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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무한도전'이 '프로레슬링을 모독했다'는 주장이 일파만파로 퍼져 반박과 재반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디어, 특히 저질 미디어 시장이 가장 좋아하는, '어쨌든 논란이 확산'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물론 이 사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 잘잘못을 판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 듯 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된 당사자들의 말, 특히 처음 문제를 제기한 윤강철 선수의 말과 김태호 PD의 해명을 읽다 보니 사건의 실체가 잡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입니다. 이번 사건의 주범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가난'이었고, 거기에 대한 몰이해가 논란과 감정 대결을 낳은 것이더군요. 물론 이건 저의 판단입니다. 거기에 동의하실지는 아래 내용을 읽어 보시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읽어보시는게 좋겠습니다. 윤강철 선수의 '자술서'입니다.

http://tvzonebbs.media.daum.net/griffin/do/talk/program/challenge/read?articleId=10917&bbsId=178_a

그 다음은 여기에 대한 김태호 PD의 해명입니다.

http://blog.daum.net/teoinmbc/2

대강만 봐도 상당한 입장 차이가 느껴집니다.


1. 출연료 문제

윤강철 선수 측의 문제제기에 따르면 "출연료에 대해 처음부터 얘기가 없었고, 방송 출연(지난 2월) 이후 2개월이 넘어서야 돈이 지급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아다시피 방송은 대개 출연 즉시 출연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이 소요된 뒤에 돈을 준다는 것으로 윤강철 선수 측도 납득한 듯 합니다.

솔직히 제가 처음 놀란 부분은 그 돈의 액수입니다. 자술서 등으로 봐선 인당 20만원, 그리고 김태호 PD의 해명을 보면 30만원인 듯 합니다. 대략 내용을 보면 나간 돈은 60만원인데 '무한도전' 측은 이게 2명분, 윤선수 측은 3인분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20-30만원 정도입니다.

자, 제가 아는 방송계 상식으로 얘기해보면 이렇습니다. 출연료를 포함한 출연 조건은 일단 출연자 자신이 정하는 겁니다. 정해진 건 없습니다. 양쪽 중 어느 한 쪽이 먼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금액을 제시하고, 거기에 대해 조정이 이뤄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온 이 액수는 현재 방송에 나오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의 금액입니다.

그런데 윤강철 선수의 자술서?를 보면 이 돈의 가치에 대해 윤선수는 그리 적은 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게 드러납니다.


네. 윤선수는 30-40만원의 출연료가 '꽤 큰 돈'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챔피언이라는 선수가 말입니다. 이 대목이 참 가슴아픕니다. 그러니까 1박2일로 강화도까지 가서 촬영을 하고 받은 돈이 1인당 20만원이라 해도 '요즘 힘든'  윤선수나 동료들의 입장에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돈이었던 겁니다.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합니다. 김태호 PD의 해명을 봐도 '아니 대체 MBC가 그만한 돈을 떼어먹기라도 한단 말인가'라는 한탄이 읽힙니다. 그리고 윤선수에게 악플을 단 많은 사람들도 '무슨 그만한 돈을 가지고 수십번씩 독촉 전화를 했다고 하느냐', '찌질하다' 는 식의 반응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사건 밑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난'과 '그런 가난에 대한 오해'가 있었던 겁니다. 자, 한번 양쪽 입장에서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무한도전' 작가의 입장입니다. 위로부터 '프로레슬링 선수 2명을 섭외하라'는 명령을 받은 작가는 섭외에 나섭니다. 협회 쪽에서 문의가 왔을 때 작가는 일단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최저선', 즉 '1인당 30-40만원 정도'라고 얘기합니다.

'방송계 상식'을 들자면 섭외가 이뤄져 출연에 동의하기 전에 출연료에 대한 부분은 구두로라도 확실하게 매듭지어지는게 보통입니다. 만약 이 과정에서 확실하게 얘기가 없었다면, 그건 섭외하는 측에서 제시한 최소선에 동의한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나는 방송 출연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으므로 출연료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불행히도 제작진, 특히 작가는 후자 쪽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적어도 프로 레슬링 선수'라면 그 출연료가 '20만원이냐 30만원이냐 50만원이냐에 크게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출연료가 그날 지급되느냐 몇달 있다 지급되느냐' 역시 큰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당장 윤선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황을 보면 윤선수는 정말로 MBC가 '출연료를 떼어 먹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대에 대한 몰이해가 바로 비극의 씨앗이었던 겁니다.


2. 이동 수단 - 촬영장 푸대접

정황을 보면 여기서도 몰이해가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윤 선수 측의 요구는 아주 소박했던 셈입니다. '몇명 정도 같이 타고 가도 되겠느냐'는 요구를 하고 그걸 거절당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김태호 PD는 "우리가 한번 녹화때마다 쓰는 운송비가 얼만데, 그 세명 태울 차 마련하는게 무슨 문제였겠느냐"고 답답해 합니다.

여기서도 엄청난 시각차가 존재한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윤선수 입장에선, "출연료도 따로 받으면서, 녹화장소까지 태워다 달라는 것"은 대단히 염치 없는 요구인 겁니다. 그래서 강하게 주장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작가가 한번쯤 "아, 꼭 필요한 사항인가요?" 정도로 물을 때 아마 "아녜요, 힘들면 그냥 저희끼리 갈게요"라는 정도로 넘어갔을 것 같습니다.

김태호 PD의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만약 제작진이, 이날 오는 레슬러들이 자기 차를 몰고 현장에 올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 차량 한대 정도 배정하는 건 정말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담당 작가는 아마도, '프로 레슬러나 되는 사람이면', 그리고 위에서 얘기했듯 '출연료에도 크게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위해 따로 운송 수단을 걱정하는 건 쓸데없는 관심이라고 생각했을듯 합니다.

다시 말해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윤선수 측이 그냥 드러내놓고 '우리 차가 없으니 현장까지 이동할 수단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면 '무한도전' 측에선 별 생각 없이 '네. 그럼 **시까지 여의도로 오세요'라고 했을 상황인 겁니다. 하지만 서로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양쪽이 이런 비극을 낳은 겁니다.

촬영장에서의 '푸대접'에 대한 주장 역시 양쪽의 몰이해가 크게 작용하는 부분입니다. 방송 녹화장에서 미리 정해 둔 시간은 큰 의미가 없죠. 밤 10시로 예정됐던 촬영이 새벽 3시로 밀리는 건 늘 있는 일입니다. 녹화가 지연되고 있다고 친절하게 30분 단위로 알려주는 사람이 있을리 없습니다. 당연히 방송에 익숙지 않은 출연자는 푸대접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녹화가 끝난 뒤의 상황. 처음에 타고 온 차가 없으니 타고 갈 차가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상황에서 윤선수가 '서울까지 갈 수단'을 묻고, 작가가 없다고 대답하자 윤선수 측은 '그럼 이 펜션에서 자고 가겠다'고 합니다.

이걸 작가 측은 "그분들이 자고 가는게 낫겠다고 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이 보고한 작가는 설마 '프로레슬러들이', 그 먼 현장까지 '버스를 갈아타고 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자고 간다는 것이 '지금(심야)은 대중교통수단이 없으니, 아침에 일어나서 가겠다'는 뜻이라고는 역시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양쪽의 입장을 읽어 보면 이런 겹겹이 쌓인 오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3. 프로레슬링 모독?

레슬러들이나 협회나, '무한도전'으로부터 출연 제의가 왔을 때 당연히 '실추된 프로레슬링의 인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건 '무한도전' 팀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대목에 대해선 충분히 많은 분들의 생각이 오갔을 겁니다. 협회와 레슬러들은 당연히 방송에 협회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기를 바랐고, '무한도전' 팀은 '그건 처음부터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도 양쪽의 잘잘못은 없습니다. 양쪽 모두 '자기 생각'을 한 것 뿐입니다. 그 '자기 생각'이 상대방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에는 서로 관심이 없었을 뿐인 겁니다.

김태호 PD의 말들입니다.




다만 나중에는 '무한도전'이 그냥 떠맡기에는 너무 행사의 규모가 커졌고, 그 정도의 규모가 되는 행사를 해당 종목 협회와 상의 없이 했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장충체육관에서 관객을 모아 놓고 하는 행사는, 그동안 매주 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여러 차례 등장했던 프로 레슬러의 출연과는 성격이 다르죠.

또 '무한도전' 측은 봅슬레이나 댄스스포츠 때 '협회'와 '협회가 인정한 전문가'들의 역할이 필요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협회 측은 '프로레슬링은 그런 역할 없이도 방송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죠.
 
이것이 바로 한쪽에선 '모독'이고, 다른 한 쪽에선 '모독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유일 겁니다. 다만 이건 모두 '무한도전'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아닙니다. 김태호 PD도 말했듯 '서운할 수는 있지만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게 맞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힘있고 잘 나가는 한 쪽과 너무 가난하고 힘 없는 다른 쪽이 만났다는 것에 모든 불행의 씨앗이 있었던 듯 합니다. 심지어 그 '다른 쪽'은 자신들이 아예 그 대화의 상대로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는 것이 서운하고 약오르는 상황인 것이죠. 협회나 윤선수는 이번 사건이 '프로레슬링계와 무한도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반면 '무한도전'은 어디까지나 '윤선수와 무한도전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전제했듯 이번 사건은 어느 한쪽도 잘못이 없습니다. 양쪽 모두 '자기의 상식'과 '자기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는데 결과에는 모두 불만이 있는 것이죠. 안타까운 건 양쪽의 '상식' 사이에 그렇게 먼 거리가 있는데, 그 엄청나게 다른 상식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저기서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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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제가 차가운 음식, 특히 얼음을 이용한 음식에 푹 빠져 있다는 걸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초콜릿으로도 빙수를 만드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인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는데 안 갈 이유가 없겠죠?

찾아간 곳은 한 초콜릿 공방. 물론 빙수 전문점은 아니고, 초콜릿으로 만든 온갖 것들을 파는 카페와 초콜릿 가공법을 배우는 공방을 겸한 곳이었습니다. 이름은 에이미 초코(Amy Choco). 일단 그 초콜릿 빙수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일단 위치는 가로수길 근처...라고 외에는 설명하기 좀 힘듭니다. 가로수길과 신사역 사이의 골목 안 어디쯤입니다.


밖에서 보면 이렇게 생겼습니다.

내부는


뭐 흔히 있는 카페 분위기.



자세히 보면 벽장 쪽에 초콜릿 모양을 한 장난감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이쪽은 공방. 주말을 이용해 초콜릿 가공법을 배우려는 분들이 한창 수업중이었습니다. 몰아서 배우는 집중 수업이라 하루에 6시간 수업이라고 합니다.

뭐 초콜릿은 좋지만 6시간 동안 서서 초콜릿 달이는 냄새를 맡으면 초콜릿이 싫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더군요.^^


그러니까 카페로서는 초콜릿으로 만드는 거의 모든 것을 팝니다. 케이크와 브라우니 종류는 물론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과 초콜릿이 들어간 음료까지.



특히 저 왼쪽에 있는 초콜릿 아몬드가 죽음입니다. 가게에서 파는 아몬드 초콜릿과는, 이대호와 동네야구 4번타자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번 집어먹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는 무서운 과자입니다.



원숭이 뭐라는 이름이었는데, 초콜릿이 들어간 바나나 스무디...라고 표현하는게 가장 적당할 듯 합니다. 진국입니다.^^ 한끼 식사로 거뜬? ㅋ

물론 이 집에 온 목적은 이게 아니었죠.

초콜릿 빙수의 등장입니다.



일단 이렇게 생겼습니다.

항공촬영도 해 봤습니다.


주요 재료는 얼음, 팥, 바나나, 약간의 연유, 언 복분자(^^), 그리고 비장의 콩고물이 입혀진 캐러멜입니다. 아이스크림 위에 초콜릿 시럽이 뿌려져 있지만 진짜는 오른쪽에 딸려 나오는 진하디 진한 초콜릿입니다.



가볍게 부어 주면 됩니다. 좀 더 효과적으로 붓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잠시 들어 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퍼먹으면 됩니다.

음...

아시겠지만 저렇게 꾸미가 많은 빙수는 본래 제 취향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 진하디 진한 맛이 스푼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더군요.^^

좀 더 입자가 고운 얼음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위에 진한 재료(?)들이 많아서 그런 얼음을 쓰면 너무 빨리 녹아버린다는 업주 측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초콜릿 공방 카페인지라 이런 식의 이색 주문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한 세심한 남자분이 프로포즈용으로 주문 제작한 초콜릿입니다.

저 프로포즈를 받은 분이 부디 만족했길 바랍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찾아가거나 하는 건 글로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amychoco.com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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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의 신민아는 처음부터 비교될만한 대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었죠. 이미 이 드라마가 제작되기 전부터 신민아의 구미호 캐릭터가 곧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캐릭터와 비슷한 것일 거라는 추정이 나왔고, 기자간담회때 방송된 영상을 보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추측을 했을 겁니다.
 

이때문에 신민아에게 그런 질문이 던져졌고, 신민아는 "일부 장면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정 반대의 캐릭터"라고 답변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물론 신민아가 그 자리에서 저렇게 대답하는 건 정답입니다. 행여 그런 자리에서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은 작가나 제작진에 대한 결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신민아에게든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이하 여친구)' 제작진에게든, 신민아나 이 드라마가 전지현이나 영화 '엽기적인 그녀'와 자꾸 비교되는 건 나쁠 게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신민아는, '포스트 전지현'으로 지목된 적이 있었죠.



지난 2008년, '엽기적인 그녀'를 연출한 곽재용 감독이 또 한편의 로맨스 판타지 영화를 내놨습니다. 제목은 '무림여대생'. 흥행 성적은 전국 관객 동원이 10만에 미치치 못하는 재난성 영화였지만 이 영화에는 사뭇 흥미로운 점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신민아는 전통의 비전 무술가의 후계자입니다. 차에 치어도, 윗집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망치를 머리에 맞아도 끄떡 없는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죠. 그런 신민아가 꽃미남 대학생 유건에게 반하고, 남자에게 보호받는 사랑스러운 여자 행세를 하기 위해 무공을 감추고... 그러면서 신민아만이 상대할 수 있는 악의 무공 고수가 등장해 이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설정상으로는 꽤 흥미롭습니다만, 그리고 신민아의 청순미는 이 영화에서도 반짝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대로 펼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전개가 관객의 손바닥 안에서 너무 오래 맴돌기만 합니다.

물론 이건 결과론이고, 이 영화를 보면 신민아를 '포스트 전지현'으로 육성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게 여기저기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이 영화의 무술 여대생은 엽기적인 그녀의 변형입니다. 말할 수 없는 비밀과 남자에 비해 압도적인 전투력(엽기녀 전지현은 초인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말빨과 폭력성으로 남자주인공 차태현은 물론, 주위 사람들이 감히 대들 수 없는 캐릭터였죠^^)을 가진 신비로운 여자라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찰랑찰랑한 생머리를 나부끼는 청순한 외모에서 가공할 전투력이 뿜어나올 때, 그 위력은 배가됩니다. 게다가 양쪽 모두 일반인들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으로 남자 주인공을 당황하게 하고, 그것이 웃음의 코드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는 살짝 부족한 연기력을 커버할 때에도 매우 효과적입니다^^)


이 스타일은 그대로 '여친구'로 계승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엽기적인 그녀'에서 바로 '여친구'로 이어지기보다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무림여대생'을 거쳐 '여친구'로 넘어오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죠. 아울러 '여친구'의 구미호에게서 같은 홍자매의 작품인 '환상의 커플'에서 본 한예슬의 그림자를 느끼는 것도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



내용 뿐만 아니라 연출 역시 그렇습니다. 19일 방송된 '여친구'에서 나풀거리며 이승기의 뒤를 따라 뛰는 신민아의 모습이나, 이승기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검술 액션 신 등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이 쓴 시나리오가 영화로 재현되는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줬습니다. 제작진도 '엽기적인 그녀'와 '여친구'의 관계에 대해 그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신민아가 두 캐릭터를 '정 반대의 캐릭터'라고 말한 것도, 차태현을 좋아하지만 차태현으로부터 결국을 멀어지려고 스스로 마음 먹는 엽기녀 전지현과는 달리, 훨씬 마음 속 깊이 이승기를 좋아하지만 오히려 이승기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구미호의 성격 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부분에서 충분히 납득할만 합니다. 하지만 일단 '인간과는 전혀 사고방식이 다른 구미호가 인간 세계에서 멀쩡한 인간 남자와 사귀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라는 드라마의 등뼈 자체가 '구미호의 엽기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캐릭터의 차이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와 드라마 '여친구'의 본질적인 유사성에 비하면 상당히 지엽적인 부분입니다.



어쨌든 이미 '원조 청순 글래머'로서, CF 퀸으로 자리를 굳힌 신민아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한방의 히트작'이었을 것이고, 이미 수년 전부터 '포스트 전지현'의 강력한 후보였던 신민아에게 적당한 것 역시 '엽기성'이 강조된 작품일 것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적 선택입니다. 그런 이유로, 영화 '무림여대생'에 이어진 드라마 '여친구'는 그 전략의 두번째 도전인 셈이죠.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이 두번째 도전은 상당히 성공적일 듯 합니다. 누가 봐도 긴 머리를 나풀거리는 신민아가 이 드라마에서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물론 김탁구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이 성공이 '대성공'으로 끝날 지,  '의미 있는 성공'에 그칠 지는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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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지나서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고도 하지만 몇십년 살아 보니 세상 이치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됐습니다. 본래 입춘 지나고 나서 꽃샘추위가 오고, 입추 지나고 나면 마지막 반짝 더위가 오기 마련이죠. 일찌기 시성 두보도 음력 7월 초, 입추 갓 지난 때의 날씨가 온통 옷을 풀어헤치고 미친듯이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덥다(束帶發狂欲大叫)고 하셨으니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아무튼 아직 더운 날이 이어지고 있으니 유효기간 지나기 전에 써먹어야 할 포스팅입니다. 요즘은 냉장고 덕분에 무더운 염천에도 마음대로 얼음을 먹을 수 있지만 이건 20세기 들어서도 한참 지난 뒤의 일이죠. 그럼 그 전, 수백년 수천년 전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 시절에도 여름에는 얼음이 훌륭한 식재료로 사용됐습니다.




일단 정리한 글을 가져옵니다. 전기도 없던 시절, 어떻게 한여름에 얼음을 먹었는지에 대한 간략한 글입니다. 사실 너무 간략해서 이 포스팅을 하게 된 겁니다.

제목은 '반빙(頒氷)'입니다.

냉장고가 없었다고 인류가 한여름 무더위를 마냥 참고 있었던 건 아니다. 이란에서는 BC 4세기부터 야크찰(yakhchal)이라는 원뿔형 저장고가 등장했다. 섭씨 40도가 넘는 사막 한복판에서도 얼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선 춘추전국시대부터 한겨울 산과 강에서 얼음을 떼어다 돌집에 보관하는 방법이 사용됐다. 이를 벌빙(伐氷)이라 했는데, 고관 대작들에게만 허용됐으므로 벌빙이란 말이 곧 출세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신라 3대 유리왕(노례왕) 때 이미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藏氷庫)를 지었다 한다.고려 이후엔 나라에서 저장한 얼음을 매년 여름마다 관원들에게 나눠줬다. 이것이 반빙(頒氷)이다. 귀한 것이므로 궁중과 종친, 당상관에게 우선 지급됐지만 은퇴한 관리나 장수하는 노인, 활인서에 입원한 환자들의 몫도 있어 사회 복지의 측면도 있었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조선시대 한양에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운영됐다. 서빙고 하나만으로도 약 13만5000정(丁)의 얼음을 보관해 사용했고, 관리의 직급과 업무에 따라 가져갈 수 있는 얼음의 양을 표시한 빙패(氷牌)가 지급됐다. 마패 아닌 빙패로도 위세를 견줄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듯 중요한 사업이었으니 좋다 나쁘다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예종 1년(1469년)에는 얼음을 나누면서 몰래 민간에 내다 파는 일이 있으니 이를 엄하게 단속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성종 때 죄인들에게도 얼음을 나눠주자 당대의 유학자 김종직은 “성상께선 백성의 더위를 염려하여/ 감옥에도 반빙을 허락하셨다(九重尙軫元元熱 更許頒氷岸獄中)”고 선정을 칭송했다. 반면 연산군은 “궁중에서 직물 염색을 하는 데 얼음이 필요하다”며 반빙을 중단시킨 일이 있었다. 3년 뒤에 반정(反正)이 일어난 것도 왠지 우연이 아닐 듯싶다.

최근 정부가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각 관공서의 냉방 온도를 28도, 마트나 백화점은 26도로 규제하면서 '덥다'는 반발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예비전력률 저하 등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무작정 냉방 온도만을 높여 감시하기보다는 전체 사업장의 전력 소모량을 규제하는 등 보다 효율적인 방안도 있을 듯하다. 반빙을 해도 모자랄 삼복더위에 더위로 인한 스트레스가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끝)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야크찰의 모습입니다. 사실 칼럼 하나를 쓰려면 꽤 자료를 모으게 됩니다. 사실 모은 재료를 그냥 내버리기는 너무 아깝고, 그래서 포스팅으로 모아 본 겁니다.

한국 역사에서 얼음 저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신라 유리이사금(모례왕) 편에 나옵니다. '쟁기와 보습, 장빙고를 만들고 수레를 지었다(製犁耜及藏氷庫, 作車乘)'는 것입니다. 정사인 삼국사기는 이보다 훨씬 늦은 지증왕 6년 11월, 왕이 명을 내려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始命所司藏氷)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시절의 얼음이란 모두 겨울에 뜯어다가 여름까지 녹지 않게 보관한 것 뿐입니다. 자연상태에서도 여기저기 얼음골(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지대를 가리키는 보편적인 이름)이 조성되는 걸 보면 옛날 사람들도 여건만 잘 갖춰 놓으면 여름에도 얼음을 먹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 뒤로 얼음을 뜯어다 저장하는 건 상당히 보편적인 일이 된 걸로 보입니다. 위에 나온 벌빙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얼음을 사냥한다(?)는 뜻인데 이게 대부(大夫) 이상의 벼슬아치들에게만 허용되는 사치였다는군요. 조선시대 유학자 김굉필의 시에 이 벌빙이란 말이 나옵니다. 바로 '출세'라는 뜻으로 쓰였죠.

분수 밖에 벼슬을 하여 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내가 어찌 능할쏜가 / 匡君救俗我何能
후배들로 하여금 나의 우졸을 조롱하게 하였으나 /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익을 구차하게 바라지 아니하네 / 勢利區區不足剩


(물론 경주 석빙고가 신라시대 유물인 건 아닙니다. 이 석빙고는 조선시대 것.)

하지만 이렇게 얼음을 채취하고 보관할 장소를 짓고 하는게 꽤 고된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한겨울에 해야 하는 일이니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비난도 끊이지 않습니다. 고려사절요에 전하는 1243년, 고려 고종때의 기록입니다.

12월에 최이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니 그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또 안양산(安養山)의 잣나무를 옮기어 집의 후원에 심었다. 안양산은 강도(江都)에서 여러 날 걸리는 거리인데 문객인 장군 박승분(朴承賁) 등으로 감독하게 하였다.

이 최이는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다른 이름이죠. 최씨 무신정권이 정점에 올랐을 때의 권력자 최이는 이렇게 백성들을 괴롭혀 얻은 얼음을 중신들에게 나눠줘 당대의 문장가 이규보 같은 사람은 감사의 시를 짓기도 합니다.

얼음, 또 반빙에 대한 시를 많이 쓴 사람으로 목은 이색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인 이색은 상당히 비대한 몸에 더위도 많이 탔던 모양입니다. 유난히 여름의 얼음을 고마워하는 글이 여러 편입니다. 예를 들면,

전각은 조용하고 덥지도 않은데 / 殿閣靜無暑
얼음 깬 물에 꿀을 타서 마시어라 / 蜜漿調碎氷
지경이 깊으니 인적은 적적하고 / 境深人寂寂
바람이 부니 나무는 층층이로다 / 風動樹層層
얼굴에 비추면 냉기가 쏘아대고 / 照面冷相射
목에 삼키면 머물 틈도 없이 넘어갔지 / 入喉流不凝
(중략)
형세는 한로 절기부터 시작하여 / 勢從寒露始
물이 얼어서 절로 얼음이 되는데 / 水結自爲氷
골짝마다 사람은 얼음 조각을 캐내고 / 萬壑人擎段
교하엔 말이 층층 얼음 위를 달리네 / 交河馬踏層


한편으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반빙의 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서운해 하는 글도 있습니다. 얼마나 한여름 얼음이 고마운 존재인지 보여주죠.

해마다 유월에 얼음덩이 마주하면은 / 年年六月對氷峰
잠자리 깨끗하고 부채 바람 인 듯했는데 / 枕簟無塵扇有風
앓고 나서 문득 반사가 적음에 놀랐노니 / 病後忽驚頒賜
지난겨울 다수워 빙고가 텅 빈 때문일세 / 只因冬暖凌陰空

반빙하는 총재는 홀로 여유가 있거니와 / 頒氷冢宰獨優游
양부의 관원들은 등에 땀이 줄줄 흐르네 / 兩府摩肩背汗流
승선 다섯 사람만 유독 반사를 얻었으니 / 五箇承宣偏得賜
성조에서 예부터 승선을 중히 여겼음일세 / 聖朝從古重龍喉

기억컨대 연산에 모진 더위 푹푹 찔 적엔 / 記得燕山酷熱蒸
길거리 곳곳에서 얼음 꿀물을 타 마셨는데 / 街頭處處蜜調氷
동에 돌아온 신세는 청량하기 그지없어라 / 東歸身世淸?甚
시냇물 솔바람에 시원한 기운이 모이는 걸 / 澗水松風爽氣凝


조선시대 들어서는 반빙이 아예 정부의 주요 사업이 됐습니다. 이조 아래에 빙고를 관장하는 관직이 생겼고, 도성에는 동빙고와 서빙고를 설치해 반빙을 실천했습니다. 만기요람에 나오는 서빙고의 반빙 현황은 이렇습니다.

서빙고에 저장한 얼음 134,974 정(丁)은 그 가운데 수가(受價)한 혜청미(惠廳米) 677석ㆍ호조미 367석을 합하면 1,054석인데 그 가운데 장빙미 551석의 나머지 쌀 503석과 병조목 6동(同) 29필을 본고에 응용할 것과 얼음을 져나르는 품삯으로 지급하고, 본고를 수리할 때에 목물값 쌀 82석은 선혜청에서 매년 지불함.

각 전(殿)ㆍ궁(宮)에 공상(供上)하는 것 10,100정 3월부터 9월까지.

각 궁방(宮房)에 660정 5월부터 7월까지 각 전ㆍ궁 아지(阿只) 시녀(侍女)ㆍ장번내관(長番內官)ㆍ내반원(內班院)에 900정 5월부터 7월까지로 하나 시녀청에는 6월로부터 7월까지.

종친(宗親 국왕의 친족)ㆍ문ㆍ무 2품 이상ㆍ삼사장관(三司長官)ㆍ육승지(六承旨)ㆍ제상사(諸上司) 패빙(牌氷 패를 가지고 찾는 얼음)이 9,144정 각원(各員) 패빙은 다만 6월 한 달뿐이고, 매 패(牌)에 10정이며, 각 사 예빙(例氷)은 한 달 혹은 두 달로 하되 많고 적음은 같지 아니함 내빙고 이래조(內氷庫移來條)ㆍ각 궁방(宮房)ㆍ내각(內閣)ㆍ내반원(內班院)에 반빙(頒氷)하는 것 1,800정 5월부터 7월까지.

시임(時任 : 현임(現任)) 직각(直閣)ㆍ대교(待敎) 각 45정, 제학(提學)ㆍ직제학(直提學) 각 90정, 원임(原任 : 전임(前任)) 각 10정 을 합계한 얼음 22,623정. 각사의 반빙을 받을 각원(各員)에게는 선공감(繕工監)에서 패를 제조하여 공급하되 패면(牌面)에 받을 정수(丁數)를 써서 얼음을 받는 데 빙고(憑考)가 되게 함.


사실 이렇게 관에서 배급하는 얼음 외에도 시중에서 사사로이 얼음을 저장해 쓰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뭣보다 1급 기방 같은 곳에서는 얼음 없이 한여름에 손님을 받을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얼음 수요를 놓고 부정행위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 기축(1469), 7월2일의 기록입니다. 

서빙고의 관리와 예빈시·내섬시 등 제사의 얼음을 저장하는 관리를 추국하게 하다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서빙고(西氷庫)에 저장한 얼음은 처음에 단단하지 않아서 녹아 없어지기에 이르며, 또 얼음을 흩인 후에 여염(閭閻)에 많이 파니, 서빙고의 관리와 예빈시(禮賓寺)·내섬시(內贍寺)·의금부(義禁府)·군자감(軍資監) 등 제사(諸司)의 얼음을 저장하는 관리를 추국하여 아뢰라.”


또 성종은 옥중의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하사해 당대의 거유 점필재 김종직을 감동시켜 이런 시가 나오게 됩니다.

때로는 아첨 집어다 졸린 눈에 뻗지르고 / 時點牙籤挑睡睫
한가히 누수 들으며 저녁 종을 기다리기도 / 閑聽銅漏待昏鐘
성상께선 오히려 백성의 더위를 염려하여 / 九重尙軫元元熱
감옥에까지 얼음을 나눠 주도록 윤허하도다 / 更許頒氷岸獄中


이런 아버지를 닮지 못한 폭군 연산은 반빙을 막아 민심을 분노케 하죠. 연산군 10년 갑자(1504) 7월6일의 기록입니다.
 

전교하기를, “예조(禮曹)가 더 반빙(頒氷)하기를 청하였는데, 얼음은 비록 많이 저장되어 있으나 궁중에 남빛 물들일 물건이 많아서 반드시 많이 쓰리니, 더 반사(頒賜)하지 말라.”
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쫓겨납니다. 뭐 여기서 인과관계를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어쨌든 이럴 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도 하죠.^^

아무튼 이렇게 해 놓고 슬며시 정작 얘기하고 싶었던 주제인 '냉방온도 상한제'로 넘어갑니다. 애당초 무더위 속 냉방으로 전력이 부족하지 않도록 대비했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더위를 참는 걸로 전력 대책을 삼으라는 것도 참 답답한 일입니다. 국민을 시원하게 해 줘도 모자랄 판에 자꾸 덥게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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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수륙의 명물이 모이는 중국 요리의 본산 중 하나. 북경-사천-광동 요리와 함께 상해 요리의 명성은 누구라도 익히 들었을 법 합니다. 그리고 상해의 그 많은 식재료 중에서도 가장 명성 높은 재료라면 상해 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지구상에서 게라는 이름이 붙은 동물 가운데 맛 없는 동물은 없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등껍질이 사람 얼굴같이 징그럽게 생겨서 아무도 먹지 않는다는 일본 세토나이카이의 헤이케 게(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얘깁니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도 일단 먹어 보면 맛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맛있는 게 중에서도 상하이 게, 정확하게 상하이 털게(上海毛蟹)혹은 큰 수문게(大閘蟹)라고 불리는 이 게는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특이합니다. 일단 큰 대자가 들어가는 이름에 비해 사이즈가 정말 기대 이하입니다.

  (이렇게 보면 엄청 커 보이지만, 실제 크기는 명함 한장 정도...ㅠㅠ)

상하이에서 게를 먹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웬만한 사람은 세번 놀랍니다. 첫째로는 게가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작아서 한번 놀라고, 두번째는 중국 물가에 비해서 그 작은 게가 무척 비싸다는데 놀랍니다. 세번째로는, 그 먹는 것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그 어린애 손바닥만한 게를, 이쑤시개와 귀이개 같은 전문 도구를 이용해서 20분씩 파 먹고 있는 걸 보고 경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몸통이 명함 한장만한 게가 대체 먹을게 뭐 있다고 그렇게 파 먹는지. 참고로 약 10년 전, 저는 상해에서 웬 중국 재벌가 아드님(당시 얘기로는 중국 6대 재벌의 후계자라고 했습니다)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상 위에 온갖 진미가 올라왔고 열심히 쩝쩝 먹고 있는데, 누군가 상해에 왔으면 게를 먹어야 한다고 한마디 한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재벌님은 즉시 지배인을 불러서(참고로 그 식당, 그리고 식당이 있는 건물이 모두 이 재벌님의 소유였습니다), 게 있느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격을 듣고 안색이 변한 이 재벌님은 즉시 자기 기사를 시켜 게를 사오게 했습니다. ...네. 아무나 재벌 되는게 아니더군요.

다른 요리를 먹고 있는 사이 기사가 신속한 동작으로 사온 게가 그 식당의 주방 찜통을 거쳐 상에 올라왔습니다. 그 다음은 저 위에 쓴 대로 세번 놀랐습니다. 솔직히 아무리 정교하게 속을 파 본다 해도, 그리고 그 작은 게가 제아무리 속이 꽉 차 있다 해도, 어린애 주먹만한 게 속에서 어른 주먹만큼 게살이 나올리는 없죠. 

중국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들이박고 게살 파는데 열중하고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뭘 더 먹으라는 거냐는 눈빛이었습니다. 더 없냐는 듯한 무언의 시선을 나누고 있는데, 눈치를 챘는지 재벌님이 한말씀 하십니다.


그: 상해 게는 원래 1인당 한마리만 먹는 거다.
나: 왜?
그: 이 게는 기본적으로 기운이 찬 음식이다. 두마리 먹으면 설사한다.
나: (정말일까...)


그로부터 거의 10년 뒤, 저는 그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아차렸습니다.


무더위 속의 상해. '꼭 가봐야 할 집'이라고 추천받은 집은 신광주가라는 집입니다. 남경동로(난징동루) 보행자 거리에서 북쪽으로 지척에 있는(전문용어로는 절강중로와 천진로의 교차점 근처라고 함) 집입니다.

골목도 허름하고, 가게도 그리 으리으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건 다 치우고 맛으로 승부하는 집'이라는 소개에 끌렸습니다. 객점은 2층부터. 좀 이른 시간이라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습니다.



약간 허름은 외관에 비해 가격은 오옷!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4가지 요리와 2개의 식사(?)가 나오는 2인용 코스가 940위안. 현재 시세로 약 16만원 정도 됩니다. 기준환율로 그렇다는 것이고, 카드사에 청구되는 금액이나 환전 환율을 생각하면 17만원 이상. 물론 상해 물가가 서울과 거의 차이가 없거나 더 비싸다고 하지만, 이 정도 가격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자꾸 이 코스를 권하는데(물론, 이게 가장 싼 코스입니다. 바로 아래 보듯 더 비싼 코스도 있죠^^), 왠지 이 정도 가격에 나오는 국내 일식당 코스가 생각나는 겁니다. 사실 제가 일식집 코스를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는 쓸데없이 비싼 가격에 너무 음식을 많이 주기 때문이죠. 비싼 재료로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음식을 내 오고, 그중 상당수는 재활용을 할 것이 뻔한 식당들을 왜 그리 무리하게들 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평생 몇번이나 먹어 보랴 싶어 940위안짜리 코스를 시켰습니다.

1번. 청증해겸(淸蒸蟹鎌). 여기까진 모두 아는 글자^^.



글자 그대로 찐 게 집게발입니다. 아, 이 집 요리의 특징은 먹기 편하게 껍질을 깐 채로 요리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참고로 상해에서 찐 털게를 드셔 보신 분이라면, 그 껍질 까고 파내는 성의가 얼마나 인내를 요하는 것인지 잘 아실 겁니다.

저 집게발의 수를 봐선 10-15마리 분은 되어 버립니다. 먹을 땐 갯수 셀 생각은 못 했습니다. 나중에 가신 분들, 한번 세 보시기 바랍니다. 맛? 맛은 뭐 굳이 설명할 필요가...



2번. 해류회노순(蟹柳 /火+會/ 蘆筍)

간자로 써 있는 걸 번자로 바꾸기도 쉽지 않군요.^^ 아무튼 해류蟹柳는 게의 다리(얼마나 게 다리가 가늘고 길면 '바다의 버들가지'라고 했을까요), 노순蘆筍은 아스파라가스를 의미하는 듯 합니다. 불 화자와 모일 회자를 붙여 쓴 글자는 '함께 끓일 회'. 조리법을 말합니다. 글자 그대로 '아스파라가스와 함께 끓여 볶은 털게 다리살'입니다.


단물이 줄줄 나오는 게다리살과 아스파라가스의 향, 그리고 아삭아삭한 식감이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사진만 봐도 군침이 절로 나옵니다.

참고로 저 사진만 보고 대단히 많은 양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듯 해서 덧붙입니다.


아이패드 아닙니다. 아이폰입니다.^^

네 개의 요리는 모두 같은 그릇에 나옵니다. 애개~ 하실 수도 있는 양이지만 상해 털게의 크기, 그리고 그걸 까는데 드는 공력, 털게의 가격 등을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맛!

3번 요리.

해분청초(蟹紛淸炒)입니다. 속살을 파내면 이렇게 가루 형태가 됩니다. 그 가루를 간장 양념으로 볶은 겁니다. 그걸 이렇게 밥처럼 퍼서 먹을 수 있다니, 감동적입니다.


밥에 비벼 먹거나 빵에 발라 먹어도 맛이 기가막힐 것 같지만 아무튼 그냥 마구 퍼 먹기로 했습니다. 행복합니다.

4번. 해고소은피(蟹膏燒銀皮)


해고라는 것은 게의 내장 혹은 고니, 혹은 몸 속에 버터처럼 축적되는 지방을 말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은피라는 것은 제가 중국 식재료에 어두워 잘 모르겠는데, 영어 설명으로는 transparent bean-curd라고 되어 있더군요. bean-curd는 흔히 두부를 가리킬때 쓰는 이름인데... 이건 두부보다는 청포묵의 맛이 났습니다. 뭐 한국에서도 콩묵을 안 먹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좀 색다르더군요.

베이스는 연한 카레 맛이 났고, 계란이 들어 있었습니다. 네. 태국 음식 푸팟퐁가리의 소스 맛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이건 그냥 퍼먹다가 뒤늦게 찍어서 초기 사진이 없습니다. 그만치 맛이 좋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요리만으로 양이 부족할까봐 식사용 음식이 나옵니다. 

1번은 해분반면(蟹紛拌麵). 게살 볶은 양념에 비벼 먹는 국수입니다.




2번은 해분소은둔(蟹紛小銀鈍). 게살로 빚은 미니 만두국. 


물론 사진만으론 크기가 짐작되지 않으시겠지만, 만두 하나가 500원짜리 동전 정도 크기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아무튼 기분좋은 포만감이 밀려옵니다. 다 먹고 난 감상은... 평소에 게를 좋아하셨던 분들이라면 생전에 한번쯤은 꼭 가 봐야 할 식당이란 겁니다. 특히 평소 게살을 좋아하시면서도 까는게 귀찮아 게 먹기를 멀리하셨던 분들, 그냥 받아 먹으면 됩니다.

처음엔 비싼 가격에 깜짝 놀라지만 먹다 보면 점점 더 가격에 납득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비싸긴 비쌉니다. 하지만 막상 드셔 보신다면, 중국의 인건비가 아니라면 도저히 저 가격에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는 생각을 하시게 될 겁니다.

P.S. 저렇게 먹고 절대 설사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짠돌이 중국 재벌 같으니. 참고로 신광주가(新光酒家)는 上海市 天津路 512호. 021-6322-3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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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제빵왕 김탁구'에서 김탁구 윤시윤에 이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예는 구마준 역을 맡고 있는 주원입니다. 그리고 그의 프로필을 보면 2006년 아이들 (idol) 그룹 '프리즈' 출신이라는 이력이 나옵니다. 1987년생인 주원이 19세때의 일이죠. 그리고 나서 주원은 뮤지컬 쪽으로 진출해 경력을 쌓은 뒤 이번에 드라마에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비와 붐이 멤버였던 '팬클럽'이나 원더걸스의 유빈과 애프터스쿨의 유이가 멤버였던 '오소녀' 처럼 제대로 활동다운 활동을 하지 못한 그룹들도 다 기억하는 아이들 세계에서, 이상하게도 프리즈라는 그룹에 대해서는 '도대체 기억이 없다'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대체 왜 그런 걸까요?

간단히 말해 이 프리즈는 정상적인 아이들 그룹과는 좀 달랐기 때문입니다.



프리즈라는 그룹은 지난 2006년 초, 문준원(19, 이상 나이는 모두 당시 발표 나이), 김윤미(23), 한진희(20), 이경은(20), 황바울(21)이라는 다섯 멤버로 구성된 팀이었습니다. 여자가 3명, 남자가 2명이라는 구성은 지금으로선 꽤 희한하게 보이지만 서지영과 이지혜 외에도 여성멤버 1명이 더 있었던 초기 샵이 이런 구성이었죠. 외양으로는 이상할게 전혀 없었습니다.


(네. 이 무렵에도 당연히 강동원 얘기가 나왔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프리즈가 활동하던 공간은 쇼 프로그램도, 예능 프로그램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비바 프리즈'라는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었다는 거죠. 2006년 11월부터 SBS에서 방송된 교육용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프리즈는, 가수로서 활동하는 그룹이라기보다는 '비바 프리즈'의 출연 캐릭터 팀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데뷔 초기부터 '아이들 그룹'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키즈 엔터테인먼트 그룹', 혹은 키즈 싱어라는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당시 실제로 만나 본 이들은 꽤 가능성을 보이는 팀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훤칠한 키에 잘생긴 준원이 가장 눈길을 끌었고, 그저 '미인대회 출신'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경은이라는 멤버가 있었죠.



이 친구도 연기자로 나섰습니다. 지난해 케이블TV 드라마 '하자 전담반 제로'에 출연한 이경은과 동일인물입니다. 미스코리아 2005년 선 출신이죠.



아무튼 이런 멤버로 활동을 시작한 프리즈는 제법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불행히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만, 멤버들이 원했던 것과 회사가 원했던 것 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듯 합니다. 팀 해체와 함께 멤버들은 각각 자기 길을 가게 되죠.

그리고 본명 대신 주원이란 이름으로 뮤지컬계에서 활동하던 문준원은 '제빵왕 김탁구'를 통해 안방극장에 안착하게 됩니다. 좋은 출발입니다.



당시 프리즈 활동 때의 영상입니다. 주원이나 이경은이나 지금보다는 조금 살이 붙은 듯한(젖살?) 모습이지만,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무튼 유망주들의 변신과 과거는 늘 흥미로운 일입니다.^^ 사실 2006년 초에 이들을 불러다 놓고 인터뷰를 했을 때, 방송 카메라도 아닌 스틸 카메라 앞에서도 열심히 춤추고 노래하던 이들을 볼 때에는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첫발을 잘 디딘 연기자 주원이 앞으로 얼마나 더 성공할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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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저는 찬 음식 마니아입니다. 냉면, 냉모밀, 막국수, 차가운 생맥주, 얼음 뜬 김치말이 국밥 같은 것들이 제가 열광하는 음식들입니다. 그리고 여름 한철로 모자라서 한겨울에도 이런 음식을 찾아 어슬렁대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올해 평소보다 훨씬 무더운 날씨와 정부의 에어컨 틀지마라 정책 때문에 더욱 각광받고 있는 것은 바로 빙수입니다. 뭐 그깟 빙수에 무슨 품질 차이가 있을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잘 만들어진 빙수와 그렇지 않은 빙수 사이에는 그냥 커피와 세글자 커피 사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지금부터 보셔야 할 겁니다.



서울 시내에서 꽤 유명한 빵집의 빙수입니다. 모양새는 그럴싸하지만 실속은 전혀 없습니다. 싸구려 통조림 팥과 연유, 딸리 젤리... 이런 모양의 빙수는 먹고 나면 싸구려 단맛이 입안을 텁텁하게 하고, 갈증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그 집에서 파는 빵과 빙수의 레벨 차이가 이렇게 현격하다는 데 놀랐습니다.

일단 좋은 빙수와 그냥 그런 빙수 사이의 가장 큰 벽은 얼음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삭빙이냐 쇄빙이냐의 차이죠. 여기에 대해서는 전에 써둔 글이 있습니다. 다시 뭐라고 주절주절 하느니 그걸 보시는게 제일 나을 듯 합니다.



제목: 빙수론(氷水論)


내 삶에 차가운 음식이 세가지 있으니 그것이 냉면이고, 빙수고, 차가운 맥주다.

일찌기 한방에 밝은 지인이 "당신 체질에는 찬 음식이 안 어울린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좋아하는 음식은 맨 찬 음식인 것을 어쩌랴. 항상 냉면집에 가면 사리를 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빙수 한 사발'의 유혹에 번번이 넘어가며, 무한정 마시는 주당은 아니지만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에는 그저 무릎을 꿇고 만다.

빙수의 마수에 처음 걸려든 것은 국민학교 2학년때쯤 된다. 집 바로 골목 건너에 반 가건물 형태의 떡볶이 집이 생겼다. 처음 생긴건 이른 봄이었던 것 같은데, 여름이 되자 그 집 벽에는 '팥빙수 개시'라는 벽보가 붙었다. 30원.

누나 손에 이끌려 빙수를 시켰다. 에펠탑 비스무레한 기계에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얼음이 얹혔고, 재봉틀처럼 큰 바퀴가 돌았다. 맘씨좋은(?) 아줌마는 한번 갈아서 수북히 쌓인 얼음을 손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한번 얼음을 갈아 얹었다. 그 위에 단팥이 세 술, 잘게 썬 젤리가 세 술, 서울우유 깡통에 담긴 연유가 휘휘 뿌려졌다. 아줌마는 빨간 병에 든 빨간 물을 찔끔, 녹색 병에 든 녹색 물을 찔끔 하더니 그릇에 숟갈 두개를 꽂아 내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기하게도 이 추억을 그대로 되살린 듯한 이미지가 있더군요. 사진 출처에 양해를 구해보려 했습니다만 저 사이트는 이미 없어졌길래 그냥 퍼 왔습니다.^)


오오.

오뎅을 처음 먹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온몸을 휩쓸었다. 입안 가득 퍼졌다 사라지는 이 냉엄하고도 달콤한 맛이라니.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팥알 몇개가 뜬 그릇 바닥을 아쉬움 가득한 숟가락으로 박박 긁고 있었다.

가정용 빙수기 따위는 나와 있지 않던 시절이라 나는 잔돈만 생기면 떡볶이집으로 달려갔다. 몇번인가 설사도 하고 배탈도 났지만, 감히 그것이 빙수 때문이라고는 의심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원래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었다. 내가 만약 건강한 편이었다면 빙수 같은 건 당장에 못 먹게 됐을 거다.

단골이 되다 보니 아줌마는 2단으로 담던 얼음을 3단으로(두번 꾹꾹 눌러서) 담아 주기도 했고, 가끔 "이렇게 빙수에 환장한 놈 첨 봤다. 원없이 먹어 봐라"라며 냉면 사발에 얼음을 갈아 특제 빙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실 처음엔 마법의 빨간 병과 녹색 병에 맛을 내는 비장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것 좀 많이 넣어 달라"는 말에 히죽 웃으며 "이거 많이 넣으면 써서 못 먹어"라고 못을 박았다. 알고 보니 그건 그냥 색소였다.

그 뒤로 근 30년 동안 빙수를 먹어 왔지만, 빙수는 뭐니 뭐니 해도 팥빙수가 제격이다. 대체 과일 빙수라는 음식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맨숭맨숭하고 밋밋한 것은 빙수라는 이름을 달기에 부끄러울 뿐이다.

제대로 된 빙수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잘 갈린 얼음이다. 어떤게 잘 갈린 얼음이냐고? '맛의 달인'을 보면 일본 화과자의 이상은 바로 감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빙수에 들어가는 얼음의 이상은 함박눈이다. 눈이 되기 직전의 상태로 곱게 갈린 얼음이 바로 빙수의 이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 지방에서 빙수를 부를 때 빙설(氷雪)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빙수의 원형에 충실한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위 패스트푸드 전문점에서 파는 빙수들은 저 먼 아랫길을 면치 못한다. 거칠대로 거친 빙질 때문이다. 패스투푸드점의 빙수기들은 얼음을 깎아 눈을 만드는 삭빙(削氷) 의 형태가 아니라, 얼음을 부숴 가루로 만드는 쇄빙(碎氷) 의 형태다. 이렇게 만든 빙수는 사시미에 비교하자면 언 고기를 그대로 썰어 회를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팥이 중요한 재료라 해도 얼음 반 팥 반인 상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요즘은 어느 집이나 공장에서 나온 빙수용 팥 잼을 쓰기 때문에 팥 맛의 차별성은 없어졌다. 예전에는 팥의 단 맛이 부족할 때 연유로 보강하곤 했지만 요즘은 그냥 우유를 넣는 것이 보통이다. 우유는 초반 얼음이 녹기 전, 윤활제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해낸다.

그러나 빙수가 발달하며 아이스커피가 최고의 윤활제로 각광받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빙수는 이렇다. 잡다한 과일 칵테일이며 콘 플레이크 등은 일단 뺀다. 잘 갈린 얼음에 팥을 올리고 그릇 가장자리를 따라 아무것도 넣지 않은 차가운 커피를 슬쩍슬쩍 붓는다. 팥 위에 아이스크림을 작게 얹고, 아이스크림 대신 우유나 연유를 조금 흘려 두는 것도 좋다. 그 밖에 과일 등을 얹는 것은 맛 보다는 색깔을 맞추기 위한 것이므로, 칵테일 통조림보다는 생과일이 좋다. 하지만 과일을 먹자는 것인지, 얼음을 먹자는 것인지 주객이 전도되면 곤란하다.

최근엔 녹차 빙수라는 것도 여기저기 있지만 사실상 녹차(혹은 녹차 아이스크림)가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가 빙수의 맛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커피와 얼음의 조화 때문에 커피 빙수라는 것도 등장했다. 그러나 팥이 들어간 상태에서 커피를 추가하는 것은 훌륭한 맛을 내지만, 오직 커피와 과일, 흑설탕 등속으로만 맛을 낸 것은 역시 맛의 불균형이 두드러져 별 매력이 없다. 아, 물론 예외도 있다.

최근 먹어본 한 커피 빙수는 얼음을 갈아 어찌어찌 한 것이 아니라, 아이스커피를 얼려 통 얼음을 만든 다음, 그걸 갈아서 빙수를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초코 시럽과 소프트 아이스크림(우유는 이미 아이스커피에 충분히 들어간 상태였다)을 얹은 빙수 맛은 제법 일품이라 부를 만 했다. 역시 맛의 길에는 정도가 없다. 大道無門! (끝)




어린 시절엔 누구나 이렇게 하늘에서 내린 눈을 먹어 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물론 중국에서 핵실험을 한다는 소문 뒤에는 절대 못 먹게 하시는 부모님들이 꽤 많아졌죠^^). 그 맛을 어떻게든 되살려 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노력이 바로 오늘날, 빙수라는 음식으로 나타나게 됐다는게 제 의견입니다.

수많은 패스트푸드점이나 군소 제과점 빙수가 신통치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팥도 팥이지만 얼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드드득거리며 얼음을 잘게 부수는 기계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양질의 눈 같은 삭빙을 사용하는 빙수전문점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유명한 현대백화점의 밀탑 계열이 모두 그렇고, 제가 요즘 최고로 치고 있는 C4의 빙수가 그렇죠. 그밖에도 유명 호텔 가운데에는 눈꽃같은 얼음을 쓰는 곳들이 꽤 많습니다.

기계도 아직 팔고 있더군요. 26만원인가 합니다. http://www.dxmall.co.kr/



왕년에 많이 보던 기곕니다.^^ 이 기계를 전동식으로 개조한 기계도 해외에서 검색됩니다. 의외로 싸더군요. 200달러대?



딱 정해진 이름은 없고, 미국에서도 그냥 snow ice machine, 혹은 ice shaving machine이라고 쓰이는 듯 합니다. 뭐 이름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하지만, 어쨌든 얼음을 곱게 갈아서 뭉친 눈 같은 얼음 디저트를 먹는 건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뭐 서양에선 이런게 보통이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팥과 우유, 얼음의 조화가 얼마나 환상적인지 이미 일찍부터 꿰뚫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일본 중 어느 쪽에서 팥빙수의 원형이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재 널리 퍼져 있는 건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과일빙수'라고 불리는 빙수 가운데 심지어 팥이 전혀 들어가지 않고, 과일과 얼음만 들어간 것도 있다는 사실이 매우 끔찍하게 여겨집니다. 대체 그런 것을 어떻게 빙수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설레설레)



상해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초대형 팥빙수입니다. 만든 공력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잘 모르지만 일본에서도 어쩐지 관서지역이 관동지역보다 빙수에 대한 열정이 훨씬 대단하다는 느낌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조형미까지 강조한 느낌의 빙수가 흔히 보입니다.




제가 요즘 사랑하는 C4(압구정 미성아파트 건너편)의 밀크티 빙수. 실날같은 얼음에 달달한 밀크티를 붓고, 팥은 따로 내 옵니다. 팥의 당도가 약한 반면 얼음에 가미된 밀크티+연유의 당도가 높아 균형이 맞춰집니다. 얼음이라기보다는 눈으로 뭉친 솜사탕 같은 맛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좀 수정이 필요합니다. C4는 2011년 이후 하향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릇도 작아졌고, 가격은 크게 올랐고, 만드는 공덕도 예전같지 않습니다. 빙질은 여전히 좋지만, 권할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최근에는 빙수의 변형 음료(?)들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소 거친 얼음을 우유, 팥과 함께 갈아 굵은 빨대로 빨아 마실 수 있게 한 레드 빈 슬러시 (레드 빈 프라푸치노라는 이름도 본 듯 합니다) 같은 경우는 빙수의 약점인 휴대성을 해결한 훌륭한 상품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맛의 세계에는 제한이나 고집이 있어선 안됩니다. 한번 최고의 맛집이었다고 해서 변화나 발전 없이 그대로만 머물러 있어선 곤란하겠죠. 빙수의 세계에서는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맛이 등장할지 기대됩니다.


P.S. 조선호텔 컴파스로즈의 빙수. 재료며 우유를 섞어 직접 얼린 듯한 얼음이며, 역시 직접 만든 팥이며 흠잡을 데 없는 명품이지만 재료에 비해 얼음의 양이 너무 적었다는게 약간의 아쉬움입니다. (참고로 저는 얼음만 리필해달라고 했습니다.^) 맛은 보장할만 하지만 가격은 후덜덜.^^

아예 삭빙기를 하나 사 버릴까 생각중입니다. 전동형도 300달러 이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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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상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원빈의 '아저씨' 상영관에는 거의 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만치 관객들의 기대가 컸다는 얘기였을 겁니다.

영화를 보고 난 첫번째 느낌은 '대체 한국영화계는 그동안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고 뭘 했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나가 작품상을 받을 영화가 아닙니다. 요리로 치자면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대단한 명품 음식이 아니지만, 싸고 맛있는 떡볶이 같은 영화입니다.

무슨 대단한 상상력이나 엄청난 기술의 힘, 혹은 거액의 제작비가 필요한 작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를 등한히했던 영화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특히 꽃미남 배우의 제대로 된 활용이란 면에서도 이 영화는 동료 감독들에게 귀감이 될만 합니다.



달동네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는 태식(원빈, 이름은 한참 나중에 나옵니다)의 유일한 친구는 매일 혼자서 노는 소미(김새론). 나이트클럽 댄서로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녀입니다.

하지만 마약중독자인 엄마가 섣부른 욕심을 내는 바람에 엄마와 소미는 거대한 마약 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직간 암투에 뛰어든 경찰은 소미의 운명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상황. 이제 소미를 구할 수 있는 건 '옆집 아저씨' 하나 뿐입니다. 여기까지가 줄거리.

소미에게 다행인 건, 이 옆집 아저씨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설정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한 소녀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킬러의 이야기 '레옹'과,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온 프랑스의 인신매매 조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테이큰'으로부터 태어난 자손입니다(뭐 '맨 온 파이어'를 살짝 덮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대개 이런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특수부대원에 대한 판타지입니다. 80년대 한국에도 '사형집행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던 돈 펜들턴의 펄프 픽션 'Executioner' 시리즈는 아마도 이런 판타지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이 소설은 월남전 그린베레 출신인 맥 보란이 스스로 '1인 군대'를 선언하고 여동생을 망친 마피아에게 단신으로 복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바로 이런 판타지에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 '사법 제도에 대한 현대인의 불안과 불만', '여자나 어린이에 대한 보호'와 같이 국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잘 섞어 폭발력 강한 혼합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원칙에 민감한 법조계 관련 인사들은 법 질서에 근거하지 않은, 사사로운 정의 실현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이 영화의 주제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일반인들로서는 영화 속 원빈이 악당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보면서 동정심보다는 쾌감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는 '다크 나이트'같은 속터지는 영웅 이야기보다 이런 영화를 100배 정도 선호하는 유전자가 계승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재료만 좋다고 바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만 이정범 감독의 세심한 솜씨는 곳곳에서 반짝입니다. 특히 칭찬하고 싶은 것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좋은 배우들입니다.

악당 형제 역의 김희원과 김성오, 믿음직한 수사관 역의 김태훈(김태우의 동생이죠), 그리고 낯설지만 적역에 들어간 태국 배우 타나용 웡트라쿨까지 다양한 조역 배우들이 최상의 연기를 펼칩니다. 연기 못하는 아역 배우란 원래 존재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김새론은 참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런 인물 배치는 현역 최고의 꽃미남 스타인 원빈이 케이크 꼭대기의 체리 역할을 유감없이 해낼 수 있게 하는 탄탄한 팀워크를 만들어 줍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원빈은 정확한 타깃 역할만 하면 되는 구성입니다. 그에게 미드필드까지 내려와 패스를 받아 골문까지 드리블을 하거나 상대 수비를 유인하는 일, 혹은 수비에 가담하는 일 따위를 맡기지 않고 오직 골을 넣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 대목에서 이정범 감독의 용병술은 빛을 발한다고 하겠습니다. 

원빈의 연기력을 논하기에는 대사가 너무 적기도 하지만(녹음 때문인지, 발음 때문인지 중요한 대사가 그리 잘 들리지 않는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리한 요구 없이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게 한 것이 좋았다는 얘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원빈은 지금까지 나왔던 어떤 작품의 원빈보다 멋집니다. 역시 아무리 명품이라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법입니다. 이정범 감독과 만난 건 원빈의 행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저씨'는 정당하게 느껴지는 폭력(물론 실제로 정당한 것과는 큰 거리가 있죠)과 적절한 유머("나, 옆집 아저씨야" "중문과, 너 오늘 알바비 날렸다" 등등), 속도감 넘치는 구성과 아동 대상 폭력에 대한 공분이 무르익은 사회 분위기에 맞물려 불만 붙이면 바로 터질 수 있는 폭탄같은 영화로 태어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판타지 스타일의 마무리였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지만, 오히려 여성층은 현재의 결말에 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걸 보면 이 영화의 흥행에는 아무 걱정이 없을 듯 합니다.

분명 '아저씨'는 한국 영화사에 획을 그을 걸작형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영화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장인 이정범'의 발견이란 면에서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을 듯 합니다.



P.S. 특수부대원 판타지와 관련: '람보' 시리즈 1편 '퍼스트 블러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트라우트먼대령이 람보를 뒤쫓는 경찰들에게 람보가 얼마나 시골 경찰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공할 존재인지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아저씨'에서도 국정원 직원들이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설명을 하다 만 듯한 느낌이라 좀 아쉬웠습니다. (혹 다 찍어 놓고 편집에서 삭제된 것이 아닐지...)


P.S.2. 이렇게 시작된 '아저씨'의 속편은 혹시 특수부대원 '아저씨'가 특수 업무 수행을 위해 투입되는 시리즈로 이어지게...되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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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대로 인셉션에 대한 세번째 글입니다. 첫번째 글은 그냥 전반적인 '인셉션 많이 보기 캠페인', 그리고 두번째 글이 '인셉션,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에 대한 집중 설명'이거나 '겉으로 안 보이는 인셉션의 속살'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세번째는 인셉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이름 속에 감춰진 상징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사실 이 이름짓기의 원조도 역시 매트릭스라고 할 수 있겠죠. 주인공의 이름을 one의 배치를 바꾼 neo로 짓는다거나,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대장의 이름을 모피어스라고 지은 것이나... 여기에 비할 때 가장 선명하게 의미가 오는 '인셉션'의 캐릭터는 바로 아리아드네입니다.


<<<이번 글 역시 스포일러 가득입니다. 영화 안 보신 분들은 보고 오세요. 그게 아니고 영화 속 의문에 대한 해설이 필요한 분은 바로 아래 링크로 가시기 바랍니다. >>

 

 


그리스 신화에 조금만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 속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의 연인이었던 아리아드네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는 건 매우 간단한 일일 겁니다. '인셉션'의 코브는 아리아드네를 보자 마자 미로를 그려 보라고 하죠.


신화 속의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 덕분에 미로를 빠져나오게 됩니다. 미노스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기 위해 테세우스는 제물을 가장해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데,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실꾸리를 가지고 들어가 길을 잃지 않고 미노타우르스를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이들의 관계는 해피엔딩이 아니죠. 신화에도 스포일러가 있다는 세상이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아무튼 아래 그림, 낙소스 섬에 버려지는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그 다음 눈길을 끄는 건 임스입니다. 임스의 스펠링은 Eames. 바로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임스 체어의 임스입니다. 건축가와 가구 설계자로서 전 세계적으로 '공간의 마술사'라는 호평을 받았던 찰스 임스와 레이 임스 부부를 가리키죠.

흔히 의자 만드는 사람들로만 알고 계신 분도 있었겠지만 아래 사진이 이분들이 만든 임스 하우스라는 건물입니다.




인셉션이라는 영화의 특성상, 건축과 공간의 대가에게 오마쥬의 뜻으로 이름을 따 오는 건 그리 희한한 일이 아닐 겁니다. 아무래도 이 임스는 그 임스에서 따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놀란이 이 캐릭터의 이름을 따 오고 싶었던 대상은 아마도 따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 주에 중앙일보 '분수대'에 썼던 글을 잠시 갖고 오겠습니다.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SF영화 ‘인셉션’은 흔히 1999년작 ‘매트릭스’와 비교된다. ‘매트릭스’가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은 가짜’라는 메시지와 충격적인 영상으로 전 세계 영화 팬들을 흥분시켰다면 ‘인셉션’은 자유자재로 타인의 꿈속에 침투하며 그 내용을 지배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언뜻 듣기엔 매우 획기적인 내용 같지만 관객들은 대부분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인다. 왜 그럴까. 사실은 인류가 몇천 년 전부터 이미 익숙해져 있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꿈속의 수십 년이 현실에선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영화 속 아이디어는 이미 『삼국유사』의 조신지몽(調信之夢) 설화에 등장한다. 신라 승려 조신은 태수의 딸에게 반해 매일 그녀와 맺어지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고, 슬피 울던 조신에게 어느 날 밤 그녀가 찾아와 “함께 달아나자”고 한다. 그 뒤로 두 사람은 50년을 살았지만 결국 가난을 이기지 못해 헤어졌다. 그리고 조신이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50년 세월이 고작 하룻밤의 꿈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의 꿈속에서 모습을 바꿔 활약하는 이야기도 그리스 신화에서 엿볼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따르면 바람의 신의 딸 알키오네는 항해 나간 남편이 익사한 줄도 모른 채 매일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이를 보다 못한 헤라는 꿈의 신 몰피우스를 시켜 사실을 알려 주게 했다. 알키오네의 꿈속에 들어간 몰피우스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익사한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 그의 죽음을 알렸고 잠에서 깬 알키오네는 남편을 따르기 위해 자결한다.

이렇듯 고대에는 꿈의 지배가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다면 현대에는 프로이트의 후계자들이 그 권능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 28일자 뉴욕 타임스는 ‘대본을 따라 악몽에서 탈출하기(Following a Script to Escape a Nightmare)’라는 기사를 통해 최근 미국 정신의학계에서 꿈의 변환을 이용해 성폭행 피해자나 참전 용사들을 치료하는 기법이 각광받고 있다고 전했다. 악몽을 좋은 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 환자가 꿀 꿈의 구체적인 내용을 미리 정하는 것도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셉션’은 무당이 하던 일을 과학자들이 하게 된 지금, 과연 인간은 더 행복해진 것인지를 묻는 영화로도 읽힌다. (끝)



가운데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영화 속 임스의 역할을 연상시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으로도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기능을 생각하면 아마도 임스의 이름은 몰피우스로 지어졌다면 딱 떨어졌겠죠. 하지만 불행히도 몰피우스라는 이름은 '매트릭스'에서 이미 사용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놀런 감독은 아예 방향을 틀어 임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다음은 한 팀입니다. 피셔, 아서, 유수프는 하나로 엮을 수 있습니다. 바로 '성배'라는 상징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아서 왕과 성배의 관련은 새삼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죠. 원탁의 기사들에게 최대의 목표는 성배를 발견하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성배의 위치를 발견하는데 이르기까지 꿈을 통한 암시와 상징은 매우 중요한 단서로 간주됐습니다.

아서 왕 전설에 방계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어부 왕, 피셔 킹입니다. 물론 영화 속의 피셔는 Fisher가 아니라 Fischer지만 독일어의 fischer는 영어의 fisher와 같은 뜻, 바로 어부라는 뜻입니다.



어부 왕은 아서 왕 전설에 한때 성배를 수호했던 왕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성배와 원탁의 기사 전설은 여러가지 방계 전설들로 둘러싸여 매우 혼란스럽지만, 그중 정설로 여겨지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원탁의 기사 중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랜슬로트가 어부 왕의 성을 찾아갔을 때, 어부 왕은 성스러운 창에 찔린 상처로 병석에 누워(!) 아들과 함께(!)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랜슬로트가 신비로운 힘으로 어부 왕을 치유하고(위 그림은 어부 왕의 치유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이 왕은 자신의 딸 일레인을 랜슬로트와 동침시켜 성배를 찾을 능력을 가진 성스러운 기사 갈라해드를 태어나게 합니다.

영국 밖으로 나가면 이 전설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바그너의 '파르지팔'에서는 이 상처입은 어부 왕이 암포르타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다른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로엔그린은 또 이 파르지팔의 아들이라는 설정입니다. 물론 이 파르지팔은 원탁의 기사 중 하나인 퍼시벌의 독일식 발음이죠.

아무튼 병석에 누워 성을 지키는 피셔 킹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들이 지키는 비밀에 접근하는 아서, 이런 설정은 왠지 '인셉션'과 겹쳐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럼 유수프는 뭐냐구요? 아, 유수프는 성경에 나오는 요셉(즉 영어식으로 조셉)을 아랍식으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이 유수프라는 이름이 바이블 앞부분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 요셉(꿈으로 자신이 선지자임을 깨닫죠)에서 따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런 피셔 킹의 등장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아리마대의 요셉 Joseph of Arimathea 이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아리마대의 요셉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피를 성배에 받아, 그 성배를 유럽으로 가져왔다는 인물이죠(위 그림). 비밀의 운반자라는 의미에서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그럼 남는 것은 코브와 사이토입니다. 일단 코브라는 이름은 놀런 감독이 전에도 한번 써 본 적이 있습니다. 1998년작 'Following'이란 작품이었죠. 저도 보지 못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Cobb라는 인물의 직업도 도둑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이토라는 인물은 당최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선 워낙 흔한 성이라서..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 Eames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해석의 여지도 있습니다. 혹시 등장인물 모두가 건축가 이름에서 따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이것도 꽤 유력합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집단 가운데 Pei Cobb Freed & Partners라는 회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는 루브르 박물관의 리모델링으로 대단히 유명합니다. Cobb이란 이름은 이 멤버 가운데 Henry Cobb라는 건축가에서 따 온 것이죠.

이 길로 가면 사실 더 쉬워질 수도 있습니다. 빈의 쉔브룬 궁을 설계한 사람은 요한 베르나르트 피셔 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 라는 건축가이고, 유수프라는 이름도 카이로의 살라딘 성을 건축한 그리스 출신의 건축가 유수프 부쉬나크 Yusuf Bushnaq 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도 Saito Kazuya라는 건축가가 있다고 구글이 가르쳐 주는데,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아서나 사이토는 사실 흔한 이름과 성인 만큼 어떤 직업에서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건축가 이름 집단이라는 게 더 간단해 보이지만, 성배 전설과 관련된 짜깁기도 꽤 매력적이란 느낌이 듭니다.^^ 아무튼 뭐든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뭐 어차피 영화 '인셉션'은 놀런 감독의 꿈이고, 그 꿈 속에서는 뭐든 그분 마음대로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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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 '강심장'의 4일 방송에는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특집이라는 부제가 붙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MC인 이승기가 주인공을 맡고, SBS의 하반기 기대작인 드라마였으니 '강심장'을 통해 한번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 보자는 작전이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자사 프로그램을 내놓고 홍보하는 것이 약간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정규 뉴스를 통해서도 직접 홍보를 하는 등 그동안 방송사들이 보여준 모습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크게 문제될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다 보니 이건 드라마 홍보를 넘어 서서 너무 낯뜨거운 장면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과연 드라마 한 편을 넘어서서 주인공 한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올인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TV를 보다 보다 이렇게 '나머지 출연자들'이 불쌍해 보이는 방송은 처음이었습니다.


작년 10월말에 방송 한달째인 '강심장'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심장'이 초반에 보여준 '20여명 게스트'의 본질은 이미 드러났습니다. 말하자면 '뒷줄'의 고정(혹은 반 고정) 게스트들은 '앞줄'에 앉은 진짜 게스트들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가질 뿐, 토크쇼의 게스트로서 결코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케이크의 포장 상자일 뿐이죠. 그 고정(반 고정) 게스트 가운데서도 '붐 아카데미'라는 식으로 자력 구제에 나선 팀도 있지만 어쨌든 그 역할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4일 방송된 '강심장'의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편은 이런 '뒷줄의 병풍화'의 극단적인 형태였습니다. MC인 이승기를 비롯해 신민아, 노민우, 박수진 등 이 드라마 출연진들을 중심으로 한 토크쇼라고 포장되긴 했지만 사실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신민아 하나 정도였죠.



강호동의 최대 장기인 '우격다짐식 관계 만들기'가 빛을 발했다고나 할까요. 처음에는 이승기-신민아의 관계 엮기, 그리고 중간에는 신민아를 10년간 팬으로 사랑했다는 임슬옹의 고백, 그리고 나서 마지막엔 다시 이승기와 신민아를 엮어 띄워주기가 이날의 주제였습니다. 다시 말해 두 MC와 나머지 게스트들이 이승기와 신민아를, 더 좁혀 보면 신민아 한 사람을 띄워 주기 위해 쇼 한편을 들어다 바친 형국이 됐습니다.



과연 신민아가 그런 여신 대접을 받을만한 스타인지, 혹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영화제 수상작이나 히트작을 만들어낸 배우인지 하는 것은 2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신민아가 출연한 '강심장'은 20%를 넘는 시청률 대박을 터뜨렸습니다(물론 이건 같은 시간대에 방송된 KBS 2TV '승승장구'가 사실상 경쟁을 포기한 게스트를 출연시켰다는 데에서도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을 듯 합니다만). 이 시청률로 볼 때 SBS로서는 '시청자가 원하는 방송이었는데 뭐가 문제냐'고 항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날 방송은 예능으로서의 오락성 이전에 뭔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벗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과연 맨 앞줄 한 가운데의 신민아를 제외한 나머지 출연진 - 심지어 이승기 신민아와 함께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 나오는 연기자들을 포함해서 - 은 이날 방송에 어떤 이유로 출연한 것일까요. 강호동이 신민아에게 던지는 칭찬에 탄성을 터뜨리기 위해 나온 것이었을까요?

'특별 게스트'를 위해 '예능 스타'들을 경시하는 풍조는 다양한 부작용과 잡음을 낳고 있습니다. '강심장' 출연 거부 때문에 '인기가요' 출연이 무산됐다는 이하늘의 주장은 좀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최근에는 김C가 '김정은의 초콜렛'에 나온 김연아를 보고 한마디 불평을 했더군요. 이런 내용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김연아가 1년 내내 음악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번 나오는 김연아에게 노래 3곡 정도 부르게 해 준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정은의 초콜릿'이 고품격 라이브 프로그램을 지향한다면, 진짜 가수들을 뒤로 제끼고 아마추어인 김연아를 너무 내세운 것도 그리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오랜만의 예능 나들이'를 한 신민아에게 열띤 지지를 보낸 시청자들, 그리고 그 게스트를 위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올인한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을 보면, 한국 연예계의 오랜 수수께끼가 풀릴 것 같은 느낌도 갖게 됩니다. '어떻게 별다른 히트작도 없이 CF만으로 톱스타의 자리에 군림할 수 있는 배우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같은 수수께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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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해피션데이'의 '1박2일'이 상당한 모헙을 치렀습니다. 70-80분 정도 되는 프로그램 한회 내내 고비에 이를 때마다 치르던 복불복을 시작할 때 모두 끝내 놓고 1박2일 일정을 진행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박2일' 멤버들은 복불복 없이도 웃길 수 있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보여 준 셈입니다. 특히 복불복 말고는 별로 한 게 없는 서해안 무계획 여행 첫회에서 하이라이트는 빈 시골 정류장에서의 라면 끓여먹기였습니다.

저녁식사 전인 시청자들은 물론 저녁식사를 마친 사람들도 침이 넘어갈만한 광경이었죠. 여기서 강호동은 국수로 라면을 끓여먹는 것은 물론, 잘게 부순 라면을 죽처럼 만들어 먹는 '라죽'까지 싹싹 긁어 먹는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일단 다양한 옵션을 모두 결정하고 나니 서해안의 한적한 어촌으로 떠나는데 용돈은 단 1만원. 그리고 은지원은 낙오로 결정되고 나머지 멤버들 다섯명이 김종민의 차로 이동하게 됐습니다. 물론 누구 차로 이동하든 운전은 역시 이수근.



한참을 가던 다섯 사람은 주어진 돈 만원을 어떻게 쓸까 하다가 가장 싼 라면을 사서 배 터지게 먹어 보자는 데 의견 일치를 봅니다. 그래서 라면 10개와 계란, 그리고 1천원에 20개짜리 미니 호떡을 사서 먹기 시작합니다.

야외에서 라면을 끓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이들은 나이를 생각하면 별로 먹지 않은 셈입니다. 물론 집에서 라면을 끓여 드시는 분들에게 라면 2봉지는 대단히 많은 양입니다. 20대라면 몰라도 30대 후반 이후라면 속이 더부룩해질 양이죠. 그렇게 따지면, 5명이 라면 10개를 나눠 먹는 건 꽤 많은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단순히 생각하면 간과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국물의 문제입니다.




다양하게 라면을 드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아주 덩치가 크지 않은 성인 남자라면 국물 있는 라면 2개를 먹는게 꽤 부담스러운 양입니다. 하지만 비빔면이나 짜장라면은 그렇지 않죠. 어지간한 사람은 1개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2개를 먹는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집에서 혼자 라면 2개를 끓여 먹는 것과, 야외에서 5명이 라면 10개를 끓여 먹는 것과는 심각하게 포만감에서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아마도 코펠의 크기, 김치가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들은 처음에 4개, 나중에 4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2개를 '라죽'으로 끓여 먹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변수가 되는 국물은 평소 집에서 끓여 먹을 때의 절반 이하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더 끓일 때마다 물을 다시 부어 보충했다 해도, 처음부터 10개 분량의 물을 넣은 것에 비하면 훨씬 적은 양일 수밖에 없습니다.




왕년 한국 권투 중량급의 스타였던 박종팔씨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운동을 하니 배는 고픈데 돈이 없으니 만만한 먹을 거라곤 라면밖에 없었다. 후배와 둘이 살면서, 방 안에 버너를 피워 놓고 라면을 끓여 먹는데 둘이 먹기 시작하면, 일단 국물은 계속 끓이고, 국수는 먹으면 또 넣고, 먹으면 또 넣고 하면서 계속 먹었다. 이렇게 먹으면 둘이 10개 먹는 건 금방이었다. 가끔은 밤참으로도 먹고 해서, 라면 100개짜리 한 상자를 사면 1주일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작은 솥(또는 코펠)으로 라면을 끓이면 같은 원리로 평소의 양보다 훨씬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날 '1박2일'에서 강호동이 라면 6봉지를 먹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다른 멤버들이 자기가 먹었다고 생각하는 양 보다는 훨씬 많이 먹었을 겁니다. 국물을 덜 먹으면 그만치 포만감을 덜 느낀다는 걸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호동이 많이 먹는다지만, 전체 양의 60%를 먹었을 거라고는 좀...^^

(뭐 성석제의 단편 '대식'에는 고기 약 30인분을 먹어치우는 고등학생 씨름선수 얘기도 나옵니다만^^ 강호동이 현역 선수도 아니고, 그렇게까진 무리겠죠.)


게다가 한창 때인 남자 5명이 라면 8개를 끓여 나눠 먹고 다들 그만 먹겠다고 포기하는 건, 아무래도 연예인이다 보니 몸 관리를 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반인들이라면 훨씬 더 쉽게 더 많이 먹었을 게 분명합니다.^




뭐 검증을 하거나 하기는 힘든 얘기고,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비오는 날 라면 끓이먹는 광경은 강렬한 라면 소비욕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 '1박2일' 팀은 웬만한 라면 광고의 몇 배나 되는 효과를 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쓰다 보니 또 침이 굅니다. 점심엔 어디 김치찌개 집이나 가서 사리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지적질 하나.



P.S. 지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이죠. 대청봉은 설악산의 최고봉입니다. 현장에 있던 강호동이야 잠시 실수로 그렇게 말했을 수 있지만, 자막까지 만들어 넣은 제작진이 이런 실수를 하는 건 곤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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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한국에 온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던 무렵, 저 바다 건너 나라에서 치러진다는 다양한 락 페스티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한 폭의 상상도를 그려보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글래스톤베리며 후지 락 같은 이름들을 듣게 됐을 때에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꽤 듣게 됐습니다. '냄새나고, 진창에다, 덥고 더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은 계속 커졌고, 언제 한번 그런 곳에 가서 뒹굴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록 페스티발이 열리는 시대가 왔습니다. 바로 1999년,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발'이란 이름이었죠. 하지만 첫 만남은 너무나 혹독했습니다.


비가 며칠씩 쏟아지는 가운데 송도 갯벌에 세워진 무대와 주변 공간은 거대한 진창으로 변했습니다. 공연은 좋았지만 새로 산 신발 한 켤레가 재기불능이 되어 그냥 버려야 했고, 주차해 놓은 차가 물에 빠져 레커차를 불렀습니다. 비를 맞으며 진창 속에 서 있자니 극기훈련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 걸 즐길 나이는 어느새 지나가버렸나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 후로 오랫동안, 아예 록 페스티발이라는 말을 잊고 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디 가서 잘 놀고 왔다는 얘기를 해도 '너희들 아직 젊구나'라며 웃어넘겼죠. 그러다 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31일 지산 락 페스티발을 통해 다시 한번 도전해 보기로 한 거죠.


지산리조트에서 열리는 지산 락페에는 3개의 무대가 설치됐습니다. 그중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빅 탑 스테이지. 31일에는 오후 5시30분에 장기하와 얼굴들, 7시에 언니네 이발관, 그리고 9시에 왕년의 형님들인 펫 샵 보이즈가 공연하는 라인업이 짜여져 있었습니다. 다른 무대에서 열리는 6시30분의 크래쉬도 있었습니다.

한낮의 땡볕은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어 오후 일찍 경부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빅탑 스테이지 앞의 드넓은 잔디밭이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더군요. 본래 잔디밭은 텐트를 위한 공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몇개의 텐트가 진출해 있었고, 낚시 의자를 동원한 '선수'들도 몇몇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대세는 돗자리.



네. 지산 락페의 문화는 바로 돗자리의 문화였습니다. 공연은 당연히 서서 보고, 아무데서나 땅에서 뒹구는 저 서양식 락페와는 달리 한국의 락 페스티발은 돗자리와 선크림이 함께 하는 문화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락 페스티발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여초 공간이었다는 점. 수만 많았던 건 아닙니다. 조금만 뻥을 보태면 온 나라의 미인들은 다 와 있는 듯 했습니다.



도착하고 현지 적응을 마치고... 시원한 맥주로 일단 몸을 헹구고 나니 뜨거운 날씨도 한결 견딜만 해졌습니다. 이내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연이 시작됐고, 어디 한번 뛰어 볼까....

역시 뛰니까 덥더군요. 장기하의 고동색 티셔츠가 30분만에 검정색으로 변할 정도로 날씨는 무더웠습니다. 공연 중간 지나가는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 해서 반가워했는데 알고 보니 사방에서 쏘아올리는 물총.^^ 사방에서 뿜어나오는 사람들의 열기로 갑갑한 공간에서 이 물총 놀이는 매우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락 페스티발의 다른 이름은 자유입니다. 풀타임 공연을 다 미친듯이 '달릴' 수도, 또는 돗자리와 양산 아래서 누워서 즐길 수도 있는 거죠. 각자의 체력과 취향에 따라 즐기는 문화가 성숙해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화장실(특히 여자 화장실)은 갈 때마다 장사진이었고, 먹거리며 마실거리를 사는 줄도 항상 길더군요. 그렇지만 짜증 내는 사람은 볼 수 없었습니다. 서울의 시간에 비해 모든 시간이 천천히 진행됐습니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줄을 서고, 누워서 음악을 듣다가 흥이 나면 무대 앞으로 달려나가기도 하고,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그 자리에 서서 허공에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잔디밭에 누워서 쿵쾅대는 심장을 느끼는 기분.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해보지 못했을 겁니다. 문득 20년 전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네.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해가 지고, 먹고 마시는 사이 언니네 이발관이 무대에 오르고, 노래를 들으며 또 먹고 마시고, 언니네 이발관의 강렬해진 베이스에 감동하면서 한편으론 언니네가 역시 여성 팬들이 많았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면서, 그렇게 완전히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깜깜해진 뒤, 이날의 헤드라이너인 펫 샵 보이즈의 공연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돗자리를 걷고 무대 앞으로 우루루 몰려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외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백인 여성 두 사람이 맞고를 치고 있는 진푼경도 있었죠^^), 무대 앞쪽으로 가 보니 외국인과 내국인의 비율이 1:2 정도는 될 듯.



사실 공연장에서 이 '외국인'들은 약간 애물이기도 합니다. 액션이 크고 부딪힐 위험이 있고 무엇보다 체취가 좀 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여름철, 그리고 이런 야외에서는.... 하지만 우려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뒤쪽을 외국인들에게 둘러 싸인 형국이 됐습니다.

뭐 이런 것도 공연의 재미라면 재미겠지만 아무튼 이 냄새나는 덩치 큰 형씨들이 땀에 젖은 등을 비벼 오는 건 그리 유쾌한 느낌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로 뒤에 있던 친구는 음료수인지 뭔지가 담긴 작은 통을 들고 뛰다가 계속 제 다리에 액체를 흘리더군요.

도시였다면 싸움이나 언쟁이 오갔겠지만 그래도 여기는 락페. 그냥 잊고 즐기는게 상책입니다. 아무튼 기다림은 지나고 음악이 꽤 사람들을 달궜을 무렵, 마침내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강렬한 비트의 신스 팝이 관중들을 들뜨게 하고 30분 남짓, 첫번째 절정은 알려질대로 알려진 히트곡 'Go West'에서 왔습니다. '오 오 오오 오오오, 오 오 오오 오오오'하는 전주와 함께 관중들은 전부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정해진 춤사위도 없고, 세련되게 추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냥 그저, 다들 제 흥에 겨워서, 전부 색다른 자세로, 하늘을 향해 뛰는 겁니다.


(요긴하게 쓰였던 저 골판지 박스, 공연 내내 쌓았다 허물었다 하다가 끝날때는 관객들에게 던져서 가져 가는 사람도 있었다는... 대체 그걸 가져다 뭐에 쓰시려는지.^^)

밤이라 더위는 훨씬 견딜만 해졌지만 사람들의 열기는 몇배나 뜨거워져서, 공연 후반부는 다시 돗자리 모드. 한때 나이트클럽에서 모든 손님들을 무대로 달려나가게 했던 전설의 히트곡 'It's a sin'으로 공연이 마무리되자 사람들은 'Go West'의 전주부를 합창하며 앵콜. 그리고는 'Being Boring'과 'West End Girls'가 흘러나왔습니다.

...정말이지 스물 몇살때였다면 집 같은 건 정말 가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평생 다시 보기 힘들 형님들의 공연을 귀가 문제 때문에 맨정신으로 봐야 했다는 게 정말이지 안타까웠습니다.ㅠㅠ)


비록 귀가 때 주차장 연결 버스의 수가 너무 적어 1시간 가까이 길에서 기다려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이런 부분은 좀 시정되어야 할 거라고 믿습니다),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공연을 만들어 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됐고,

내년에는 공연이 끝나도 집에 오지 않을 방법을 연구해보게 됐습니다.^^


P.S. 웬만하면 근 10년만에 들어보는 쿨라 셰이커와 서드 아이 블라인드, 그리고 얼마 전 내한공연을 했던 뮤즈의 1일 무대도 찾아 보고 싶었지만, 밥벌이가 유죄라..ㅠㅠ 티켓이 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시간과 여유가 되는 분들은 오후에 고속도로를 달려 보시기 바랍니다.

P.S.2. 주변에 같이 갈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시는 분들, 지금부터 내년을 위해 친구를 잘 사귀어 보시기 바랍니다. 1년, 금세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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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화제가 될 만큼 된 2010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제리'를 읽었습니다.

김혜나의 '제리'는 알려진대로 소위 '루저'라고 불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그린 작품입니다. 굳이 88만원 세대라는, 이제는 진부할대로 진부해진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의 절망과 고민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합니다.

진학 대상인 고3보다 전국의 대학급 학교 정원이 더 많아진 세상, 그리고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분위기가 점점 더 일자리를 빼앗고 있는 세상은 반드시 뒤처지는 사람을 낳기 마련입니다. 물론 흔히 말하는 취업난의 현장에 좀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늘 신문에 보도되는 것과는 다른 측면도 있다고 말하긴 합니다.



한 지인의 말에 따르면 "현재 강조되고 있는 취업난이란 과장된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자리가 없느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취업 희망자의 절대 다수가 대기업이나 은행 등 '초봉 3000만원 이상' 직종에 연연하거나 공무원, 공사처럼 안정된 자리를 원하기 때문에 경쟁에 비해 일자리가 없다는 면이 너무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현재 취업 실패로 좌절과 혼란을 겪고 있는 연령층이 좀 넓은 시야에서 냉정하게 판단하면 일자리는 어디에든 있다는 주장입니다.

뭐 이런 주장에 공감하실 분도, 그렇지 않은 분도 있겠지만 어쨌든 현재의 상황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좌절감을 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세상에는 대학이나 대기업 취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까지 '학번'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사용되는 것은 분명 그쪽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을 멀리 밀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김혜나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대학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정말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거든요. 저처럼 스무 살에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쨌거나 이 사회 안에서 다양한 일들을 하게 마련이니까요. 클럽이나 바는 물론 백화점, 레스토랑, 호프집, 노래방, 단란주점, 그리고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연극이나 미술, 음악, 미용, 제빵, 정비 등을 배우려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모두 다 저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죠.

'제리'의 주인공 '나'는 수도권의 2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긴 하지만 학교 수업이며 장래에 대해선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는 여학생입니다. 그런 '나'가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간 노래바(노래방+호스트바의 성격인 듯 합니다. 시간당 3만원을 내면 호스트 개념의 놀이 상대 남자를 부를 수 있는 곳입니다)에서 제리라는 이름의 스무살 안팎 청년을 만납니다. 그 '나'와 제리의 아주 짧은 만남에 대한 기록이 이 소설입니다.



이 책을 추천한 한 지인은 "세상에서 1등만 했던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책"이라고도 했습니다. 솔직히 읽다 보면 답답한 구석은 너무 많습니다. 특히 '어른'의 눈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스스로는 단 한푼 벌 능력도 없으면서 용돈으로 날마다 술자리를 벌여 놓고 있는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아이들, 남자와 자는 이유도 '그저 새벽 길에 혼자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라는 아이들, 심지어 20대 초반 나이에 술자리 상대를 돈으로 사는 아이들과 스스로를 누군가의 술자리 노리개로 내놓는 아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너희들은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게다가 이 소설에는 '어른'이란 존재는 소거되어 있습니다. '나'의 엄마가 설정되어 있긴 하지만 '나'와 엄마에게는 대화나 소통이란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주치면 불편한 사이일 뿐입니다. 유일하게 의미있게 등장하는 어른은 '나'와 남자친구 강이 자주 가는 모텔 주인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하는 일은 주인공들이 뭘 하건 관심을 갖지 않고 돈을 받아 챙겨 방 열쇠를 내주는 것 뿐입니다. (네. 이 부분에서 작가가 보는 어른들이란 '입만 열면 늘 혀를 차지만 돈벌이 대상이기만 하면 도덕이고 뭐고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만 얽매여 있으면 이 책이 그려내고 있는 세상을 제대로 보기 힘듭니다. 영상에 비유하자면 이 책의 시선은 거의 지면에 붙어 있습니다.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청춘의 불안과 고민, 가족보다 친구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묘한 공허감, 그리고 그런 공허를 채울 만한 대상을 찾지 못할 수록 더욱 깊어가는 고민이라는 악순환이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심한' 주인공 '나'와 마찬가지로 한심한 호스트 제리는 그 절망의 끝에서 만나지만 그걸로 끝나지는 않는다는데서 이 소설이 그런 '바닥의 젊음'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을 다 읽은 다음 첫번째 소감은 '아니, 시작하려니까 바로 끝이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만치 한 호흡에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이 소설은 주인공들의 먼 장래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소설이 커버하는 시간은 끽해야 몇달 정도. 그리고 이 한편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습니다. 혹자의 표현을 빌면 '간신히 한 계단 올라서는' 정도라고도 하죠.

아무튼 이 책을 읽기 위해 '88만원 세대를 이해한다'는 거창한 명분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든 책 내용 속에서 언젠가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있고, 그들의 운명에 가슴 졸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 솜씨가 훌륭합니다.

여러 서평은 이 책의 '노골적이고 드라이한 성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깜짝 놀랄 정도라거나 흥분되는 대목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그런 걸 원하시는 분들은 아오이 소라에게 가시는게 낫겠죠^^). 물론 그렇다고 어린이/청소년 용 추천도서는 아닙니다.


문득 '제리'를 읽고 나면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키즈 리턴'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이 마지막에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어"라는 이야기를 나누듯, 지지리도 못나고 답답하고 한심한 청춘에게도 빛이 깃드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이 휴가용 서적 추천 1호가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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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면 왕따된다는 영화 '인셉션'. 본 사람도 또 보고 아이맥스로 봐야 진짜배기라고들 소문이 자자한 인셉션. 요즘 단연 장안의 화제입니다.

그런데 결말이 두가지네 어쩌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반지가 어쩌네 저쩌네, 킥과 토템이 어쩌네 저쩌네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한쪽에서는 괜히 화제를 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보다 슬쩍 잠들었다는 분, 너무 복잡해서 정신이 없었다는 분, 대체 뭐가 뭔지 헷갈린다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난 다 봤는데도 당최 먼 소린지를 모르겠다'는 분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단,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절대 읽어선 안 될 포스팅입니다. (아, 드물게 '난 결말을 알고 봐야 영화가 눈에 들어온다'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런 분들은 보셔도 좋습니다.)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무시하고 그냥 읽은 다음에 스포일러 작렬 어쩌고 화내 보셔야 소용없습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의 덩어리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는 분들을 위한 해설입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 설계자는 뭐고 추출은 뭐냐? 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해설: '인셉션'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꿈을 연결하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꿈 속으로 들어가거나 표적이 되는 사람을 자신의 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떤 수단을 쓰든 다른 사람의 꿈 속에서 깊이 감춰진 비밀을 가져오는 것을 추출(extrac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꿈의 설계자(architect)입니다. 이 사람은 때로 독창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꿈 추출의 표적이 되는 사람이 현실로 착각할 수 있도록 그 사람에게 친숙한 공간을 그대로 모사해내기도 합니다. 본래 영화의 앞부분에선 내쉬(루카스 하스)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팀의 설계자이지만, 무능한 배신자로 밝혀지고, 결국 파리에서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가 설계자로 참여하게 됩니다.

그밖에 꿈 속에서 활동하는 캐릭터로는 포인트맨(pointman)과 페이크맨(실제론 forger)이 있습니다. 전투 게임에서 근접전 요원을 말하는 포인트맨은 이 영화에선 꿈과 현실을 출입하며 안전을 관리하는 전술전문가를 말하고, 페이크맨은 꿈의 특징을 활용해 모든 캐릭터로 변신하는 일을 맡습니다.

 

2. 대체 맬은 왜 모든 사람의 꿈에 등장하나?

엄밀히 말하면 맬(마리옹 코티아르)은 별도의 인격이라기보다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머리 속에 박힌 하나의 소인격이라고 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평소에는 활동하지 않지만 코브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 즉시 활성화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무 꿈에나 다 나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코브가 들어가는 꿈에만 등장하는 겁니다. 사실 이 맬의 존재는 '인셉션'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이토의 꿈에 들어갔다게 맬에게 총질까지 당한 아서(조셉 고든 래빗)는 코브와 함께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는 일이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코브와 함께 꿈속 일을 하는 건 자살행위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2세 피셔(킬리앙 머피)의 꿈 속에 들어갈 때 그렇게 무방비상태였다는 건 아서의 무능함을 돋보이게 할 뿐입니다.



3. 왜 한 단계 깊이 들어갈 때마다 팀은 한명씩 남을까?

피셔의 꿈에 들어간 뒤, 꿈1에서 꿈2로 갈 때 유수프(딜립 라오)는 남아서 차량의 운전을 맡습니다. 이건 꿈1의 주인이 유수프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꿈2의 주인은 아서였고, 아서는 꿈3으로 가지 않죠. 이건 그 사람이 남아서 더 깊은 단계로 가는 멤버들의 몸을 돌보고, 적절한 시기에 음악 신호나 킥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뭐 이건 모두 이 영화의 설정입니다. 꿈 3에서 현실로 바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고, 깨어날 때에도 꿈3-꿈2-꿈1-현실의 순서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한 스테이지에는 한 사람씩 남아서 그 과정을 관리해야 합니다.

 

4. 왜 다들 꿈 속에서 천하무적인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인셉션'의 배경이 되는 세상에서는 꿈 추출이 하나의 전문직이 되어 있습니다. 코브와 아서 팀 외에도 기억 추출을 위해 암약하는 무리들이 꽤 있다는 뜻입니다.

꼭 이들이 아니더라도, 이들 전문가들은 꿈 속에서 거의 람보같은 위력을 발휘합니다. 터프해 보이는 무장 경호원들도 이들에게는 1:1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현실세계의 킬러 하나가 코브에게 '어이, 너 현실에서도 꿈속처럼 터프하냐?'고 물어보기도 하죠.)

그건 이들이 꿈 속에서의 활동을 위해 다양한 훈련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꿈 속에서 이들은 사고하는 존재인 반면, 나머지 인물들은 그냥 표적 인물의 무의식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반응할 뿐, 계산하고 전략적으로 움직일 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떨어지는 게임 속의 졸때기들처럼 주인공들의 밥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누구나 꿈속에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곤 하죠.^ 아마 '인셉션 2'가 나온다면 그때는 주인공들이 다 날아다닐 겁니다.


5. 자살신에서 왜 둘은 젊은 얼굴인가? 실수?

아내를 림보에서 데리고 나오기 위해 코브는 아내에게 눈에 보이는 세상을 믿지 말라는 인셉션을 하고, 그렇게 해서 아내와 함께 철길에 누워 죽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다른 장면에서, 아내가 "나와 함께 늙어가겠다고 맹세했잖아!"라고 말하자 코브는 "이미 그렇게 했었다"고 대답합니다. 즉 림보에서 보낸 50년 동안, 그들은 노인이 되어 갔다는 걸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노인이 되어 거리를 걷는 이들의 뒷모습도 나옵니다.

하지만 앞서 나오는, 철길에 누운 자살 장면에서 코브와 아내는 젊은 얼굴 그대로입니다. 이걸 놀런 감독의 실수라고 지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실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랄까, 연출자의 의도라고나 할까요. 그 시점에서 이들의 얼굴을 노인으로 바꿔버리는 건 상당히 김빠지는 일이 됐을 법도 합니다.

영화 속에선 페이크맨 임스(톰 하디)의 얼굴이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 보이는 장난이 여러 번 등장하죠. 한마디로 그 정도는 알아서 이해하라는 것이 놀런의 입장인 듯.


6. 림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인가, 아니면 개인에게 하나씩의 림보가 있나?

사실 매우 혼란스러운 부분입니다. 만약 림보가 공통이라면, 코브와 아내가 림보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림보는 본래 한 사람에게 하나 씩 존재하는 공간이며, 림보에서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꿈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 뿐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코브와 피셔가 연결돼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코브와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가 림보로 내려가 피셔를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하에서 보면, 코브가 "사이토를 찾아서 데려가겠다"며 림보에 남는 설정이 매우 애매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코브는 사이토보다 먼저 림보에 온 것이고(코브와 아리아드네가 림보로 가고 꽤 시간이 지나 사이토는 송풍구에 수류탄도 던지고 하며 나름 활약을 하다가 꿈3 스테이지에서 숨을 거둡니다 - 정확하게 말하면 꿈1에서 죽는 거죠. 어쨌든 코브와 아리아드네보다 늦게 림보로 가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영화의 맨 첫 장면에서 사이토만 노인이 되어 있고 코브는 젊은 채로 있다는게 말이 안 됩니다. 늙어도 코브가 더 늙어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죠.

여기에 대한 해결 방법이 있긴 합니다. 아리아드네와 피셔가 뛰어내리는 킥(자살입니다)으로 꿈3에 돌아간 뒤, 코브도 꿈3으로 복귀했다가 꿈1에서 물에 빠져 죽어서(꿈1의 코브는 물에 빠진 미니버스 안에 안전벨트로 묶여 있죠^^) 다시 림보로 간다는 설정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코브가 한번 빠져나왔다가 다시 림보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코브는 젊고 사이토는 늙어 있다는 것도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이 경우, 코브가 호기있기 "나는 사이토를 찾아 데리고 갈게! 너희는 먼저 가!"라고 한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혹이 남습니다. 너무 길어져서 한번 더 쪼갭니다.




7. 비행 시간의 문제 - 왜 20분만 남아 있나?

주인공들이 비행시간이 10시간이나 되는 LA행 비행기 안을 '범행 장소'로 채택한 것은, 이들이 꿈1 스테이지에서 일주일 정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사이토가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사이토가 림보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는 모든 걸 계획보다 서둘러 진행하게 되죠.

(일반 꿈이라면, 사이토는 꿈 속에서 죽으면 바로 현실로 살아나지만 이들은 10시간 동안 깨지 않게 하기 위해 유수프의 독한 약을 썼기 때문에 꿈1에서 죽으면 림보로 떨어진다는 설정입니다. 이 사실을 안 임스는 "나는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기 싫으니 여기(꿈1)서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코브는 "10시간이면 꿈1에서 1주일인데, 그 사이에 피셔의 경호원들에게 잡혀 죽을게 뻔하다. 차라리 일정을 앞당겨 빠른 시간 안에 일을 끝내고 킥으로 빠져 나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꿈2, 꿈3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고, 결국 꿈 1 기준으로 약 2시간만에 모든 일정을 다 해치워 버립니다. 현실에서는 10분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죠.

무슨 말이냐면, 바로 위 항에서 얘기한대로 코브가 미니버스 안에서 익사 - 그리고 바로 림보로 가서 사이토를 구출하는 과정이었다면 아무리 해 봐야 현실에서는 1시간 이상 지나가기가 힘든 상황이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코브와 사이토가 눈을 떴을 때, 비행기는 LA 도착 20분을 남겨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7-8시간 동안의 공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혼자 추측해 봤습니다. 그 대답은 다음 질문에서 해결합니다.


8. 맨 첫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 장면에서 코브는 의식을 잃은 채 해변에 밀려 옵니다. 영화를 죽 보다 보면 그 해변이 바로 림보에 빠진 사람이 처음 도착하는 망각의 해변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코브는 그 상태에서 사이토의 부하들에게 이끌려(어떤 사람은 림보에서 단 둘만 살고, 어떤 사람은 림보에서도 부하들에게 둘러 싸여 삽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죠) 이미 노인이 되어 있는 사이토에게 끌려 갑니다.

사이토는 코브의 총과 토템을 보고(물론 이것도 영화를 한참 더 봐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죠) 그를 어렴풋이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사이토는 말합니다. "오래 전 꿈에서 본 젊은 남자가 이런 걸 갖고 있었다. 나를 죽이러 온 남자..."


이 말은 코브가 이 전에도 사이토를 죽이러(즉, 죽여서 림보에서 끌어내러) 왔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화 후반에서 사이토가 꿈3에서 죽고, 곧바로 코브가 사이토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현실-림보-현실-림보로 몇 차례에 걸쳐 다시 다이빙을 한 끝에 간신히 사이토에게 도달하고, 그리고서도 실패를 겪은 뒤 겨우 다시 사이토를 만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이렇게 설명하면 위에서 얘기했던, 시간이 한참 비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 안에 이런 설정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지만, '매트릭스2'에서 아키텍트가 네오에게 "네가 처음은 아니다. 네 전에도 다섯명이나 전임자가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의 황당함에 비하면 충분히 납득할 만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은 코브에겐 절박한 거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LA 도착 시간이 20여분 남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신히' 성공을 거둔 코브는 현실에서 한숨을 내쉬는 겁니다.

(그럼 나머지 멤버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뭐 중요하진 않지만 이제는 우호적으로 변한 피셔와 함께 1주일 동안 꿈1에 머물렀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일찍 현실로 빠져나왔는지, 사이토를 구하러 갔다가 사이토에게 죽어 현실로 돌아온 코브가 킥으로 깨워 줬는지... 그거야말로 관객이 알아서 할 부분이라는게 역시 놀런의 입장.^)



9. 그래서 도대체 마지막에 토템은 멈추나, 안 멈추나?

사실 토템이라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구별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대사가 나온 다음부터, 눈치 빠른 분들은 아마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 쯤에 감독이 이 이야기를 써먹을거라는 걸 짐작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사이토를 무사히 구출하고, 수배에서 자유로워진 코브는 마침내 아버지(장인?) 마일스 교수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떤 분들은 마일스가 파리에 있지 않고 미국에 있는게 이 마지막 시퀀스가 꿈이라는 증거라고도 하는데, 이건 놀런의 수준에 비하면 너무 유치한 얘기죠. 그리고 애당초 파리에서 코브는 마일스에게 "아이들에게 나 대신 선물(인형)을 전해 달라"고 합니다.  
 
어쨌든 코브는 집에 도착하고, 밖에 아이들이 보이자 습관적으로 토템을 꺼내 테이블 위에 돌려 놓고 아이들을 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순간이죠. 물론 보인다, 안 보인다가 현실과 꿈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꿈에서 코브가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건 코브가 아이들의 얼굴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죠^^) 스스로 죄책감으로 억압했기 때문이니 말입니다. 그 죄책감은 꿈 속에서 다시 한번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모두 해소했죠.

(이 대목에서 아이들의 모습이 과거와 똑같으므로 이 대목은 꿈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분명히 다릅니다. 특히 여자아이의 옷이 똑같이 핑크 톤의 색이긴 하지만, 디자인이 다릅니다. 꿈속의 필리파는 그냥 원피스를 입고 있지만 마지막 장면의 필리파는 흰 티셔츠 위에 끈 원피스를 입고 있습니다.)

어쨌든 코브가 아이들과의 재회하는 사이에도 토템은 계속 돌아가고, 멈출 듯 하면서 다시 돕니다. 그리고 영화는 거기서 끝나 버립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토템이 그냥 쓰러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 쓰러졌고, 이게 모두 꿈이라고 믿고 싶은 분은 "그냥 그렇게 믿으라"는게 놀런의 생각입니다. 굳이 논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보면 이 결말을 통해 논란을 일으키겠다는 얄팍한 수이기도 하죠.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 그 수는 먹혀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인셉션'의 플롯은 완벽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보고 있는 사이에 관객에게 큰 반발심을 불러 일으킬 정도는 물론 아니죠. 보고 즐기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영화에는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자는 거대한 세계관이나 미래를 향한 의지 같은 것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런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건 그야말로 보기에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오백년 묵은 버드나무를 신으로 섬기는 거나 비슷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인셉션'은 아주 정교하게 잘 짜여진 오락영화이고, 수작입니다. 그리고 못 보시면 대단히 아쉬울 작품입니다. 그리고 감탄할만한 상상력의 활용이란 면에서 정말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번째 리뷰. 물론 제 설명이 모두 맞다는 보장은 절대 할 수 없겠죠? 지적, 의견 개진 적극 환영합니다. 함께 설명해가는 인셉션을 만들어 봅시다.^^

세번째 리뷰는 '인셉션, 아는 만큼 보인다' 정도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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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링크로 들어오신 분들은 화면 상단에 추천 마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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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물론 공신력있는 조사 결과 절대 아닙니다. 제가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대한민국의 연예인이나 셀러브리티 남자 가운데서 미중년이라는 호칭이 가장 어울릴 사람이 누구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40여분이 50개의 답변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손석희 교수님(성신여대)은 무려 9표의 몰표를 받아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다수표를 받은 분들을 보다 보니, 묘한 추세가 나타나더라는 겁니다. 즉, '꽃미남'을 고른다면 미모와 몸매로 평가할 여성들이, '미중년'을 고를 때에는 뭔가 다른 기준을 적용하더라는 거죠. 그게 뭐였을까요?



일단 그 설문조사(?) 내용을 토대로 쓴 글을 먼저 보시는게 정리가 빠를 겁니다.

제목: 왜 한국엔 미중년이 드물까

그러니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꽃미남의 표상, 완벽한 미모의 상징이던 원빈이 23세 연하의 소녀에게 망신을 당할 날 말이다.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의 상대역인 만 열살 소녀 김새론은 "촬영 시작할때 원빈이 누군지 몰랐다", "우리 또래는 2PM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원빈을 안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연기 쪽으로 활동할 것이기 때문에(!) 원빈 아저씨가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는 3연타로 원빈을 넉다운시켰다.

물론 33세와 10세는 큰 차이지만 세월이 흘러 48세와 25세쯤 되면 자연스럽게 멋지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키애누 리브스나 조지 클루니, 톰 크루즈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여대생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미중년. 그런데 갑자기 국내에서는 거기에 대응시킬만한 인물이 금세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한국 여성들이 생각하는 미중년은 어떤 사람일까. 이럴땐 트위터에 묻는게 제격이다. 질문을 올렸다. "한국 남자 중에 미중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연예인이건, 그냥 유명인이건)은 누가 있을까요?"



짧은 시간에 50명 가까운 분들이 답변을 해 왔다. 61세의 정동환에서 37세의 김원준까지 총 26명이 거론됐다. 순간적으로 답변을 들을 수 있다는 건 트위터의 각별한 매력이다. 아무튼 다양한 답변을 들은 결과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가 9표로 1위, 조국 서울대 교수와 배우 안성기가 6표로 공동 2위, 배우 정보석이 5표로 4위, 배우 홍요섭이 3표로 5위였다. 그밖에 송호창(변호사) 염재호(교수) 천호선(정치인) 정명훈(지휘자) 김광민(피아니스트) 등 일반인 셀레브리티들이 박상원 정동환 천호진 조민기 차인표 탁재훈 등 연예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뜻밖에도 연예인에 대한 선호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한창 활동이 많은 박중훈 정준호 신현준 유동근 최민식 등 40대 톱스타들이 단 한표도 나오지 않았다는게 의외였다.

물론 응답자가 그리 많지도 않았던 약식 조사지만 추세는 뚜렷했다. '20대 꽃미남'을 골라 달라고 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미모와 몸매가 여기선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꽃미남 아닌 미중년을 골라 달라고 했을 때에는 응답자들이 외모뿐만 아니라 지성이나 사회적 지위, 능력, 도덕성 등을 고려했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그러고 보면 미중년이 드문 이유는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기름진 안주와 잦은 술자리, 운동부족이 젊어서 한가닥 하던 미남들을 망가뜨렸다는게 흔한 핑계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거다. 세상 자잘한 욕심에 흐려진 마음은 그대로 안색에 비치기 마련. 또 교언영색과 눈치보기에 도가 튼 영악한 눈빛에서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풍길 리 없다. 심지어 학교 졸업한 뒤로는 독서로 머리를 채우지 못하고, 여유로 옷장을 채우지 못하니 제아무리 타고난 외모가 원빈 아니라 텐빈이라 해도 스타일이 따라 주지 못한다. 이게 일반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팔자다. 마음가짐이나 흐트러지지 않았다면 자신감이라도 버텨 주련만.



50대 동안의 기수인 주철환 전 OBS사장은 최근 저서 '청춘'을 통해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전.당.포'를 꼽았다. 인생 선배로서 가져야 할 '전문성', 그리고 약간의 '당근', 마지막으로 '포용력'을 지닌다면 마음을 터놓고 젊은이들의 정기를 흡수할 수 있다는 거다. 자기 혼자 거울 보고 웃는 미중년보단, 젊은이들과 함께 웃는 전당포 중년이면 제법 만족해도 좋을 듯 싶다.

P.S. 월드컵 붐을 타고 미중년 붐을 일으킨 독일 대표팀의 속칭 '장동건' 뢰브 감독도 코딱지 먹는 동영상 하나로 처참하게 무너져내리는게 세상이다. 미중년까진 언감생심이라도 최대한 깔끔은 떨어야 한다는게 교훈이다. 곱게 늙기, 정말 쉽지 않다.

송원섭 JES 선임기자


네. 하려는 말이 모두 들어 있다 보니 더 보탤 말이 별로 없습니다. 미국 영화를 보다 보면 눈꼬리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미중년' 아저씨들이 젊은 아가씨들에게 빠다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느끼한 눈빛과 멘트로 어필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저건 그러니까 그냥 영화, 그것도 미국 영화라고 생각하시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위에 나온 분들 가운데 얼굴을 잘 모를만한 분들도 있을 듯 합니다. 사진을 몇장 더 덧붙입니다. (의외로 조국 교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분들이 꽤 있더군요.^^)




일단 한국의 진정한 엄친아로 꼽히는 조국 서울대 교수.


송호창 변호사


염재호 고려대 교수, 그리고


아, 죄송합니다. 이 분이 아니군요.


(야유는 좀;; 솔직히 이런 저질 개그 좋아하시는 분도 많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여성들이 '중년 남성'의 매력으로 꼽는 가장 큰 요소가 지성미였다는 겁니다. 잘생기되 살짝 비어 보이는 것도 젊어서는 매력으로 커버될 수 있지만 나이 먹은 뒤에는 뭘 채워 줘야 버틸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아, 물론 며칠 전에 만나 뵌 미모의 법조인 한 분이 엄격하게 제한을 하신 내용을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성미가 중요하다는 의견에는 100% 동의한다. 하지만 어쨌든, 뭐니 뭐니 해도, 심지어 얼굴 생김보다도 날씬한게 중요하다. 배 나오고 퉁퉁한 사람은 절대 미중년이 될 수 없다. 지성미 아니라 뭐라도 그냥 아저씨다."

네. 그래서 미중년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성미+날씬한 뱃살이라고 정리하면 될 듯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는 분들은 그냥 '괜찮은 아저씨'에 만족하셔야 할 것 같네요. (그러니 무슨 노력을 해도 뢰브 감독 같은 외양을 갖출 수 없는 분들은 지성미라도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괜찮은 아저씨 소리라도 듣죠. 이게 오늘의 주제.)

보너스는 - 이미 보신 분들도 많겠지만 - 뢰브 감독 팬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했던 바로 그 동영상입니다. 파는 건 뭐 그렇다 치지만 먹는 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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