이라도 일대일 과외를 하는 열정을 보여 왔다. ‘이산’의 주인공 이서진도 이 ‘과외’를 피해 가지 못했다.

지금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사극의 대가지만 그라고 해서 MBC 입사 이후 사극만 연출해 온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청소년 드라마 ‘제3교실’이나 ‘수사반장’의 연출자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82년 이정길이 어사, 임현식이 시종 갑봉이, 무술인 안호해가 호위무사로 나온 ‘암행어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어 ‘조선왕조 500년’은 그에게 ‘사극의 대가’라는 칭호를 줬다. 특히 ‘임진왜란’ 편에서는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당시 코믹 연기자로 인기 높던 김무생을 이순신 역에 기용해 큰 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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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 역에 정진이라는 새 인물이 돌풍을 일으켰던 바로 그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90년대, 그가 드라마국장일 때 MBC는 ‘드라마 왕국’이란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이 시기 MBC에서는 ‘질투’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마지막 승부’ 등 시대를 리드하는 트렌디 드라마가 쏟아져 나왔다. 97년에서야 일일연속극 ‘세 번째 남자’로 연출에 복귀한 그는 98년부터 ‘대왕의 길’ ‘허준’ ‘상도’ ‘대장금’ ‘서동요’, 그리고 ‘이산’까지 여섯 편의 대작 사극을 연출했다.

왜 사람들은 그의 사극에 열광했을까. ‘허준’을 연출하던 당시 이 PD는 왜 허준을 주인공으로 했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관심 있는 건 누가 왕이 됐느냐 말았느냐 하는 게 아니라 건강·돈·음식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과연 그는 의원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허준’을 히트시킨 뒤 거상 임상옥을 주역으로 한 ‘상도’를, 또 수라간 음식 이야기인 ‘대장금’을 만들었다.

그리고 최인호 원작 소설 제목을 그대로 쓴 ‘상도’ 외에는 ‘허준’ 이후 네 편의 작품 제목에 모두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이건 ‘이병훈 사극’의 중심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재갑 전 MBC 드라마국장은 “영웅 아닌 인간의 내면을 밀도 있게 보여 주는 데서 감히 누가 따를 수 없는 깊이가 있다”고 평했다. 그의 주인공들이 온갖 고초를 이겨내며 성공에 이르는 이야기들은 보는 이에게 롤 플레잉 게임을 연상시키는 스릴을 선사했다.

이병훈 PD는 ‘이산’의 종영과 함께 “딱 한 작품만 더 하고 이제 연출은 그만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지일 전 MBC 드라마국장은 “아마 실록을 뒤져 가며 작품을 만드는 정통 사극 연출가로는 그가 마지막 인물이 되지 않을까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특히 ‘사극 1인자’ 자리를 다퉜던 김재형 PD가 최근 SBS-TV ‘왕과 나’를 연출하다가 건강 악화로 중단한 터라 이 PD의 은퇴설이 더욱 안타깝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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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을 방송계에서는 흔히 '왕PD'라는 칭호로 부르곤 합니다. PD중의 왕이기도 하고, 수많은 사극을 통해 왕 역할의 배우들을 수도 없이 다뤘다는 얘기기도 하죠.

어린시절 이분의 사극인 '암행어사'나 '조선왕조 500년'을 보고 자란 세대에겐 이분의 명성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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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는 암행어사 이정길. 그리고 오른쪽의 '갑봉이' 임현식은 이후 이병훈 감독의 사극에 빼놓지 않고 출연하는 핵심 인물로 성장합니다. 뭐 이때부터 아무 재료 없이 몸만 있어도 시청자들을 웃음 속으로 몰아넣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죠.

하지만, 정작 어렸을 때 저를 감동시킨 것은 왼쪽에 서 있는 호위무사인 상도 안호해의 포스였습니다. 정규 연기자가 아니어서 대사는 한회에 한두마디 정도였지만, 오히려 그런 말없음이 믿음직스럽게 여겨졌죠. 특히 입을 열어 어사에게 말을 건넬 때면 '나이리(이상하게도 이 분은 '나으리'라는 말을 그렇게 발음했습니다)!'라는 남자다운 저음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분은 지금 뭘 하시는지 참 궁금합니다.

이 '암행어사'의 인기를 잡기 위해 KBS 2TV에서는 백일섭 주연의 '포도대장'이라는 드라마까지 만들었지만 원조 '암행어사'를 잡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바람에 당시 사극에선 칼잡이들이 수시로 등장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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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국장 역임으로 현역을 떠나 있던 이 분이 사극연출가로 다시 주목받게 된 건 아무래도 '허준'의 공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허준'에서 함께 작업을 했던 최완규 작가의 힘을 무시할 수 없죠.

두 사람의 공로는 한국 사극에 '경합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든 걸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자, '허준', '대장금', '이산', '주몽'의 공통점은 뭘까요. 바로 '경합'입니다. 어떤 단체든 왕좌든 뭔가의 후계권을 놓고 주인공들이 대결을 펼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주변 인물들이 팀을 이뤄 격돌합니다.

게다가 이 '경합'이란 실력본위의 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과 집안을 등에 진 경쟁자와 맞선 주인공이 오로지 실력 하나로 영웅이 되는 것, 시청자들에겐 이보다 재미있는게 없겠죠.

이런 일련의 정형화된 구도를 처음 설정한 것이 바로 이병훈-최완규 콤비의 '허준'입니다. '허준'이 본격적인 인기를 얻는데에도 전광렬과 김병세가 벌인 닭에다 침놓기 대결이 지대한 공로를 했죠. (아 물론 그 말고도 수많은 경쟁이 펼쳐졌죠.^^) 그 뒤로 이 두 분이 관계한 수많은 드라마들이 '경합'으로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사극은 아니지만 이 경합 구도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드라마 '식객'의 크레딧 자막에도 '크리에이터 최완규'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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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병훈 감독님을 볼때마다 느끼는 건 참 젊다는 겁니다. 뭣보다 마음이 젊으시죠.우연히 이 글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이산' 출연을 마친 박은혜를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물었습니다.

나: 감독님이 문자를 자주 보내신다면서요.
박: 네. 전화보다 문자를 더 자주 하세요.

나: 어떤 때 보내시던가요?
박: 야단칠 때, 칭찬할 때, 말로 할 걸 거의 문자로 하세요. 그리고 굉장히 특이해요.

나: 어떻게요?
박: 문자 자판도 그 연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치시구요, 10대처럼 보내요.

...

나: 10대 처럼이라니?
박: 구어체 말투에 이모티콘까지 엄청나게 섞어서 보내세요. 처음 받아보는 사람은 감독님이 보낸거라고 믿지 못할 정도에요.




흐음. 상상이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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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6월, 한국의 6회 연속 본선 진출이 결정된 쿠웨이트 국립경기장에서 창밖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경기전만 해도 쿠웨이트 3(손가락 세개), 한국 0이라고 재롱을 부리던 녀석들이 쿠웨이트가 박살이 났는데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BE THE REDS 티셔츠를 흔들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산만하고 활기차보이는 녀석들이더군요.

한때는 야구, 축구, 농구를 취재했습니다. 지나간 사진들을 보다 보면 그때의 잔영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 걸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그때 썼던 글들 중에도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해 가을 한 주간지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나름대로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총정리하고 싶은 분들은 한번 읽어보세요.





<한국 축구 100년사 (1)>


축구인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축구 백년'을 거론해왔다. 과연 한국 축구의 시원은 어디일까. 삼국시대 화랑들이 했다는 축국(蹴鞠) 놀이까지 거슬리 올라간다면 1500년은 쉽게 넘어서겠지만, 근대 축구의 한국 상륙은 1882년 6월 인천 제물포에 기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선원들이 보여준 공차기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이후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학교를 통해 축구는 빠르게 전파됐고, 1900년 경에는 이미 여러 동호회가 축구 경기를 벌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부에서는 1905년, 배재학당 프랑스어 교사인 마텔이 축구팀을 운영한 것이 진정한 한국 축구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올해가 진정한 '한국축구 100년의 해'가 되는 셈이다.

1921년, 조선-동아일보의 노력으로 결성된 조선체육회는 2월11일부터 3일간 전조선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첫날 중학부의 3경기가 모두 판정 불복으로 인한 기권으로 끝나는 등 어수선하고 미숙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룰과 심판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이렇게 시작된 전조선 축구대회는 22년 제 2,3회가 연이어 열리는 성황으로 이어진다.

33년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조직됐고 이해 처음 열린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의 '경-평 축구'는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특히 경성축구단의 김용식은 마라톤의 손기정과 함께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는 등 조선 최고의 운동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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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용식 옹.


조선 각지의 팀들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서 39~40년에는 함흥축구단, 41년 평양일곡, 42년 평양병우 팀이 연속으로 우승해 식민 치하에서도 축구만큼은 한국이 일본을 압도한다는 자긍심을 국민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해방후의 혼란 속에서도 축구의 열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45년 12월 곧바로 조선축구협회가 재결성(48년 대한축구협회로 개칭)됐고 46년 최후의 경-평전이 열리는가 하면 48년에는 FIFA 가입과 런던 올림픽 참가가 이뤄졌다.

런던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48년 6월21일 서울을 떠난 16명의 선수들은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선편으로 홍콩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항공편으로 런던으로 향했다. 홍콩 체류중인 7월 6일 홍콩의 한 팀과 치른 경기(5대1 승)가 한국 대표팀의 첫 공식 국제경기였다. 한국은 8월 2일 멕시코와의 서전을 5대3으로 이겼으나 스웨덴에게 0대12로 대패, 세계 수준과의 격차를 실감했다.

한국전쟁중인 51년에도 김화집이 첫 FIFA 공식 심판으로 인정받는 등 국제적 역량을 키워가던 한국 축구는 54년 3월, 스위스에서 6월 개막되는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일본과 마지막 경합을 벌이게 됐다. 이 대결은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져야 마땅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 일본 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과 경기를 갖는 것 자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 대표팀의 이유형 감독은 이대통령 앞에서 "지면 귀국길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맹세를 하고 장도에 올랐다. 3월 7일. 정부수립 후 첫 한-일전에서 한국은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뚫고 5대1의 대승을 거뒀다. 14일 벌어진 2차전은 2대2 무승부로 끝나 한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이뤄졌다.

본선 첫 경기는 6월 17일, 불행하게도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가 상대였다. 48시간을 날아온 한국 선수들은 체력과 기술의 심각한 열세로 0대9로 대패했다. 2차전인 터키전에서도 0대7. 다시 한번 '세계의 쓴 맛'을 본 한국은 56년 홍콩에서 열린 제 1회 아시안컵, 58년 도쿄 아시안게임을 제패하며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자리잡아갔다.

화려한 50년대에 비해 60년대는 한국 축구의 수난기였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한국은 66년 영국 월드컵을 앞두고 예선 출전을 포기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유는 단 하나, 아시아 축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북한과의 대결에서 패한다면 국가적인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한국의 입장을 합리화해주기라도 하듯 박두익이 이끈 북한은 이 대회 본선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를 경악케 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정부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결국 67년 '북한을 꺾고 아시아 최강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유명한 양지팀을 창단한다. 이회택 박이천 정병탁 등 당시 최고의 선수들을 모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양지팀으로 차출, 군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에 칙사 대접을 하며 팀을 관리한 것이다. 당시 보기 힘들었던 잔디 연습구장과 두둑한 용돈으로 선수단의 기세는 올랐지만, 효과적인 훈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결국 71년 김형욱 부장의 경질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양지팀은 해체된다.

70년 멕시코 월드컵 대회 예선에서도 또다시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대표팀을 청룡(1진)과 백호(2진)라는 이름으로 2원화했다. 명분은 각종 국제대회 참가 선수의 폭을 늘려 선수들이 선수들이 많은 경험을 쌓게 하자는 것이었으나, 1진과 2진으로 나눈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국 축구협회는 71년 뮌헨 올림픽 예선 탈락으로 다시 청룡과 백호를 해체하고 23세 이하의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 대표팀을 개편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경신고 3학년이던 한국 축구의 기린아 차범근이 성인 무대에 등장한다. 71년은 세계 각국의 유명 축구팀을 초청해 벌이는 박대통령컵 축구대회(약칭 박스컵)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TO BE CONTINUED>



2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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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교수대로 가는 해적 용의자들의 긴 줄이 보입니다. 그중에는 올가미에 아예 키가 닿지 않는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 정도 연령의 어린이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신비로운 우연의 손길이 닥치든, 주인공들이 필사적인 노력을 해서든 어린이는 구해 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본산 공포영화 '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고어 버빈스키는 그따위 오랜 관습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애라고 봐주는게 어디 있어! 라는 초강경의 입장입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할 수 있다'는, 소름끼치는 임전 태세를 보여주고 시작한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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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려 왔던 시대의 괴작, '캐리비안의 해적 3 -세상의 끝에서'가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특이한 기록 하나를 세웠죠. 바로 시사회 없이 극장 개봉을 해버린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개봉되는 영화들 가운데 언론(은 물론이고 배급 창구를 열어줄 극장주들을 위한) 시사회를 갖지 않고 바로 스크린에 오를 수 있는 영화는 1년에 한편 나오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죠. 극장주들에게든, 언론에게든 마찬가집니다. 극장들에게는 '우리 이번에 캐리비안3 갖고 왔는데 스크린 좀 내 주지? 영화를 먼저 보자고? 그럼 안 걸어도 좋고', 미디어에게는 '기사? 안 써도 돼. 어차피 사람들 다 보러 오게 돼 있어'라는 식의 자세인 겁니다. 물론 직접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자신있는 영화가 대체 몇이나 있겠습니까.

사실 '캐리비안...' 시리즈는 정말 웃기는 작품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평론가들이 싫어하는 히트작은 있어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짜임새가 엉망인 영화가 히트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짜임새는 없는데도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정말 드물죠.

이런 오만방자한 행태 때문에, 영화가 엄청난 대박을 내거나 망하기 전에는 미디어를 통해 기사가 나오기 쉽지 않겠지만, 아무튼 '캐리비안의 해적 3'는 전작들 못잖게 재미있는 영화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돈 쳐 들이고 재미가 없을 수가 있냐! 라고 말하시는 분들, 그런 영화도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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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한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단, 이 영화는 1편과 2편을 보신 분들이 보셔야 합니다. 3편으로 처음 이 시리즈에 뛰어드신 분들은 지독하게 불친절한 - 지나간 시절의 요약 따위는 기대하지 마십쇼 - 대접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잭 스패로우(조니 뎁)를 되살리는 데 의기투합한 바르보사(제프리 러시), 엘리자베스(키라 나이틀리), 그리고 티아 달마(나오미 해리스)는 배와 선원을 구하기 위해 싱가포르의 대해적 사오펭(주윤발)을 찾아갑니다. 한바탕 예의 엎치락 뒤치락을 거친 뒤, 이들은 배를 타고 이 세상의 끝의 바깥 세상에서 잭을 구해 이승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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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결코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잭을 구해내지 못한다면 영화 3편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고... 또 아무튼 영화를 보시면 압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현존하는 해적의 영주(Lord) 9명을 모아 문어대가리 해적 데비 존스(빌 나이)와 악당 베켓(톰 홀랜더)의 연합에 맞서 싸우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이 시리즈 특유의 배신과 음모가 여러 차례 스치고 지나갑니다. 물론 대부분은 음모라고 하기에도 짜증스러울 정도로 유치한 수준입니다.

1편과 2편을 보신 분이라면 잘 아실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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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어린이들의 전쟁놀이 게임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른들이라면 무슨 게임을 하건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겠지만, 어린이들의 게임은 순식간에 룰이 바뀌고, 상황에 따라 계속 새로운 규정이 등장합니다.

빨간 비행기는 노란 탱크와 싸우면 이기지만 노란 탱크 중에서도 꼬리에 미사일이 달린 탱크는 비행기에게 이기고, 비행기 중에서도 헬리콥터는 모든 탱크에게 이길 수 있다는 식으로, 새로 등장하는 장난감의 종류에 따라 새로운 규칙이 아주 당연한 듯 인정됩니다.

'캐리비안...'의 우주도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긴 1편과 2편에 걸쳐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아홉명의 해적 영주들이 갑자기 등장하고, 데비 존스가 몰고 다니는 플라잉 더치맨의 선장이 바뀌는 규칙(매우 중요합니다)도 어느 한 순간 등장해버립니다.

세상의 끝에서 죽은 사람을 데려오는데 어떤 사람은 거기까지 가서 데려와야 하고(예를 들면 잭 스패로우) 어떤 사람은 말만 하면 다시 살려낼 수 있는(예를 들면 바르보사) 지도 순식간에 그냥 뚝딱 설명 한마디로 정해집니다. 굳이 말하자면 드래곤볼로 살려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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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 3편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은 1편과 2편의 힘이 매우 큽니다.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친숙할 대로 친숙해진 주인공들의 운명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죠. 즉 3편은 그 자체로서는 큰 힘을 갖고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동안 흐트려 놓았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으느라 안 그래도 엉망인 플롯은 더욱 허점 투성이가 되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걸 따지는 건 정말 예의없는 행동이 되겠죠. 애당초 한번이라도 말이 되는 스토리였던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3편이 어느 정도 완결편의 흉내를 내느라, 그동안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잭 스패로우의 등장 신을 엄청나게 줄여버렸다는 점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이 영화가 아무리 엉망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더라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조니 뎁이라는 천재 배우가 만들어낸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의 힘을 빼놓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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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쨌든 3탄에서는 이야기를 일단락지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잭 스패로우까지도 평소의 말도 안 되는 행동양식을 버리고 비교적 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건 누가 봐도 상당히 재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입니다.

대신 주변 인물들의 재롱은 많이 늘어났습니다. 제프리 러시는 1편에서의 악의 화신에서 벗어나 상당히 정감있고 노련한데다 어느 정도 의리까지 있는 해적 영웅으로 거듭납니다. 티아 달마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 됩니다. (물론 그 역할이 영화의 줄거리에 무슨 영향을 미치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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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 달마의 멀쩡한; 모습입니다.)

유령상태(?)의 해적인 핀텔(리 아렌버그)과 라게티(매켄지 크룩) 콤비의 유머도 일취월장했고, 여기에 배역명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영국 수병까지 제2의 코믹 콤비로 빛을 발합니다. 눈 밝은 분들은 이 두 사람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세요.

무려 2시간 40분을 뒤척댄 끝에 영화는 3부작에 걸쳐 펼쳐낸 대 로망의 끝을 보여줍니다. 물론 아쉽습니다. 과연 4편이 나올까요? 현재로서는 나올 가능성이 매우 짙습니다. 각본가 테리 로시오는 "4편에 대해 결정된 것은 없지만 조니 뎁은 '대본만 좋다면 또 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고, 뎁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제작자들이야 불감증이언만 고소영이겠지요.

주인공들 중 하나인 키라 나이틀리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17세부터 21세까지 이 영화에 매달려 있었다. 이젠 다른 영화를 하고 싶다"며 속편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아니, 솔직히 말해 나이틀리가 나오고 안 나오고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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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완이 없는 '캐리비안 4'는 얼마든지 구상할 수 있지만, 잭 스패로우가 없는 '캐리비안' 시리즈를 과연 '캐리비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는 얘기죠. 아마도 나온다면, 4편은 잭 스패로우의 또 다른 모험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키라 나이틀리와 올란도 블룸은 얼른 다른 영화를 알아보라고 하고요.

아, 물론 4편이 나온다면 또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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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고어 버빈스키가 될지, 다른 감독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섣불리 '말이 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헛된 노력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장담을 받아야 할 겁니다. 말이 되는 잭 스패로우의 모험담은 논리정연한 오스틴 파워스나 마찬가지일테니까요.




p.s. 3편의 보너스 인물은 잭 스패로우의 아버지 티그 선장입니다. 배우는 너무도 당연히, 조니 뎁이 '잭 스패로우의 모델은 이 사람'이라고 일찌감치 밝혔던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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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티그 선장의 극중 모습은 없군요. ^^;

왕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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