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앤 더 시티'의 두번째 극장판이 27일 미국에서 개봉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예정대로 6월10일 개봉이라고 합니다. 월드컵의 열기로 극장 비수기겠지만 어차피 '섹스 앤 더 시티'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은 축구를 발로 하는지 손으로 하는지 별 관심이 없는 분들일테니 과감하게 정면 승부를 해 보겠다는 것이죠. (눈치없이 한국 경기 시간에 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남편이나 남자친구를 들볶는 분들은 안 계시겠죠?^) 어쨌든 잠시 여기서 영화를 미리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냥 자막이 있는 고국에서 보기로 맘먹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논란은 여전합니다. 이 영화가 표방했던 '매력있고 유능한 뉴욕 여성들'을 연기하기에 이 주연배우들이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주장에서부터, 과연 이런 영화가 존재해야 하느냐는 해묵은 주장이 되살아나는 등 극장판 2편의 개봉에 맞춰 '섹스 앤 더 시티'가 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이제는 '진부해진' 영화가 미국 예매 시장에서 디즈니의 야심작 '프린스 오브 페르시아'를 압도하고 있다는 건 이 시리즈가 가진 위력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득 2년 전, 첫번째 극장판이 개봉할 때 썼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네. 자백하자면 재활용입니다). 2년 전과는 다른 분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궁금합니다.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제목에 대한 답으로 '캐리가 너무 못생겨서'라고 댓글을 다시는 분은 3대가 고자가 된다고 합니다. (옛날 집에선 이 댓글만 200개 정도 달렸습니다.)
참 재미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2010년 5월말 현재 imdb.com에 올라온 '섹스 앤 더 시티' 1편의 평점은 5.4입니다. 그런데 그 내막을 보니 참 심각한 차이가 있더군요. imdb에 이 영화의 평점을 매긴 사람들 중 남자가 23786명, 여자가 16579명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평균 4.9점을, 여자들은 7.0라는 꽤 높은 평점을 매겼군요. 그래서 평균이 5.4입니다.
자, 남자들과 여자들의 평점에 차이가 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상식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투표 자체를 남자들이 훨씬 더 많이 했다는 점이 매우 희극적입니다. 남자가 1.5배가 넘는군요. 물론 imdb 이용자 중엔 남자가 더 많겠지만, 이 정도로 남자가 많다는 건 상당한 수의 남자들이 영화는 아예 보지도 않고 낮은 점수를 매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지지를 보이는 사람들이 18-29세 연령층이로군요. 즉,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흥미롭게도 같은 여자지만 18세 이하 계층은 평점이 5.8밖에 되지 않네요. 남자들은 전체 연령층에서 별 차이가 없지만 연령의 상승과 함께 조금씩 평점이 높아지는 반면, 여자들은 오히려 고령으로 갈수록(정작 '섹스 앤 더 시티' 주인공들의 연령층이 될수록?) 지지가 조금씩 낮아집니다.
네. 이 표로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실은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섹스 앤 더 시티'를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는 남자들이 널려 있다는 겁니다. 아마도 세계 어디를 가나 이 드라마가 방송되는 나라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되지만, 대체 왜 그런가에 대해서도 상호간의 이해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제목부터 그렇지만 이 글은 이 드라마(혹은 영화)에 대한 남녀간의 인식 차이에 대한 글입니다. 그리고 아주 당연히, 제 자신의 경험과 시각에 의한 글입니다. 그러니 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비판의 근거는 이 글 안에서 가져오시는게 좋겠습니다.
(워낙 '하지도 않은 말'에 의한 비판에 질린 터라.)
사실 저를 포함해 상당히 많은 남자들이 이 드라마를 흥미롭게 지켜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얘기하자면, 이 드라마는 스토리의 전개 방식이나 재치있는 대사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만 한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재미도 없는데 꼬투리나 잡아 보자는 마음으로 6시즌 짜리 드라마를 다 봤다면 그건 정신병자죠.
뭣보다 캐릭터의 구축 면에서는 완벽에 가깝죠. 패셔너블하고 매력적이지만(물론 반감을 가질 분도 있겠지만 설정이니까 넘어갑시다) 실제 생활에서는 겉똑똑이인 캐리, 허영심도 강하고 사고도 잘 치지만 의리 하나는 돌쇠인 사만다, 항상 "넌 예쁘니까 잘 될거야" "그래, 그 남자가 널 안 좋아할 리가 없어" 같은 말만 해 주는 착한 공주 샬롯, 머리도 좋고 판단력도 뛰어나지만 많은 남자들이 '그냥 친구'로 생각해버리기 쉬운 미란다 같은 인물들의 묘사는 정말 살아 숨쉰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그 주변의 수많은 남자들 중에는 별 이상한 놈들이 다 있지만, 원래 드라마의 지향이 '네 여자가 만나는 오만 이상한 놈들 이야기'이니 그걸로 이 드라마가 편견을 갖고 있다든가 하는 얘기를 하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 드라마의 장점을 하나 더 얘기하자면, 일단 이 드라마를 통해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이 생활에서 겪는 사안 - 특히 연애 문제 - 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아울러, 여자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리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느낄 수 있게 하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여자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자신의 약점을 감출 수 있는지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네. 이 드라마를 열심히 보면 당신도 여자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한마디로 이 드라마를 통해 득을 볼 수 있는 남자들은 여자들을 속이는 나쁜 남자들이 될 가능성이 높죠.
한편으로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주 시청층인 여자들에게도 가끔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여자들이 얼마나 남자들에 대해 모르는지를 알려 주려고 하죠. 남자들이 여자들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네 주인공들이 노상 하는 한탄이지만, 가끔씩 어떤 남자 등장인물들은 "그럼 니들은 남자에 대해 잘 아니?"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잭 버거가 말하는 "He's just not that into you"라는 대사죠.
그리고 이 드라마의 여성 캐릭터들은, '때로 이 드라마에 대한 공격에 다소 과민한 자신의 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남자들에게 우호적입니다.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남자들 중에는 찌질이도, 훈남도, 악당도, 섹스 중독자도 있지만 대체로 이 드라마의 네 주인공들은 최소한 이 세상이 남자 없이 자신들만으로 돌아간다고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남성의존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남자들보다 이 드라마를 강하게 혐오하는 사람들이 바로 페미니스트들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자칭 페미니스트 중에는 이 드라마를 여권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 합니다. 남자들만 이 드라마를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많은 '섹스 앤 더 시티' 옹호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 드라마에 나오는 네 친구의 우정, 용기, 세상을 살아가는 낙천적인 자세, 미란다나 사만다의 희생이 의미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이 판타지라고(혹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판타지 영화도 '말이 안 되는 부분'만으로 이뤄져 있지 않습니다. '스타 워즈'도 한 솔로와 레이아의 사랑이나 어린 다스 베이더와 오비완의 우정(혹은 사제간의 정)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진짜' 감정이기 때문에 '스타 워즈'는 판타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바보라는 말 밖에 못 듣겠죠. 판타지는 설정과 장치에 해당되는 말인 겁니다. 그러니 '섹스 앤 더 시티'의 일부만 보고 판타지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은 영 남의 다리를 긁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죠.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판타지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바보짓이죠. 판타지라는 게 뭡니까. 판타지란 '어린이에겐 꿈과 희망을, 성인들에겐 잊혀진 어린 시절의 꿈을' 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 피곤한 일상사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를 마련해주는 도구입니다. 맞습니다. 남자들이 '007'이나 '친구', '영웅본색'을 보면서 잠시 10대 소년이 되는 것처럼 여자들도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면서 일상을 잊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적대적인 이유는 뭘까요. 그건 이 드라마가 지향하고 있는 세계관이, 이 드라마를 즐겨 보는 사람들 중 지적으로 취약한 일부 사람들을 아주 형편없는 방향으로 끌고 갈 위험성이 농후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폐해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죠.
이 드라마는 어떤 사람들에겐 "아니 옷이나 구두가 중요하지 사람의 교양 같은게 무슨 소용이야?"라고 읽히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겐 "요리? 청소? 옷장 정리? 그런건 개나 주라고 해. 캐리같은 멋진 커리어 우먼들은 그따위 건 안 하잖아?"라고 읽히기도 하죠. 또 명품에 대한 남다른 집착, 그리고 소비를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비정상적인 가치관에 대해서도 "당연한 거 아냐? 뉴욕에 사는 멋진 성공한 여성들도 원래 다 그렇게 한다구"라는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네 주인공이 과연 옷과 백, 구두, 장신구나 미용,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좋은 남자 만나는 일' 이외에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개척하겠다든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든가 하는 일로 고민하는 장면을 보신 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벌 만큼 버는 여자들에게도 인생을 채울 일은 저게 전부라고 생각하게 하는 건, 결국 남자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머리 텅 비고 명품이나 밝히는 된장녀'들이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하는 데 악용될 여지가 크다는 얘깁니다.
(아, '대가리에 든건 술과 여자, 돈과 거드름밖에 없는 이상한 놈들'을 욕하고 싶으시면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그런 놈들을 합리화하는 이상한 드라마 - 만약 있다면 - 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욕하고 싶으시면 역시 원하시는대로.)
그리고 이 드라마의 기획 의도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목표가 바로 '소비 촉진'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분들도 없겠죠. PPL이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다른 영상물들과 마찬가지로, '섹스 앤 더 시티' 역시 수없이 많은 브랜드들을 널리 알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007'에 한번 비쳐 보겠습니다. 이 영화를 본 남자들이 애스턴 마틴 스포츠카나 보드카 마티니, 크루그 샴페인 등에 갖는 집착과, '섹스 앤 더 시티'를 본 여자들이 샤넬이나 돌체앤가바나, 코스모폴리탄 칵테일이나 주말 브런치에 보이는 열정이 과연 비교가 되던가요. 여기서 '007'과 '섹스 앤 더 시티'는 결정적으로 결별합니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가쉽 걸'같은 드라마들이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결국 10대 때부터 많은 소녀들에게 '나도 저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합니다. 물론 여주인공은 별로 화려하지 않은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지만, 그 대가로 남자친구(혹은 그와 비슷한 사회경제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초 부유층이라고 해서 사는게 늘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한발 더 나아가 역설적으로, 늘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것도 그리 나쁜 삶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죠. (그런데 참 이 드라마 역시 무척 재미있습니다.^^)
물론 이런 부분이야말로 매우 지엽적인 것이고, '섹스 앤 더 시티'의 굳건한 주제는 한때 사만다가 에미상 수상 소감으로 얘기했듯 "남자들은 항상 스쳐 지나가지만 여자들은 남는다", 즉 주변에서 연애를 어떻게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건 서로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네 친구들은 영원하다는 것이라고 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수긍합니다. 이 때문에 여자들은 "우리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은 남자들이 이 드라마의 세계에 대해 이해할 리가 없잖아"라고 말하곤 하죠.
그런데 한번 이런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게 '계집들이야 가면 또 오는 거지만 친구간의 우정이야 무엇보다 소중하지!'라고 외치며, 집에 잘 들어앉아 있다가도 친구들로부터 '콜'만 오면 달려나가는 '남자들의 진한 우정' 아니었던가요?
여자들의 이런 말을 들으면 수백년 수천년 동안 술취한 남자들이 버럭 내뱉었던 "아녀자들이 대장부의 세계에 대해 뭘 안다고!"가 떠오릅니다. 남자들의 이런 태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실 분은 아마 없겠죠?
정리하는 의미로 몇줄 붙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이 드라마에 대한 추억을 탄성을 토해가며 이야기할 때 옆에서 뭐 씹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남자친구나 남편이 있다면, '아, 저놈이 내가 또 뭐 사달랠까봐 미리 분위기 잡는구나'라고 생각하실 일 만은 아닙니다. 단지 경제적인 압박에서 오는 공포 외에도, 그 남자들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혹은 자기가 친애하는 여자가 '단지 물질에만 집착하는' 여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섹스 앤 더 시티' 얘기가 나오면 툴툴대는 남자들에게 "너 된장남이지? 이쁘고 능력있는 여자들이 너를 거들떠 보지도 않아서 삐진거지?" 혹은 "넌 남자라서 어쩔 수 없어. 여자들만의 가슴 벅찬 사연을 니가 어떻게 이해하겠어(위에서도 말했지만 이건 지난 1000년간 남자들이 해 오던 대사죠)"라고 말하는 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를 만난다면, 웃으면서 "난 그렇게 물건에 목숨 건 여자가 아니야"라고 설명해 주세요. 그리고 쇼핑과 남자 만나는 일 외에도 여러분의 인생에 의미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걸 보여 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남자들이 두려워하는 건 '정말 그게 전부인 여자' 들이니까요. 하지만 만약 정말 '그게 전부'라면, 그래서 상황이 심각해지는 건 누구도 말릴 수 없겠군요.^^
P.S. BABY BIG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