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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운대'는 해운대를 덮치는 가상의 쓰나미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지진 전문가 김휘 박사(박중훈)는 부산 재해대책 당국에 메가 쓰나미의 공포를 역설하지만 당국자는 "이제껏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 당국자가 몰랐기 때문에 나온 반응입니다. 최근 30년간, 적어도 두 차례 한국은 쓰나미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 1983년과 1993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두 차례 모두 '해운대'의 설정과 흡사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위력은 영화에 나온 메가쓰나미에 비해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지만, 일본 연안의 해저 지진이 한국에 해일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기엔 충분했습니다. 특히 1993년엔 '우리도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한동안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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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22일 개봉한 영화 ‘해운대’는 쓰나미로 부산 해운대가 쑥대밭이 되는 가상 상황을 그린 영화다. 이런 영화에는 재해를 정확하게 예언하지만 무시당하는, 이른바 카산드라(Cassandra) 캐릭터가 반드시 등장한다. ‘해운대’에선 박중훈이 연기하는 김휘 박사가 줄곧 “일본 쓰시마 섬 앞바다에서 지진이 발생할 경우 해일은 10분 만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다”며 대비를 촉구하지만, 피서철을 맞은 공무원들은 안 그래도 바쁘다며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국 땅에 쓰나미가 밀어닥친다는 얘기는 얼핏 허황된 듯하지만 사실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다. 1983년 5월 27일자 중앙일보는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 여파로 강원도 동해안에 바닷물이 높아졌다 낮아지는 승강현상과 함께 파고 3m의 해일이 밀어닥쳐 3명이 실종되고, 74척의 선박이 침몰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지진 발생 지역은 홋카이도의 남쪽인 일본 서부 해상. 이 지진으로 일본은 100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쓰나미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있을 뿐, 해저 지진으로 인한 해일과 수면 승강 현상은 바로 쓰나미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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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7월 12일에도 역시 홋카이도 남서쪽 해상에서 발생한 해저 지진으로 동해안에 해일이 발생, 57척의 어선이 파손됐다. 이 해 7월 20일자에는 당시 서울대 오임상 교수가 “일본 근해에서 해일이 발생할 경우 2~3시간이면 우리나라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해저 지진이 있을 경우 즉각 대비 태세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영화 속 김휘 교수의 주장도 그리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사실 피서객의 입장에서 오늘날 해운대를 볼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언제 올지 모르는 쓰나미보다는 백사장의 침식이다. 80년대 이후 해안의 무분별한 개발 결과 백사장의 길이가 날로 짧아져 해마다 여름이면 몇만t씩 모래를 보충한다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침식 때문에 해안선에서 멀어질수록 급격하게 수면이 깊어지는 협곡화 현상까지 발생했다고도 한다. 다양한 백사장 보호 대책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별 뾰족한 수는 없는 모양이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자신의 호 고운(孤雲)에서 한 글자를 떼어 이름을 붙였을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피서지 해운대. 글자대로 바다와 구름만 남고 해수욕장은 사라지는 비운을 맞는다면 그거야말로 대재앙이 아닐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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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제가 쓰나미 전문가일리는 없으니 그림 설명을 보는게 낫겠습니다.

일본어의 쓰나미(津波)는 그냥 물결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지만, 학술용어 쓰나미는 해일을 발생 원인으로 구별할 때, 지진으로 인해 발생하는 해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림에서 보듯 쓰나미는 지진이 발생한 지역에서 물 아래로 파동을 전달, 육지 가까운 곳에 도착하면 그 에너지를 높은 파도로 바꿔 덮쳐온다는 겁니다. 당연히 진앙으로부터의 거리와 지진의 크기가 파도의 크기를 결정하겠죠.

지금까지 기록된 한국의 쓰나미들은 비교적 거리가 먼 북해도 인근 해상에서 일어난 것들이라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83년과 93년의 사고를 봐도, 거의 매년 일어나는 홍수 피해에 비하면 별다른 큰 재난이라고 하기 힘든 정도입니다.

1983년의 재해 보도.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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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93년 5월20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지진에 대한 기획기사. '한국도 안전지대는 아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보다 일주일 전인 5월12일 홋카이도 남서쪽 해상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쓰나미가 밀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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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사상자 없이 어선 57척이 파손되는 정도의 피해였지만 일본에서는 당시 쓰나미로 14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대피할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이 기사의 끝부분에 이런 내용이 붙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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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4-5m 정도라고 되어 있지만 가까운 지점에서 대형 지진이 발생하는 경우, 쓰나미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현재까지 기록된 최대의 쓰나미는 1958년 7월 9일 미국 알래스카 리투야만(Lituya Bay)에서 목격된 것으로, 파도의 높이가 524m(1720피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대체 뭘로 측정했는지가 정말 궁금하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기록된 가장 높은 쓰나미였다는군요.

영화에도 나오는 2004년의 인도양 쓰나미는 수마트라 섬 서쪽 160km 지점에서 진도 9.0의 해저 지진이 발생,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등 주변국들을 덮쳤습니다. 총 사망자만 30여만명. 수마트라 해안에서 본 파도의 높이는 30m에 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영화 속의 대형 재해가 발생하려면 한국과 상당히 거리가 가까운 쓰시마 섬의 서안에서, 그것도 초대형 지진이 발생해야 한다는 등 여러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재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영화 얘기는 언제 나오나 하는 분들을 위해: 영화 리뷰는 이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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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까지 가능성으로 따진다면, 해운대 해수욕장은 쓰나미로 사라지는 것보다 모래 침식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을 듯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자동으로 모래사장이 평형을 유지한다, 심지어 최근 몇년 사이에는 오히려 백사장이 넓어지고 있다는 등의 주장들이 엇갈리고 있지만, 현재의 백사장 넓이를 보면 끝없는 모래사장으로 기억되던 왕년의 해운대와는 천지차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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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최근 내린 비로 한 신축 건물 앞의 해변은 이렇게 자갈이 드러나기도 했다는군요. 이거야말로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만큼 수중 제방을 설치한다는 등의 다양한 대책이 세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음 세대에도 해운대 백사장의 전설이 전해지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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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는 개봉 전부터 큰 우려의 대상이 됐던 영화입니다. 당초 올 여름을 겨냥한 한국 영화계의 카드로는 '해운대', '차우', '국가대표'가 있었죠. 이 가운데서도 '해운대'는 한국 영화 사상 초유의 재난 블록버스터로 큰 주목을 끌었습니다.

아무리 CG 기술이 발달했다 한들 관객들의 눈높이 역시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기 때문에 재난 블록버스터란 엔간한 제작비로는 감히 시도하기 힘든 장르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처음 공개된 예고편의 수준은 2년 동안 '해운대'를 기다렸던 관객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대재난이 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오가곤 했죠.

하지만 극장에서 개봉된 '해운대'는 이런 사람들의 걱정을 상당 부분 가라앉히는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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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과 '해운대'의 초기 홍보 방향은 '재난'에 올인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 무렵까지 대중들에게 홍보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설경구도, 하지원도, 박중훈도 아닌 '쓰나미'였던 것이죠.

하지만 이건 대단히 위험하고 초보적인 생각입니다. 어떤 재난 영화도 '재난'을 주인공으로 해서 성공한 적은 없습니다. 재난 영화의 고전들인 스티브 맥퀸의 '타워링'이나 진 해크만의 '포세이돈 어드벤처(리메이크 말고 오리지날)'에서 비교적 최근작인 '투모로우'에 이르기까지, 재난영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져야 할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건 제왕 제임스 카메론이 '타이타닉'의 대사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속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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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어떤 재난영화도 재난을 보여주는 걸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쓰나미가 덮쳐 폐허가 된 파라다이스 호텔이나 씨클라우드 호텔의 모습은 한 몇초 정도 사람들을 '아' 하게 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이 영화가 성공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 재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어떻게 영화에 녹아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재난'만을 강조한 예고편에 쏟아진 혹평이 본편 영화 '해운대'가 지금의 모습으로 개봉되는 데에는 상당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한 관계자는 "예고편에 대한 반응을 보고 나서 편집 방향이 상당 부분 수정됐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아마도 이때 휴먼 스토리에 대한 부분이 좀 더 강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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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입니다.

2004년, 원양어선을 타고 가다가 쓰나미에 휘말린 만식(설경구)은 같이 타고 있던 연희(하지원) 아버지를 구하지 못하고 늘 마음의 짐을 느낍니다. 2009년. 연희는 해운대에서 낮에는 생선 행상, 밤에는 횟집을 운영하며 어렵게 살고 있고, 이웃 상가 번영회장이 된 만식은 늘 안쓰러운 눈으로 연희를 바라봅니다.

지질학자 김휘박사(박중훈)는 홋카이도 인근에서부터 차츰 남하하는 해저 지진의 진앙지를 보고 한반도에 쓰나미가 닥칠 가능성을 경고하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특히 해운대에서 각국 VIP들과 함께 포럼을 준비하고 있는 김박사의 전처 유진(엄정화)은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김박사가 짜증스러울 뿐입니다.

만식의 동생인 구조대원 형식(이민기)은 서울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러온 삼수생 희미(강예원)를 구해 주다가 엉뚱한 인연이 닿게 됩니다. 이런 세 커플의 사연 위로 쓰나미의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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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재난영화지만 진짜 재난이 닥치는 것은 영화가 시작하고 90분이 지나서입니다. 그 전까지 세 커플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사연이 구구절절 소개됩니다. 이 부분에서 윤제균 감독은 충분히 재능을 발휘합니다.

지나치게 신파조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만, 이런 영화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야말로 신파 스토리라는 것은 지난 세기부터 시작된 재난영화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타이타닉' 만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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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일일히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베테랑 배우들답게 다들 자기 몫을 해 주지만,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가장 득을 본 사람을 꼽으라면 백수건달 동춘 역의 김인권과 구조대원 형식 역의 이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특히 동춘 캐릭터는 영화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민기는 이 영화를 통해 '멋진 남자' 이미지도 덤으로 얻을 수 있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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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도 얘기했듯 쓰나미는 이 영화에서 단역입니다. 사람들의 갈등과 사연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죠. 그리고 '해운대'는 그런 재난영화의 기본에 충실한 영화가 됐습니다.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심어주면 그걸로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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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연히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일단 쓰나미에 대한 연구가 좀 부족해 보입니다. 그저 거대한 파도가 해운대를 덮친다는 얘기만 강조될 뿐, 쓰나미라는 재난을 당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한 연구가 좀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재난영화에서 과학을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것은 잘 알지만, 이를테면 2차 쓰나미가 올 때 1차 쓰나미에서 온전했던 건물까지 쓸려가는데 광안대교 아래에 둥둥 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멀쩡한지, 그리고 왜 호텔 복도는 그냥 걸을 수 있는 정도인데 엘리베이터 안에는 사람 키까지 물이 차는지 등등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하긴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끝이 없긴 없죠.^^ 사람이 평지에서 볼 수 있는 수평선은 맑은 날도 5-7km를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영화 속 쓰나미의 속도는 시속 700km. 수평선 끝에서 파도가 보이고 약 30초 뒤면 뛰고 어쩌고 할 새도 없이 끝장이 난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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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쓰나미 이전의 사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쓰나미 이후의 삶에 대한 조명 역시 지나치게 부족합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바로 마무리입니다. 당연히 대 재난이 덮쳤으므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칩니다. '해운대' 제작진의 마무리는 그 죽고 다친 사람들의 뒷애기를 담담하게 지켜보는 선에서 그칩니다.

뭐 그걸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작진의 선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재난영화의 결말은 재난이 재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건을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 승화되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해운대'의 상영시간은 2시간 10분. 이런 규모의 영화라면 3시간은 되어도 충분할 듯 한데, 이야기의 살려내지 못한 부분들이 좀 아쉽긴 하지만 초유의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로서 할 몫은 충분히 다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평점을 매기라면, 저의 평점은 '볼만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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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이 영화의 무대가 '한국 어느 항구도시'가 아니라 부산이라는 구체적인 지역,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해운대로 설정되어 있었다면 좀 더 노골적인 결말이 나와도 나쁠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 제작진은 결말에서 부산 시민들의 애향심을 좀 더 자극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결말은 '재난을 극복하고 도시를 재건하려는 부산 시민의 의지'를 강조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부산적인 요소'는 영화 내내 나오는 사투리와 롯데 자이언츠 신 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부산 시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결말이 있었다면 '친구' 때의 경험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최소 100만명 이상의 관객은 더 동원할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실지... 너무 장삿속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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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2. 현역 소주 모델인 하지원이 다른 회사 소주병을 놓고 앉아있는 모습... 물론 부산이라는 향토색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겠지만 광고주가 보면 좀 분노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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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무릎팍도사'에 박중훈이 출연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반드시 빠지지 않고 나올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 질문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장동건이 어떻게 하면 무릎팍도사에 나올까요?'라는 질문, 두번째는 선배 안성기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 그리고 세번째는 자주 무릎팍도사와 비교됐던 '박중훈 쇼'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22일 방송된 박중훈 편 2부에서는 세가지 얘기가 모두 나왔습니다.

세 질문 중 가장 흥미도(?)가 떨어질 법한 안성기와의 관계. "배우 박중훈에게 안성기는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박중훈은 "아버지와도 같다. 안성기라는 배우는 속도는 느리지만 크고 튼튼한 트럭이다. 반면 나는 시속 200km를 낼 수 있는 스포츠카다. 가끔은 추월하지 않고 그 트럭의 뒤를 쫓는게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 뒤를 쫓아 달렸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한국 영화계, 혹은 연예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건 단순히 이 말 이상의 의미가 담긴 얘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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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가요계에 조용필이 있다면 영화계에는 안성기가 있습니다. 이 경동중학교 동창생인 두 사람은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양쪽 분야에서 수많은 후배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고, 독보적인 '대선배'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조용필에게 김종서와 신승훈이 있다면 안성기에게는 박중훈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차이는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전통적으로 가수 쪽의 선후배 의식이 훨씬 강합니다. 아이들 그룹의 범람도 이런 전통적인 선후배간의 관계를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조용필에 대한 존경은 80년대를 휩쓴, 카리스마 넘치는 제왕에 대한 자연스러운 추종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강한 위계질서의 연장선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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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배우 쪽에서는 안성기라는 인물이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 한동안 이런 전통적인 관계들이 실종됐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들을 다시 정립한 것이 바로 박중훈이라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런 관계를 정립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한때 한국 영화계 최대의 파워 서클이었던 골프 모임 싱글벙글이었습니다. 이름은 살짝 촌스럽지만^ 회장 안성기, 부회장 한석규 박중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 영화계의 거의 모든 주연급 남자 배우들이 회원이었던 모임이죠. 이 모임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안성기-박중훈을 축으로 하는 한국 남자 톱스타의 대열에 합류한다는 의미였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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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배들인 남자배우들은 가끔 "중훈이형의 부름을 받았을 때"를 흥분된 목소리로 상기하곤 합니다. 사실 영화계는 제작자건 스태프건 모든 소속된 사람들을 하나의 거대한 서클로 취급하는 몸짓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안성기 선배님'이라고 불리는 안성기의 카리스마를 완성시킨 데 박중훈이 세운 공헌은 수많은 다른 후배들에 의해 재생산되고, 그것이 영화계의 한 시스템을 완성하는 역할을 해 온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얼마 전 한 술자리에서 어느 톱스타 남자 배우가 이제 막 스타로 발돋움하려는 남자 배우에게 열심히 이런 체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톱스타(이름을 그냥 쓰기는 그렇고, 얼마 전 왕 연기로 호평을 받은 J씨라고 해 두겠습니다)는 후배에게, 자신이 처음 '안성기 선배님'과 '중훈이 형'을 선배로 모시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다 잘난 사람들끼리 무슨 선배고 후배고, 위 아래 질서를 이렇게 따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고. 영화계에 들어온 이상, 그렇게 형들이 위에 계시고 그 어디쯤에 내 위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게 그만큼 든든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어. 너도 곧 알게 될거다. 내가 자리를 만들테니까 그때 다시 한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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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라서 얘기가 좀 장황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 후배는 아직 이런 이야기에 그리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도 머잖아 그 대열에 합류해 있을 거란 점은 그리 의심스럽지 않더군요.

아무튼 박중훈은 '안성기 선배님'을 영화계 전체가 '선배님'이라고 부르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누구도 그를 안성기의 그림자에 묻힌 인물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질서의 정립을 통해 그 자신 또한 존경받는 선배로 자리하게 된 것이죠. '박중훈 쇼'에 그 많은 톱스타들이 선뜻 출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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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연예계에서 분야에 관계 없이 대통령을 뽑는다면 가장 당선 확률이 높은 사람은 박중훈일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무릎팍 도사'에서 보여준 모습은 이 주장이 옳다는 데 꽤 무게를 실어 준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런 폭넓은 인망이야말로 그가 '시속 40km로 달리는 트럭 안성기'의 뒤를 묵묵히 지킨 대가가 아닐까 합니다. 만약 그가 무리하게 앞서가려 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것들 말입니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박중훈의 현명함을 돋보이게 하는 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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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덥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군요.

며칠 쉬고 온 듯 한데 피로가 장난 아닙니다. 역시 휴가지에서는 누구나 무리하게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다들 휴가는 다녀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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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무한도전'에 나왔던 명카드라이브의 '냉면' 열풍이 몰아치는 핑계를 대고 냉면 얘기를 써 봤습니다. 아, 물론 박명수와 소녀시대 제시카가 부른 '냉면'은 '차가운 얼굴'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한자로 쓰면 '冷面'이죠. 중의적인 표현의 가사가 신선합니다. 일각에서는 '30분만에 쓴 노래'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이런 발상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제가 냉면에 환장한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테니 자세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하겠습니다. 아무튼 오늘의 주제는 대체 왜 한국에서, 하필이면 한국에서 냉면이라는 음식이 꽃을 피웠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똑부러진 대답이 나오기엔 글의 분량이 너무 짧습니다. 진짜 답은 읽는 분들이 내려주셔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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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냉면'이란 노래가 급격한 인기 물살을 탔다. '차디차 몸이 떨려/ 질겨도 너무 질겨/ 그래도 널 사랑해'라는 단순한 가사의 쉬운 노래지만 지난 11일 MBC TV '무한도전'에서 소개된 뒤 무서운 기세로 각종 음원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장마철의 끈끈한 더위가 노래의 인기에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여름만 오면 유명한 냉면 전문점 앞에 줄을 서는 일이 반복된 것일까. 작가 성석제에 따르면 김유정이나 이효석의 1930년대 저작에도 냉면 식도락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특히 이효석은 1939년 쓴 '유경식보'에서 '평양냉면은 유명한 것으로 치는 듯하나 서울 냉면보다 희지 못하다'고 쓰고 있다. 김찬별의 '한국 음식, 그 맛있는 탄생'에 따르면 여름 냉면집의 단체 식중독 기사가 1929년부터 거의 매년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니 냉면이 외식 산업의 선두 주자로 나선 것도 만만찮게 오래된 일인 듯하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냉면이란 음식이 대체 어쩌다 한국에서 이런 인기를 누리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더위로 치자면 훨씬 더운 나라 천지고, 국수 사랑으로 따져도 결코 한국에 뒤지지 않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스파게티의 나라 이탈리아에도 식혀 먹는 국수가 있긴 하나 샐러드에 파스타를 얹는 정도다.

이웃 중국과 일본의 대표 음식 중에도 차가운 국수는 쉬 눈에 띄지 않는다. 중국엔 량몐(凉麵)이니 렁반몐(冷拌麵)이니 하는 음식들이 있지만 그냥 초보적인 비빔국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과 옌볜의 영향으로 동북식냉면이니 조선냉면이니 하는 음식들이 침투하고 있다.

일본에도 히야시추카(冷やし中華)라는 차게 식힌 라멘이 있지만 이름만 봐도 자국 음식 대접을 못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냉면만큼 보편화된 품목을 찾자면 장에 찍어 먹는 메밀 소바 정도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처럼 벌컥벌컥 육수를 들이켜며 더위를 쫓는 음식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평양냉면 매니어들은 여름 아닌 한겨울이 제철임을 지적한다. 싸늘한 동치미 육수를 싹 비운 뒤, 거리로 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아, 시원하다(물론 '씨원하다'라고 써야 더 느낌이 온다)”고 중얼거리는 바로 그 맛. 대체 한국인들은 어쩌다 이런 별난 습성을 갖게 된 걸까. 한국인의 냉면 유전자가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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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예전에 냉면에 대해 썼던 글 안내입니다. 이른바 냉면 챌린지.

일단 여기선 생략했지만 냉면의 역사는 최소한 조선시대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형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제가 수시로 우려먹는 김찬별 선생의 명저 '한국음식, 그 맛있는 탄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오미자로 국물을 우려낸 냉면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19세기 이후의 문헌을 보면 사 먹는 냉면은 쇠고기, 돼지고기, 닭뼈 등으로 육수를 우려 낸 것이고 집에서 해 먹는 냉면은 깻국이나 콩국에 말아 먹는 것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조상들은 냉콩국수와 냉면에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냉면이란 음식은 독특합니다. 이렇게 차가운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도 하죠. 혹시 윗글을 보다가 왜 요즘은 국내에서 세를 꽤 넓혀가고 있는 중국냉면 이야기가 안 나오나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이 중국냉면이라는 것이 이름과는 달리 사실상 한국 음식이라는 데 있습니다. 중국냉면을 직접 만들고 있는 화교 주방장들조차도 "중국사람은 이런 음식을 모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짬뽕'이라는 음식이 없듯(이 음식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중국냉면 또한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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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볼 수 있는 이 '중국냉면'의 형태는 대략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이건 나중에 다시 한번 집중소개하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중국에는 본래 차가운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풍습이 없습니다. 중국인들이 먹는 량몐은 대략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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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윗부분에 이탈리아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래 전 이탈리아의 한 소도시에 갔을 때 한 노천 카페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더운 날이어서 콜라를 주문했는데, 잔과 콜라 병을 갖다 주더군요. 그런데 콜라는 냉장고에서 꺼낸 것은 분명했지만, 기대만큼 차지 않았습니다. 또 당연히 잔에 얼음이라도 채워다 줄 걸로 생각했는데 그냥 빈 잔이었습니다. 웨이터를 불러 얼음을 좀 갖다달라고 했더니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군요.

현지 생활이 10년 넘은 동행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 아마 여기서 일하면서 얼음 달라는 사람은 처음 봤을 거야." 실제로 그때 그 카페 안의 손님들 중 얼음이 들어있는 잔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이었는데도 다들 그냥 미지근한 물잔을 들고 있더군요. '아이스 워터'가 기본인 미국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잠시 후 나타난 웨이터는 얼음통도 아닌 사발에 얼음을 담아 와서, 얼음집게도 아닌 숟가락으로 얼음을 떠서 제 잔에 넣었습니다. 딸랑 한 개를 넣더니 "더 드릴까요?"하고 물어보더군요. 잔에 가득 채우라니까 '오 마이 갓' 하는 표정으로 얼음을 딸랑 딸랑 채우곤 어깨를 으쓱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아주 찬 음식도, 아주 더운 음식도'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더군요. 뭐 세계적인 건강식이라는 지중해식이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이가 시린 냉면 한 사발을 보여주면 과연 뭐랄지 궁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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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처음부터 예고했지만 답은 없습니다. 그냥 더운 여름에는 시원하게, 추운 겨울에도 더 씨원하게 살 수 있도록 냉면을 만들어 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p.s. 명카드라이브의 '냉면'도 좋지만 역시 냉면 노래는 '한 촌사람 하루는 성내와서/ 구경을 하는데/ 이골목 저골목 다니면서/ 별별것 보았네' 가 제격이죠. 이 노래는 미국의 구전가요인 Vive La Compagnie에 작곡가 박태준이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맛좋은 냉면이 여기 있소/ 값싸고 달콤한 냉면이오/ 냉면 국물 더 주시오/ 아이구나 맛 좋네'. 절로 침이 넘어갑니다.

'냉면'으로 녹음된 곡은 없군요. 그냥 곡조만 들으시기 바랍니다. 앞의 30초 정도를 지나가면 노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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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에 대한 기억을 더 잊기 전에 정리해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여러가지 일로 분주하다 보니 자꾸 늦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첫번째 내한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야 할 듯 싶습니다.

1996년 10월 11일, 역사적인 첫번째 공연 당일까지도 매표 성적은 꽤나 부진했습니다. 아마도 팝 아티스트의 공연으로는 최초로 10만원을 넘긴 티켓 가격이 워낙 고가였던 탓도 있었을 것이고, 공대위까지 결성해 조직적인 공연 반대 운동을 펼친 일부 기독교인들의 영향도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공연 주최측인 태원예능 측은 "한국 공연이 마이클 잭슨의 월드 투어 중 유일하게 매진을 기록하지 못한 불명예를 안게 될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공연 전날, 보도진에는 몇가지 생소한 지침이 내려졌습니다. 우선 사진촬영은 공연 시작 후 첫 3곡까지만 허용된다는 것, 그리고 무대에서 거의 100m 떨어진 포토라인 이외의 지역에서는 일체 사진 촬영을 불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이라면 상식적인 제한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 매체들은 이런 제한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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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공연 전 김정민과 클론이 오프닝을 할 계획이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핵심 장비를 실은 잭슨의 전용 수송기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공연은 1시간 이상 지연됐고, 무대 설비가 덜 끝난 탓에 오프닝 공연은 자동 취소됐습니다.

그래서 오후 8시가 다 된 시각, 마침내 공연의 막이 올랐습니다. 공연의 표제인 History에 걸맞게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잭슨의 모습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고, 애니메이션 속의 로켓이 실제로 무대에 착륙(?) 하면서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첫 곡은 'Sc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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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순서는 이랬습니다.

"Gates of Kiev" Computer Animation Introduction
"Scream" / "They Don't Care About Us" / "In the Closet"
"Wanna Be Startin' Somethin'"
"Stranger in Moscow"
"Smooth Criminal"
"The Wind" Video Interlude
"You Are Not Alone"
"The Way You Make Me Feel"
Jackson 5 Medley: "I Want You Back" / "The Love You Save"
Jackson 5 Medley: "I'll Be There"
Off the Wall Medley: "Rock with You" / "Off the Wall" /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Remember the Time" Video Montage Interlude
"Billie Jean"
"Thriller"
"Beat It"
"Come Together"
Black or White "Panther" Video Interlude
"Dangerous"
"Black or White"
"Earth Song"
"We Are the World" Video Interlude
"Heal the World"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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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때의 영상을 캡처한 것인 듯 합니다. 아무튼 크레인이 등장해서 그냥 참고로 보시라고 가져다 놓았습니다.)

잭슨의 무대는 가운데가 길게 타조 목처럼 객석 깊숙이 튀어나와 있는 형태였습니다. 이 튀어나온 부분의 정체는 크레인이었죠. 'Beat It' 때와 'Earth Song' 때 이 크레인은 높이 솟아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특히 Earth Song은 탱크가 등장하고, 탱크에서 내린 군인에게 소녀가 꽃을 달아주는 퍼포먼스를 통해 공연의 주제를 전달하는 중요한 곡이었죠.

11일 공연은 별 무리 없이 끝났습니다. 국내 초유의 스타디움 공연이었으므로 "무대가 너무 멀어서 안 보인다"는 불평들이 있었지만, 공연의 수준에 대해서는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죠. 수많은 기자들이 잭슨의 예측불허 동선을 쫓느라 지쳐 조금만 허물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긁기(?) 위해 날을 세우고 있었지만 차마 공연에 대해서는 뭐라 악평을 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3일 공연은 같은 날 바로 옆인 잠실 야구장에서 현대와 쌍방울의 플레이오프 최종전이 열리는 가운데서도 거의 매진에 가까운 성과를 거뒀습니다. 13일. 데스크에서 "잭슨 공연을 못 가본 사람도 많으니 오늘은 공연장에 가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어차피 모스크바에서도 똑같은 공연을 본데다 사흘동안 잭슨의 뒤를 쫓느라 지쳐 있던 터라 오히려 반가운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형사고는 13일에 터졌습니다. 바로 '마이클 잭슨에게 매달린 남자' 사건입니다.

(처음부터 감상하셔도 좋지만 노래가 좀 깁니다. 3분 50초 정도부터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전 세계 히스토리 투어 중 한국 영상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13일 공연 도중인 오후 9시40분쯤, 크레인을 사용하는 노래 두 곡 중 한곡인 Earth Song이 연주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대로 기어올랐습니다. 경호원들이 제지하려 했지만, 남자는 가볍게 피해 막 공중으로 올라가려는 크레인 끝에 탄 잭슨을 껴안았습니다. 이미 크레인은 공중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잭슨은 남자의 허리를 꼭 끌어 안아 사고를 예방했습니다. 크레인이 공중에 떠 있는 동안 남자는 '완전히 얼이 빠져 보였고', 내려오자마자 경호원들에 의해 무대 뒤로 끌려갔습니다.

혹시라도 경호원들에 의해 구타(?)라도 당하지 않을까 몇몇 기자들이 무대 뒤를 체크했지만 남자는 마냥 황홀해 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남자라는 것도 나중의 일입니다. 체구가 작고 머리가 단발이어서 이 상황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웬 여자가 마이클 잭슨에게 매달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실제로 한 신문은 '한 10대 소녀가 잭슨에게 매달렸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만한 상황(?)이 연출됐지만 불행히도 이 모습을 기록한 사진은 단 한장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모든 취재 카메라가 퇴장한 다음이었기 때문이죠. 또 요즘처럼 디지탈 카메라가 보편화된 세상이라면 누가 찍어도 찍었겠지만, 불행히도 이건 13년 전의 얘깁니다. 결국 유일한 자료는 동영상인 셈입니다.

이날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휴지통' 란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3일 밤 9시20분경 서울 잠실경기장에서 열린 마이클 잭슨의 2차공연 도중 마이클 잭슨이 무대 중앙 9m 높이의 리프트에 올려진 순간 김**군(19·**전문대 1년 휴학중)이 갑자기 『나도 가수가 되고 싶다』며 관람석에서 리프트계단을 타고 올라가 마이클 잭슨을 포옹하는 깜짝쇼를 연출…▶…관객들은 이 「사건」을 주최측이 연출한 것으로 알고 열렬한 환호를 보냈으나 김군이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벌인 해프닝으로 뒤늦게 밝혀져 실소…▶…한편 경호상의 책임을 놓고 대한경호협회와 백호기획은 상대방에 책임을 떠넘기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정작 마이클 잭슨측 관계자는 『우리도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었던 기막힌 쇼였다』며 김군에게 감사를 표시…

그토록 까다롭게 굴었던 잭슨 측이 "기막힌 쇼였다"고 즐거워 했다니, 참 뜻밖입니다.^^

이 대목에서 혹시 당시의 본인이 이 글을 보시거나, 주변 사람 가운데 이 분을 아시는 분이 있으면
fivecard@naver.com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이 때 이 분의 근황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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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두 차례의 공연을 마친 다음날인 14일, 잭슨 일행은 다음 공연국인 타이완으로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 아침, 잭슨은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해 축복을 받기도 했죠. 이때 잭슨은 교황, 김 추기경과 함께 '스톱 더 워'라는 노래를 만들자는 얘기도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날 저녁 한국을 떠나면서 잭슨이 보여준 마지막 기행(奇行)은 공항에서 한 청원경찰의 유니폼을 산 것입니다. 제복 마니아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잭슨은 공항에서 청원경찰 박모씨가 입고 있는 푸른 색 제복을 보고 "저 옷을 갖고 싶다"고 손가락질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경호원이 500달러를 주고 청원경찰에게 "옷을 벗어 달라"고 요청, 이 분이 뜻밖의 횡재를 했다는군요.

5일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예측 불허의 스케줄로 기자들을 농락(?)했던 잭슨은 이렇게 한국을 떠났습니다. 워낙 고생을 했던 터라 기자들은 대부분 "제발 다시 오지 마라"라며 출국을 진심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 옛날 일이군요.

그리고 나서 1년 뒤, 잭슨은 거짓말처럼 한국에 나타납니다.

이 포스팅 앞뒤의 내용이 궁금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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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혼혈왕자'가 드디어 개봉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 가면 시내 한 복판에 조안 K.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구상할 때 들렀다는 카페가 있습니다. 당연히 이 카페는 '해리 포터가 태어난 곳'이라는 선전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에딘버러는 여름 기온도 20도 위로 잘 올라가지 않는 북유럽형 도시입니다. 그나마 여름에는 맑은 날씨가 꽤 계속되지만 그 밖에는 쌀쌀하고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는 곳입니다. 여름 한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miserable" 하다고 표현하길 꺼리지 않습니다. 해가 지면 중세 도시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교회와 종탑의 그늘에서 스물스물 귀신들이 기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절로 연출됩니다. 묘지와 지하실들을 도는 '유령 투어'가 인기를 끌기도 하죠.

이런 도시를 배경으로 탄생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아주 처음부터, 밑바닥에 결코 아동소설답지 않은 어둠을 깔고 있었습니다. 1부에서 2부, 3부로 넘어갈 수록 조금씩 고개를 들던 이 음울한 기운이 극에 달하는 것이 바로 6부,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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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15세?)가 된 해리 포터와 친구들. 시리우스 블랙의 죽음 이후 호그와트는 학교로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짐 검사를 할 정도로 위기감에 휩싸입니다. 덤블도어는 옛날 볼드모트가 호그와트 학생일 때 그를 지도했던 슬러그혼을 다시 교수로 불러들이고, 해리 포터는 드레이코 말포이가 죽음을 먹는 자(볼드모트의 추종자)가 됐다는 확신을 갖고 그의 뒤를 쫓습니다.

이런 사건들 사이로 성장한 해리와 론의 여자관계가 전면으로 부상합니다. 해리는 론의 여동생 지니가 다른 남학생과 데이트하는 것을 안타깝게 쳐다보고 매일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론과 헤르미온느(허마이오니라고 쓰지는 않겠습니다) 사이에서도 뭔가 일어날듯 일어날듯 하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마침내 해리와 덤블도어는 볼드모트의 가장 중요한 비밀에 접근하지만, 그 비밀을 안 대가는 생각보다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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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혼혈왕자'는 해리가 우연히 얻게 된 마법약 교과서를 옛날에 썼던 학생의 별명입니다. 사실 그 학생이 왜 그런 별명을 얻게 됐는지, 그가 누구인지는 꽤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기는 합니다만, 이름 자체가 극의 흐름에 큰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이미 소설로는 7부까지 다 나와 있는 상태이기도 하지만 6부와 7부는 그저 드라마를 끝내기 위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영화도 마찬가지. 6편은 7편에서 거대한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 단계에 해당합니다.

이전까지 '해리 포터'의 매편은 볼드모트라는 거대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항상 해리 포터의 성장과 희망을 담은 마무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6편은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짓밟습니다. 스토리의 음울함은 극단으로 치닫고, 볼드모트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어린 시절의 모습만 나옵니다), 악의 세력은 이미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화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는 전체 여덟 편의 영화 시리즈(마지막 7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두 편의 영화로 각각 2010년과 11년에 개봉될 예정입니다) 중 한 편으로 의미가 있을 뿐,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기엔 어려운 영화가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이 영화의 관객들은 인질이 되어 버린 상태이니, 꼬박꼬박 극장에 출석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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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6부나 7부가 이런 스토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저자 조안 K. 롤링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오늘날의 결과를 낳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다니엘 래드클리프라는 배우라고 봐야 합니다.

2001년만 해도 너무나 동화 속 소년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했던 그가 '아즈카반의 죄수' 때부터 턱이 넓어지기 시작하고, 아무리 좋게 봐 줘도 10대 후반의 얼굴이 되어 버린 것이 소설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이미 소설과 영화가 한 배를 타고 나아가고 있는 마당에,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해리 포터가 얼굴이 삭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으로 바꿔 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스토리도 그에 따라 성장해야 하는 것은 작가로서는 불가항력의 일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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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러다 보니 무리도 꽤 따릅니다. 배우가 성장하고, 작가가 거기에 연령대를 맞췄으니 해리 포터와 친구들은 꽤 자란 상태이건만 하는 짓거리는 1, 2부때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나이와 몸은 성장했으되 정신적으로는 취약한 상태 그대로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죠.

사춘기의 주인공들을 그리다 보니 당연히 멜로드라마가 강조됐고, 여러 가지로 연애담들을 펼치고 있지만 이건 우리나라의 요즘 중학생들에 비해도 턱없이 유아적인 수준입니다. 한마디로 몸만 어른에 가까워지도 보니 불균형이 꽤 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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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다섯 편의 전작이 거둬들인 천문학적인 성공 탓에 6편과 7편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책은 팔리고, 영화는 대박이 나는게 정상인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에서 초기의 발랄함과 힘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중간에도 얘기했듯, 어쩌겠습니까. 차라리 시작하지 말았다면 모를까, 이제 두 번만 더 견디면 결말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텨야죠. 6편과 7편의 세 작품은 2009, 2010, 2011년 3년간 매년 개봉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전의 작품들처럼 2년 간격으로 개봉했다간 래드클리프가 30대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제작진을 마구 몰아치게 된 듯 합니다. 그때까지만 래드클리프가 버텨 주길(?) 바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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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래도 세 주인공 중 하나는 건졌다는 것이 6편의 유일한 위안거리입니다. 참... 잔인한 자연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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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 '태양을 삼켜라'는 일명 '올인 2'라고 불립니다. '올인'의 두 주역인 최완규 작가 - 유철용 PD가 다시 뭉친 작품이기도 하고, 지성이나 진구, 정호빈 등 '올인' 때 호흡을 맞췄던 멤버들이 다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밑바닥에서부터 다져 올라가 야망에 젊음을 거는 주인공 김정우의 모습에서는 '올인'의 김인하가 언뜻언뜻 보입니다.

하지만 15일 방송된 2회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올인'이 아닌 다른 작품의 향기가 짙게 풍겼습니다. 설정은 극중 장회장(전광렬)이 제주도에서 발견한 정우(지성)를 쓸만하게 여기고 아들 태혁(이완)의 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타리스트 태혁이 어떤 여자와 진하게 키스하는 장면을 본 정우가 태혁에게 아버지가 보내서 왔다고 하자 태혁은 "우리 아버지가 보냈으면 양아치 아니면 쓰레기"라며 아버지에 대해 극도의 경멸을 표현합니다.

자, 이 대목에서 어떤 영화가 떠오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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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0년작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는 20세기 최고의 미남 배우로 꼽히는 알랑 들롱의 25세때 모습을 볼 수 있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이 영화에서 들롱이 연기하는 톰 리플리는 한 백만장자의 부탁을 받고 비뚤어진 아들 필립(모리스 로네)을 찾아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합니다. 어찌어찌하다가 필립과 톰은 친구가 되는데 톰은 어느새 필립의 애인 마지(마리 라포레)에게 연정을 품게 됩니다. 물론 친구라고 해도 둘 사이에는 엄밀히 신분의 격차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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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맷 데이먼 - 주드 로 - 기네스 팰트로가 주연한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 1999)'의 오리지널인 바로 그 영화입니다.

드라마 보기 30여년의 경력으로 짐작해 볼 때 '태양을 삼켜라'의 다음 진행은, 당연히 수현(성유리)과 태혁을 맺어주려 애써야 하는 입장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수현을 좋아하게 되는 정우의 내면 갈등이 될 것 같습니다. 뭐 '태양은 가득히'나 '리플리'를 보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구성이죠.

정우와 톰 리플리는 재능은 있지만 배경이 없고, 가진 것에 비해 야심만만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태혁이나 필립은 성공의 끈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끈을 놓칠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한눈에 반하게 된 여자에 대한 갈증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합니다.

물론 톰 리플리는 이 정념때문에 파멸의 길을 가겠지만, 정우의 운명은 좀 다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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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태양을 삼켜라'의 전략은 '올인 2'라는 평가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드라마들이라면 '올인 2'라는 이름에 다소 짜증섞인 반응을 보일 법 하지만, 이 드라마는 아예 내놓고 '올인'과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 TV 드라마의 시청층을 생각할 때 익숙한 코드와 영상의 재현은 그리 나쁜 전략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최근 들어 '선덕여왕'이 다소 유치한(?) 구도로 돌아서면서 그동안 걸려 있던 30% 벽을 훌쩍 뛰어넘은 데서도 알 수 있듯 적절한 선에서의 '어디선가 본듯 한 느낌'의 재현은 시청률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물론 이런 화려한 출연진과 제작진을 갖춘 드라마가 성공했던 전작의 자기 복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성을 평가할 때에는 엄연한 감점 요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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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묘하게도 지성의 얼굴에서 자꾸 '에덴의 동쪽'의 송승헌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뭐 여기까진 괜찮은데 정작 심각해야 할 장회장의 얼굴에서는 어쩐지 '씁쓸한 인생'의 김준호가 연상되어 웃음을 자아냅니다. 그러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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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선덕여왕'은 끊임없이 화제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초반의 기대에 못 미친다, 자꾸만 '궁정 내 싸움'으로 작은 드라마가 되어 가는 것 아니냐는 등의 비판이 있지만 경쟁작들의 추월 가능성은 이제 거의 희박해졌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이런 인기와 관련해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선덕여왕'의 메시지입니다. 굳이 옛날의 예를 들지 않아도 모든 사극은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의 자유로운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건을 소재로 삼느냐부터 바로 이 '메시지'는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덕여왕'은 현대의 위정자들이 보기에 두 가지 두드러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관련된 문제, 또 하나는 위정자의 도덕성과 능력 사이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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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과연 화랑들은 누구의 아들들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로 우리 사회에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명문 귀족의 자제들이 모두 화랑을 이끄는 화반들이고, 아무리 명문 거족의 후예라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지 못하면 고위직에 발탁될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흥왕의 동생이며 미실의 남편인 세종도 일찌기 장군으로 수차 전장에 나갔고, 세종과 미실의 아들인 하종 또한 전투에 나가지 않았으면 관직에 나갈 명분이 없다는 내용이 수차 방송됐습니다.

비단 이런 내용은 드라마 '선덕여왕'이나 '선덕여왕'이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는 '화랑세기' 만의 기록은 아닙니다. 이른바 정사인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귀한 가문 출신의 화랑들이 앞다퉈 목숨을 내던졌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일찌기 구리공의 아들이며 5세 풍월주인 사다함도 16세의 나이로 선봉의 중책을 맡아 대가야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을 비롯, 김유신 또한 약관의 나이에 백제와의 국경을 지키는 중책을 맡아 무장으로서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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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가장 잘 말해주는 인물들은 너무 유명해서 다시 거론하기가 힘들 지경인 반굴과 관창이 있습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김유신의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를 돌파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역사의 기록입니다.

관창에 가려 명성이 덜 알려진 반굴은 유신의 동생인 흠순의 아들이니 신라군 총사령관의 조카인 셈입니다. 반굴이 먼저 단기로 적진에 달려들어 용맹을 뽐내고 죽은 뒤 관창이 풀려나면 달려들고 풀려나면 다시 달려들어 오늘날까지 이름을 남겼습니다.

조카를 희생시킨 마당에 아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펼쳐진 나-당 전쟁에서 김유신은 전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원술을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고 내칩니다. 고위층 자제들이 가끔 병역 문제로 물의를 빚는 오늘날의 모습과 관련해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른 분위기인지 실감이 납니다.

얼마전 '선덕여왕'의 전투신에서 부상당한 화랑 알천이 자신은 퇴각의 짐이 될 뿐이니 죽이고 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작가의 창작이겠지만, 전반적인 화랑의 분위기를 볼 때 크게 벗어남이 없는 진행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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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권력을 쥔 자들이 어떻게 정당성을 얻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14일 방송분으로 볼 때 '선덕여왕' 제작진이 제시한 미실의 권력 기반은 한발 앞선 정보력과 기술력에서 온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찌 보면 속임수이고, 또 미실은 당시 세계 최첨단의 과학 기술을 먼저 도입했고, 비록 그 기술을 사사로이 사용했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그들이 아니었다면 신라가 혜택을 보지 못했을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한 것 역시 미실 일파의 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미실과 '선덕여왕' 속 권력자들은 세계의 흐름과 문명의 발전에 있어 일반 국민이나 그들에게 도전하는 다른 세력에 비해 한발 앞서 있었다는 것이 제작진의 주장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90% 이상 창작이니 사실 여부와는 무관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첨단 기술에 의한 사회의 변화 속도가 날로 빨라지고 있는 시점에서 제작진이 굳이 '정보와 기술의 이해'를 권력의 핵심으로 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잣대를 들이미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권력은 뒤로 밀려나 마땅하다는 생각도 도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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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은 덕만에게 '미실이 악이냐'고 묻습니다. 이미 미실은 정권을 잡기 위해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는 것을(드라마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그런 분위기를 짙게 풍깁니다) 전제라고 하고 있고, 지금도 공포를 정치의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덕만은 미실이 악에 더 가깝다고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게다가 미실은 민본주의자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덕만은 미실의 도덕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실은 '지금 신라에 나보다 더 이 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보다 더 세계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고, 나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으며, 나보다 더 국민들의 신망이 두텁고, 나보다 더 무사 집단이 존경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당당하게 던질 수 있고, 여기에 대해 누구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위정자라면, 과연 국민들은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까요. 과연 우리는 이 시대에 이런 위정자나 거기에 걸맞은 대안을 갖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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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MBC TV '선덕여왕'이 한창 인기인데, 거기에 대한 포스팅을 너무 자주 하는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사실 선덕여왕을 열심히 보다 보니 거기에 대해 쓸 거리가 많아지는 것은 아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겁니다. 특히 드라마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신라사나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책인 '화랑세기'와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집필의 의욕을 좀 많이 느끼게도 합니다.

그 중에는 특히 문노, 미실, 칠숙, 대남보, 보종 등 기존의 역사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 인물(심지어 실존 인물인지도 아리송한)들에 대한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서라벌의 10화랑이라든가, 또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긴 하지만 김유신의 드라마 밖 이야기 같은 것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등등의 이야기들을 새롭게 포스팅할때마다 지난 포스팅들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게 좀 아쉽더군요. 또 그렇게 적극적으로 찾아서 보실 분들이 얼마나 될지도 궁금하고... 그래서 아예 인덱스 포스팅을 하나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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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포스팅들에 대한 목록과 안내의 성격을 갖는 포스팅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선덕여왕에 대해 썼던 글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서 찾아보시면 될 듯 합니다.


천추태후 덕을 본 선덕여왕

첫번째로 쓴 글입니다. 미실이란 어떤 인물이며, 그 복잡다단한 사생활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선덕여왕'이란 드라마를 보실 때 꼭 필요한 내용일 겁니다. 물론 미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젊은 날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건 다음 포스팅의 주요 내용입니다.




미실의 첫사랑, 사다함
 
신라를 이끌어갈 젊은 화랑이던 사다함이 어떻게 해서 요절하게 됐는지, 그리고 미실과 그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주로 다뤘습니다. 지금 방송되는 '선덕여왕'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부분입니다.



사다함과 미실의 진짜 비밀은

사다함이 마침내 어린 미실과 함께 드라마 '선덕여왕'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다함과 미실의 관계에는 상당히 큰 의혹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 김정현이 연기하는 미실의 아들 하종의 출생의 비밀에 대한 것이죠.



터미네이터, 칠숙의 정체

이 칠숙은 의외로 실존인물입니다. 그리고 정사에 나오는 칠숙의 모습은 앞으로 이 드라마에서 안길강이 연기하는 칠숙 캐릭터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도 슬슬 엿보게 합니다. 그리고... 드라마 속 칠숙의 모습은 정말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더군요.^^




선덕여왕의 문노, 진정한 화랑

많은 분들이 '선덕여왕'을 보면서 '도대체 왜 문노는 말로만 나오고 실제로는 안 나오는 거냐'고 궁금증을 느끼곤 합니다. 선덕여왕 최대의 떡밥 문노.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김유신의 어린시절, 화랑세기 기록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10권의 열전 중 3권을 김유신의 전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김유신이란 인물은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인물이죠. 이런 유명한 인물고, '선덕여왕'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관계로 묘사되었는지 '화랑세기' 기록을 통해 살펴봤습니다.



드라마에 없는 김유신의 첫사랑

지금까지 김유신이 등장한 모든 드라마에는 천관녀가 등장했습니다. 특히 말 목을 베는 에피소드는 김유신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유명한 일화죠. 이를 포함해 삼국사기 기록에 나오는 김유신의 실제 여자관계를 살펴봤습니다.



서라벌 10화랑, 총정리

화랑세기 기록과 '선덕여왕' 작가진의 상상력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F10, 서라벌 10화랑에 대한 참고 사항 총정리입니다. 각 화랑의 성격과 그 역할을 맡은 연기자들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위정자들이 봐야할 선덕여왕
 
드라마 선덕여왕이 과연 오늘날에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를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측면에서 본 글입니다.


선덕여왕 3대떡밥 언제 다?

'선덕여왕'이 위기에 놓이면 드라마에 등장할 세가지 비밀무기에 대한 글입니다. 첫째가 덕만의 출생의 비밀, 둘째가 문노의 재등장, 그리고 세째가 김춘추=유승호의 등장입니다. 이때는 비담의 등장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비담 캐릭터 어디서 봤다

비담에 대한 내용은 별도 포스팅으로 처리했습니다. 비담과 '베가본드'에 나오는 무사시의 공통점, 그리고 이런 캐릭터의 역사와 김남길(이한)의 경력에 대한 간략한 정리입니다.


무삭제로보는 19금 선덕여왕
 
'선덕여왕'을 제대로 만들면 19금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 '선덕여왕'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의문의 사서 '화랑세기'에 나오는 '마복자' '용양신' 등의 특수 용어를 통해 신라인들의 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재미로 본 화랑들의 전투력 랭킹
 
과연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갖고 있을까요? 화랑 전투력 랭킹 베스트 5를 꼽아 봅니다.



'선덕여왕'에서 소외된 화랑들
 
진지왕-진평왕대에 이름을 날렸으면서도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등장하지 않은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특히 세속오계를 남긴 원광법사, 원광으로부터 오계를 받아 화랑들에게 전파한 귀산과 추항 등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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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면서 옷을 하나씩 벗는다. 혹은 아예 아무 것도 안 입은 여자가 뉴스를 진행한다. 처음 들으면 참 솔깃한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네이키드 뉴스 서비스가 국내에서도 시작됐습니다. 엄청난 인기라는 사람도 있고, 정작 보니 시시하더라는 사람도 있더군요. 사실 그렇습니다. 성인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자극적인 성인용 오락물에 비해 지독하게 단순하고 심심하겠죠. 여기에 살짝 뉴스라는 서비스를 얹어 상품으로 개발해 낸 발상이 웃음을 짓게 합니다.

뉴스를 보기 위해 네이키드 뉴스를 찾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런 뉴스도 뉴스 아니냐?'고 누가 물어보면 아니라고 말하기가 좀 궁색해 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네이키드 뉴스는 왜 뉴스가 아닌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키드 뉴스만 욕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쓴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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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뉴스

일본에 뇨타이모리(女體盛り)라는 묘한 풍속이 있다. 옷을 벗은 여자의 몸에 생선회나 초밥을 올려 놓고 먹는 것을 말한다. 최근엔 일본 음식 붐과 함께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런 풍습이 꽤 유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생선회를 여자의 몸 위에 올리면 맛이 각별할까. 아무리 시각이 미각에도 영향을 미친다지만 맛 때문에 뇨타이모리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번 달 시작된 네이키드 뉴스가 화제다. 지난 1999년 캐나다에서 시작된 네이키드 뉴스는 근엄한 정장 차림의 앵커 대신 나체의 여자가 뉴스를 읽어준다는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감출 것은 없다(Nothing to hide)'는 광고 문구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현재 세계적으로 1000만명에 가까운 유료 이용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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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네이키드 뉴스를 놓고 뉴스의 질을 논하는 것은 뇨타이모리의 초밥 맛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둘 다 벗은 여자를 보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이 인터넷 방송의 음란성을 주목하겠다고 밝혔지만 성인용 유료 서비스를 놓고 새삼 이런 얘기를 할 때는 아닌 듯 싶다. 굳이 지적하자면 이 '뉴스 아닌 뉴스'의 진짜 문제는 단 한명의 기자도 없고, 단 한 건의 기사도 직접 취재하지 않으면서 뉴스 서비스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같은 뉴스라도 어떤 기자의 손을 거쳐 어떤 앵커가 보도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는 상식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이들 스스로 '뉴스는 그냥 구색 맞추기'라고 자백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긴 눈을 돌려 보면 이것이 네이키드 뉴스만의 문제는 아님을 알게 된다. 기자 없이도 뉴스를 생산하는 매체들이 이미 널려 있기 때문이다. '신문과 방송' 7월호에 따르면 올해 3월을 기준으로 한국의 인터넷 신문은 1399개나 된다. 절반은 유명무실이지만 실제로 기사가 공급되는 곳만도 706개에 이른다.

그나마 상당수는 실제 취재 인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남이 쓴 기사를 '긁어다 붙여(copy and paste)'. 바이라인도 없는 기사를 양산하고 있는 곳이 부지기수다. 이 과정에서 기사의 저작권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된다. 이런 '사이버' 사이비 언론들이 멀쩡히 숨쉬고 있는데 누가 네이키드 뉴스를 '무늬만 뉴스'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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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CSI 뉴욕'을 보다가 이 뇨타이모리가 나오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검색을 해 보니 인터넷 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뇨타이모리와 관련된 사진은 서구인들이 등장하는 게 훨씬 더 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물론 서양에서 뇨타이모리를 그렇게 많이 즐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걸 '변태 짓'이라며 아예 거론하기를 꺼리는 우리 쪽과는 달리, 서구에서는 그냥 신기한 서비스 정도로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전혀 해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뜨뜻한 스시는 생각만 해도 별로일 것 같거든요. 아, 왜 남자들을 위한 서비스만 있냐고 분개하실 여자분들을 위해 난타이모리(男體盛り)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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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에도 썼지만 뇨타이모리의 스시와 네이키드 뉴스의 뉴스는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그냥 눈가림이란 얘기죠. 물론 이 스시로도 배는 채워지고, 그 뉴스로도 시사 상식은 채워질 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왜 네이키드 뉴스의 뉴스가 '진짜 뉴스'가 아닌지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기자 없는 뉴스'의 심각성은 인터넷의 폐해 중 하나입니다. 요즘 이쪽 업계에서는 '기사 도둑질'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매체에 나온 기사를 받아 쓰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매체가 똑같이 취재를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기사가 사실인지, 혹시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 있는지 보충 취재를 한 다음에 기사를 쓰는 것이 상식이죠. 하지만 특종성 기사가 하나 보이면 다짜고짜 휙 긁어다 토씨 몇개를 고쳐 자신들이 취재한 기사인 양 내보내는 비양심 매체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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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매체들의 비양심이 1차적인 문제지만, 그런 무자격 매체들의 기사를 싼 맛에(거의 공짜에 가까운 값이라고 합니다) 게재해 주는 포털들도 문젭니다. 이렇게 '무슨 일만 생기면 쌍둥이같은 기사들이 쏟아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써 둔 글이 있습니다.

아무튼 결론은 이렇게 아무 기사나 척척 베껴서 내 기사인 척 하는 기괴한 매체들은 네이키드 뉴스에 비해 나을 게 없다는 얘깁니다. 그쪽은 그나마 '보여주기'라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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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을 보내는 자리에 가족이 아닌 '여자'로 나온 사람은 결국 브룩 실즈 뿐이었습니다. 브룩 실즈는 그와의 추억, 어린 왕자였던 잭슨의 모습을 찬찬히 털어놔 사람들을 감동시켰죠. 실즈의 말 가운데 가장 가슴에 남는 말은 "우리가 같이 다니고 사람들로부터 열심히 사진을 찍힐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이상한 커플, 있을 수 없는 커플'이라고 손가락질 했지만 우리에겐 그런 둘만의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살아 있는 동안, 여자관계에 대한 소문은 하루도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여자들과 MJ가 진지한 관계(육체적인 관계?) 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점 역시 아이러니죠. 다이애나 로스에서 시작하는 잭슨과 여자들의 관계는 테이텀 오닐, 브룩 실즈,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거쳐 두 아내와 보모에 이릅니다. 어떤 이야기들이 명멸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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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에게 있어 첫 여인은 아무래도 다이애나 로스일 겁니다. 1967년, 9세의 잭슨이 형들과 함께 할렘 아폴로 극장에서 모타운 레코드 오디션을 겸한 무대에 섰을 때 23세의 로스는 이미 슈프림스의 일원으로 스타덤에 올라 있었습니다.

14세 차이는 이 정도 연령대에선 거의 엄마와 아들의 차이죠. 아무튼 잭슨5도 곧 스타가 됐고 잭슨과 로스는 자주 얼굴을 대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무렵 다이애나 로스는 어린 마이클에게 이른바 미의 전형 역할을 했고, 마이클의 심미안은 이후로 줄곧 로스를 기준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80년대 이후, MJ가 잇단 성형수술을 할 때 그 모델이 로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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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재미있는 동영상이 있어 퍼 왔습니다. 10대 초반인 듯한 마이클이 프랭크 시나트라의 'It was a very good year'를 부르며 20대 중반인 다이애나 로스에게 쿨하게 이별을 통보하는 플레이보이를 연기합니다.

영상에서도 보듯 이 두 사람의 사이를 염문설로 묘사하는 건 좀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뭐랄까, 사이 좋은 모자 같은 관계라고 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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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MJ의 인생에는 테이텀 오닐이 등장합니다. 요즘에 와선 잊혀진 이름이지만 테이텀 오닐은 '러브 스토리'의 남자 주인공 라이언 오닐의 딸로, 11세 때인 1974년 아버지와 공연한 영화 '페이퍼 문'으로 사상 최연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가 됐습니다.

오닐은 지난 2003년 "12세 때 17세인 마이클 잭슨이 나를 덮쳤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건 "테이텀 오닐이 12세 때 나를 집으로 유혹해 키스하려 했다"는 잭슨의 주장을 반박한 것입니다. 오닐은 "잭슨이 나에게 키스하려 했지만, 내가 거절하자 머쓱한 얼굴로 '나 갈래'라고 말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별 것 아닌 얘기지만, 당시 잭슨은 오랜 아동 성추행 재판중에 있었고 오닐의 이런 주장은 원고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예민한 얘기였죠.

아무튼 이들이 친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이미 모든 사람이 알아보는 스타가 된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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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오랜 팬인 쿨탱씨는 MJ의 여자들로 꼽히는 테이텀 오닐, 브룩 실즈,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공통점으로 '이미 유년 시절에 웬만한 성인들을 능가하는 스타가 된 사람들'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죠.

그렇게 조명과 분장, 박수갈채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남들은 죽었다 깨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을 거란 점을 생각하면 매우 타당한 이론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MJ의 내면을 감싸 줄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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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스릴러'로 지구 최고의 팝스타가 된 MJ는 당시 버전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브룩 실즈를 데리고 그래미상 시상식에 나타납니다. 둘의 로맨스는 널리 널리 퍼져나갔고, 이때 한창 피어나던 커플인 존 본 조비-다이언 레인은 아예 이들의 화제에 묻혀 뒤 페이지로 밀려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커플은 어딘가 어색하다는 평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최고 스타들끼리의 만남이라는 건 좋지만 MJ는 이미 이 시절부터 성적 정체성을 의심받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만큼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이상한 소문을 떨구기 위한 위장 데이트라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브룩 실즈 또한 극성스러운 엄마 때문에 '순결 선언' 같은 닭짓을 할 때였으므로 '별난 것들'이란 시선이 따가웠죠. 결국 이 커플은 소리없이 그냥 해체돼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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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MJ가 아무리 유별나다 해도 26년 연상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관계를 그냥 사이 좋은 의붓 모자 이상을 보는 건 힘들 듯 합니다. 테일러는 마이클의 죽음을 맞아 "I loved Michael with all my soul and I can't imagine life without him" 이란 비탄 어린 코멘트를 남겼을 정도로 끈끈한 사이였습니다. 특히 2005년 재판 때 잭슨을 위해 증언한 사실도 유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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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리즈 테일러는 저 위 사진의 '화장 짙게 한 할머니' 이미지로 남아 있겠지만, 전성기 때의 리즈 테일러는 정말 '세계 최고의 미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미모를 자랑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모르시는 분들에게 한번 보시라고 끼워 넣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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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정작 그의 아내들은 참 뭐라 말하기 묘합니다. 잭슨이 1994년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을 때 대다수 인물들의 반응은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정략결혼"이라는 것이었죠. '팝의 제왕(King of Pop)'인 잭슨이 로큰롤의 제왕(King of Rock'n Roll)의 딸과 결혼했으니 이건 글자 그대로 왕가의 결혼인 셈이니까요. 두 사람은 왕자와 공주 자격으로 리사 마리가 7세 때인 1975년 라스베가스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결혼을 하긴 한거냐(?)'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2년만인 1996년 갈라섭니다. 리사 마리는 한참 뒤인 2002년 니콜라스 케이지와 결혼하지만 오래 가지 못합니다. 물론 지금의 케이지는 '케서방'이 되어 있죠.

마이클 잭슨의 팬들이 리사 마리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리 만무하지만 인터뷰 등을 종합해 볼 때 리사 마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답게,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태어날 때부터 몸에 익힌 사람이었고 MJ와도 충분한 공감의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MJ가 정신적으로 리사 마리를 많이 의존했다는 주장도 있죠. 하지만 리사 마리의 자유분방함을 '소년 그 자체인' MJ가 감당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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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리사 마리와 이혼한지 10개월만에 잭슨은 간호사 출신인 백인 여성 데비 로와 결혼한다고 발표해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로는 두 아이 프린스1과 패리스를 낳고 99년 MJ와 이혼해 사라집니다. 셋째인 프린스2(블랭킷)는 로와 이혼한 뒤에 태어난 아이로, 누가 낳았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로는 팬들에겐 저주의 대상입니다. 아이들의 생모이지만 실제로는 수정된 난자를 받아 아이들을 낳은 대리모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아이들에 대해 아무런 애정을 보이지 않았으면서도 MJ가 죽고 난 지금 아이들의 양육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죠. 참고로 MJ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아이들을 어머니인 캐슬린 잭슨이나 다이애나 로스가 맡아 주었으면 한다는 유언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생부와 생모 중 한 쪽이 사망했을 때 다른 한 쪽이 친권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데비 로는 지난 2003년 했던 인터뷰 내용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로는 "아이들은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도 아이를 낳아 주기로 했지만 엄마가 될 생각은 없었다"며 아이들을 마이클에게 내주고 혼자 위자료를 챙겨 떠난 데 대해 아무런 후회나 고통이 없음을 밝힌 바 있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인 엄마라고는 하지만 스스로를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심어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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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의 마지막 여자로 기록될 사람은 아마도 아이들의 보모인 그레이스 르와람바일 듯 합니다. 비서와 보모로 총 17년 동안 잭슨가와 인연을 맺었던 르와람바가 사실은 MJ와 비밀 결혼을 올린 사이라는 보도까지 나왔지만 사실이라면 이미 본인이 아이들과 재산에 대한 권리를 천명하고 나섰을테니 별 근거는 없는 얘기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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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영결식에서 딸 패리스의 눈물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찢어 놓은 가운데 세 아이는 어떻게 될지, 특히나 '마이클 잭슨의 딸' 패리스는 어떻게 자라게 될 지, 제왕의 후계자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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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기대도 하지 않다가 반가운 얼굴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MBC TV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가 나오시더군요. 한때 MBC 뿐만 아니라 한국 예능의 큰 흐름을 이끌었던 스타 PD였고, 최근에는 저술가로 변신하신 분입니다. 아프리카를 다녀 오신 경험을 쓰셨더군요.

사실 PD가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온다는 것은 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현재 MBC 예능의 주력인 여운혁 CP 계열의 직계 선배이고, MBC 예능국장을 역임하신 분이라는 점, 그리고 현재 예능 PD로 일선에 복귀를 앞두고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무릎팍 도사'에 이 분이 출연한 것은 지나친 전관예우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그건 방송을 보기 전 얘기고, 어제 이 분이 풀어 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만한 분이었다는 걸 수긍하게 될 겁니다. 특히 '양심냉장고'와 '이경규가 간다'가 당시 온 국민에게 줬던 감동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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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라는 방송사는 드라마건 예능이건, PD를 스타로 만드는 데 있어 다른 방송사들보다 항상 한발 앞선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영희 PD는 90년대 중반의 MBC를 대표하는 예능 PD였죠. 그 위로는 송창의 주철환 은경표와 같은 거물들이 있었고, 이후에는 고재형 여운혁 김태호로 예능 스타 PD의 명성이 이어집니다.

이 분을 처음 뵈었을 때가 주철환 전 OBS 사장의 조연출일 때였으니 참 오래 전 일입니다. 그 무렵이 바로 이 분이 '몰래카메라'를 열심히 찍고 계실 때였죠. 방송에서도 이범학의 몰래카메라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몰래카메라'라는 포맷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송창의 PD(현 tvN 대표)였지만, 이범학과 이경규가 등장한 '몰래카메라'는 주철환 PD가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지휘봉을 넘겨 받은 첫 회의 기획이었습니다. '퀴즈 아카데미'를 연출하던 주 PD가 '일밤'으로 옮겨가면서 '퀴즈 아카데미'의 포맷을 오락 프로그램에 응용한 것이었죠.

이 얘기는 지난번에 상세히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선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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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예능 스타 PD의 계보에서 김영희 PD와 주철환 PD는 유독 밀접한 관계입니다. 바로 MBC 예능에 면면히 계승되는 '교양파'의 전범을 만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능도 생각하면서 봐야 한다' 혹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가운데서도 뭔가 느끼고 생각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당의정 이론'의 대표자들이죠.

물론 엄밀히 말해 이런 이론을 주창한 사람은 주PD지만 이를 실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구현한 사람은 김PD였던 겁니다. '남는 것이 있는 예능'은 이른바 '양심냉장고'와 '이경규가 간다', 그리고 신동엽의 '신장개업'과 '러브하우스', 또 '느낌표'의 '기적의 도서관'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 사람들은 TV가 그저 웃기고 울리고, 화려하고 요란한 세상만을 펼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작은 힘을 모아 큰 힘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공 뒤에는 김PD의 힘이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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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의도 MBC 3층에 있던 예능국의 '일밤' 회의실에 가 보면 이 분은 깨 있는 모습보다 잠자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회의실 한켠에 아예 야전 침대가 있고, 거기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죠. 방송에서도 '예능국장이 되자 집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놨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미 평 PD일 때부터 회의실에는 침대가 있었습니다. "왜 매일 주무시느냐"는 농 섞인 질문에 "송기자, PD 해봐. 간이 상해"하던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양심냉장고'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당시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정지선을 칼같이 지켰습니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생각, '잘하면 횡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래. 이게 원래 지켜야 하는 선이었지'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파고 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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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이경규와 김PD는 수없이 많은 작은 영웅들을 발견해 냈습니다. 그 많은 주인공들 중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사람은 지하철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 앞에서 망설이는 할머니(네. 이 분이 바로 설정이죠)의 짐 보따리를 선뜻 들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 한 국군 장병이었습니다.

얼굴도 늠름하게 잘 생겼던 이 장병은 "할머니를 보는 순간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가 생각났다"는, 쪽 빠진 멘트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선물을 받고 난 마지막 말까지도 "혼자 휴가 나와 미안한데, 동료 전우들에게도 한턱 내야 겠다"는 환한 웃음으로 마무리하더군요. 장동건이 나온 들, 이영애가 나온 들 이보다 멋진 방송을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김PD와 이경규의 실험은 "톱스타 없이도 시청률 1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전례를 확실하게 남겼습니다. 물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실험과 도전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낳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극복한 건 아이디어에서 끝나지 않는 끈기와 뚝심의 힘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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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도 일본 후지TV 연수 얘기가 나오던데, 이분이 일본 연수를 다녀와서 하신 얘기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10년 이상 전의 얘기라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에 가니 우리와 큰 차이 없는 방송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인력이 우리의 몇 배나 됐다. 예능 프로그램 하나 만드는데 PD가 10명, 스태프가 60명이 넘었다. 현지인들에게 '우리는 이런 걸 PD 2-3명이 한다'고 했더니 다들 놀라면서 '아, 한국 PD는 슈퍼 PD다'라며 칭찬을 하더라. 그런데 그날 저녁, 술자리에 갔는데 선임 PD가 한마디 하는거야. '사실은 일본도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더 높은 품질을 위해 급속도로 투입하는 인력이 많아진거다. 다 필요해서 늘렸다.' 그러니까 낮에는 예의상 그렇게 얘기했던 거지."

2009년, 한국 예능 프로그램도 2시간짜리 주말 버라이어티를 만드는 데 모두 합치면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투입됩니다. 하지만 예전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국장 아닌 김PD의 복귀 출사표는 마냥 반갑습니다. 뭐 늘 성공하는 프로그램만 만드신 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한 건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p.s. 혹시 이 글 보시게 되면 책 한권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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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영결식이 새벽에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참 지나서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tvN에서 새벽 1시부터 생중계라는 자막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시작할 생각은 안 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포기하고 그냥 잠들어 버렸는데 2시30분에나 시작했더군요. 다행히 아침에 스트리밍 채널을 찾아 행사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자막도 없고 해설도 없는 방송;; 한번 보고 뭘 쓰려니 좀 꺼려집니다만, 아무튼 중계를 못 보신 분들이나, 보시고도 기억할 거리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 정리해 봅니다. 아무래도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정리된 내용은 별로 없을테니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행사 지켜보신 분들의 많은 지적과 수정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좀 더 남을 가치가 있는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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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7월7일, 미국 서부 시간 11시 로스 엔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

- 스모키 로빈슨이 다이애나 로스와 넬슨 만델라의 서한을 관객들에게 읽어줌.
로스는 "마이클은 내 인생에서 뭐라 표현하면 좋을지 적절한 말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다. 그가 내게 그의 아이들을 부탁했으니, 나는 그들이 나를 원할 때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함.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공연하면서부터 그를 알게 됐고, 그와 점점 친근해져 나중엔 가족의 일부가 됐다. 마이클은 거인이었고, 음악계의 전설이다. 수백만 팬들과 함께 애도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음.

- 7명의 남자들이 마이클 잭슨의 관을 무대로 옮김.

- 성가대의 찬송.

- 루시어스 스미스(Lucius Smith) 목사의 추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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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라이어 캐리와 트레이 로렌즈(Trey Lorenz), 잭슨5의 히트곡 'I'll be there'를 부름. (그러나 돌고래 소리는 트레이 로렌즈의 몫...) 마지막은 캐리의 "We miss you."

아시다시피 이 노래는 캐리의 초기 히트곡이기도 하죠.

- 퀸 라티파(Queen Litifah), 추도시 낭송

-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  'Jesus is my love'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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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 고디(Berry Gordy, 전 모타운 레코드 사장) 추도
'드림 걸즈'를 통해 잘 알려진 베리 고디는 마이클 잭슨을 비롯한 수많은 흑인 음악의 슈퍼스타들을 발굴해 키워낸 인물.
"그는 내겐 아들과도 같았다. 재키, 저메인, 티토, 말론과 함께 그를 만났을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는 모두 그가 특별하고 세상을 앞서가는 아이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상에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The Greatest Entertainer Ever Lived)였다."

...다이애나 로스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게 좀 의외로군요.


- 마이클 잭슨 추모 비디오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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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비 원더 등장. 간단한 스피치와 함께 "I Never Dreamed You'd Leave in Summer"와 "They Won't Go When I Go" 두 곡을 부름. 노래 도중 "Michael, why didn't you stay?" 라는 가사로 관객들을 뭉클하게 함.

- 코비 브라이언트 & 매직 존슨 등장.
브라이언트는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팝스타로서의 그를 기억하자. 그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다"고 추도.
Remember the Time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한 매직 존슨(그도 MJ군요...), "그의 형 재키 잭슨과 알고 지낸지 벌써 30년이다. 그와 말론은 레이커스 홈티켓 소지자다. 그러면서 자연히 마이클과도 친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나를 좀 더 나은 포인트가드로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는 흑인들에게 세상의 문들을 열어줬다. 그를 통해 흑인들은 각계에서 보다 많은 기회를 얻게 됐다"고 좀 길게 추도.

Remember the Time에는 에디 머피, 이만, 매직 존슨이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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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니퍼 허드슨, 잭슨의 'Will you be there' 부름.

- 알 샤프톤(Sharpton) 목사(흑인 민권운동가). "절대 포기하지 않아서 그는 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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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메이어, 일렉트릭 기타로 잭슨의 'Human Nature'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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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룩 실즈 등장. 
"13세때 그를 처음 만났다. 우리가 한창 여기 저기서 사진을 많이 찍히고 다닐 때, 사람들은 주로 우리를 이상한 커플, 존재할 수 없는 커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동질감을 느꼈다. 가끔 나는 '난 11개월 때 데뷔했는데 당신은 다섯살때 데뷔했나? 게을러(slacker)' 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는 가끔 내게 문워킹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나는 배우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주로 그를 왕(King of Pop)이라 불렀지만, 내 생각에 그에게 알맞는 이름은 어린 왕자다. 그는 너무나 많은 명곡들을 만들었지만 마이클 잭슨이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Smile'이었다. 이 노래는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를 위해 직접 작곡한 노래였다."

1980년대, 브룩 실즈와 마이클 잭슨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염문설'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잭슨이 성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가짜 애인이 필요한 모양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죠. 아무튼 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면서 열애설은 꽤 오래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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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메인 잭슨, 'Smile' 부름.

- 마틴 루터 킹 3세(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아들)과 누이동생 버니스 추도사.

- 셸라 잭슨 리(텍사스 주 출신 의원. 흑인 민권운동가), 잭슨의 인권 기여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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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셔 등장, 잭슨의 'Gone too soon' 부름. 감정에 복받쳐 흐느낌.

베이비페이스의 MTV 언플러그드 라이브에서 잭슨이 부른 이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 잭슨5 시절의 추모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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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 등장.
"(Who's Loving you의 끝자락이 흐르자)네. 제가 이 노래를 만든 사람입니다. 10살때의 잭슨을 처음 봤는데 이건 10세 소년의 노래가 아니었어요. 그 나이에 그런 soul이 들어 있는 아이는 처음이었죠. 그는 세상 최고의 축복이었어요."

스모키 로빈슨은 당시 모타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가수 겸 작곡가였습니다. 로빈슨의 Who's Loving You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리메이크됐지만 누구나 이 노래를 잭슨5, 혹은 마이클 잭슨의 노래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탁월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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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섀힌 자파골리(Shaheen Jafargholi), 잭슨5의 'Who's Loving You' 부름.
노래 끝난 뒤 "정말 감사드려요. 사랑합니다. 마이클 잭슨"이라고 코멘트.

잘 아시겠지만 얼마 전 '브리튼스 갓 탤런트'를 통해 마이클 잭슨의 재림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소년 가수입니다. 이번 This is it 공연에서 설 예정이었다는군요.

- 케니 오르테가(Kenny Ortega, 공연 디렉터, 안무가)
This is it 공연을 준비하던 디렉터이자 잭슨의 사업 파트너였다고 자신을 소개. 잭슨이 얼마나 This is it 공연에 공을 들여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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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슨의 공연을 준비하던(?) 백 보컬들이 'We are the World'를 부르며 모든 등장인물들이 무대로 올라옴. 노래가 'Heal the World'로 바뀌며 어린이 합창단이 무대를 감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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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들의 추도사. 잭슨의 딸 패리스(Paris), "아빠는 정말 최고의 아빠였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림.

- 루시어스 스미스 목사, 폐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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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대중 아티스트의 영결식'이란 느낌이 역력했습니다. 추도하기는 하되 모든 것이 엔터테인먼트의 일부라는 사실이 너무도 뚜렷했죠. 추도사를 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청중들에게 웃음을 자아냈고, 퍼포먼스에 나선 가수들은 최선을 다해 노래했습니다. 어셔가 노래 막판에 울음을 터뜨렸지만, 슬픔으로 인해 노래가 끊겨서는 안된다는 프로 정신도 돋보였습니다. 팝의 제왕에겐 영결식도 훌륭한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압권은 잭슨가 형제들의 패션입니다. 모두 저렇게 검은 양복에 노란 넥타이, 그리고 검은 선글래스와 한 손엔 잭슨의 반짝이 장갑으로 통일했더군요.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제왕은 이 세상과 결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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