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스포츠 드라마 '국가대표'는 '이 영화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각색한 것'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스키 점프라는 비인기종목에서 어느날 갑자기 세계 정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한국 대표팀의 이야기를 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직도 등록선수는 5명뿐이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는 점, 선수들에 대한 지원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는 점, 국내 유일의 스키점프대인 무주 스키점프대는 사실상 동계 시즌에는 가동된 적이 없다는 점 등등은 확실히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화와 현실이 다른 부분도 꽤 있습니다. 아무래도 영화의 속성상, 부분적으로 과장이 있을수밖에 없는 게 정상입니다.
영화 '국가대표'에서 사실과 같은 부분, 사실과 다른 부분들을 한번 짚어 보겠습니다.
영화 '국가대표'를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국가의 도움 없이 개인이 이뤄낸 성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에게 '신성한 의무'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을 강조하던 지나간 시대의 관념에 찬물을 끼얹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죠.
영화 리뷰는 이쪽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각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제작진이 무시하고 싶은 내용은 깔끔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스키점프 대표팀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한국 스키점프 대표팀은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가운데 1997년 창단돼 곧바로 1997년 12월 독일 오베르스트도르프 월드컵에 참가해 월드컵 출전권을 따내고, 이듬해 2월의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나가 아슬아슬하게 메달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처럼 봉고차 지붕에 스키 부츠를 매달고 훈련해서 1년만에 올림픽에 나가 세계 수준의 성적을 낸다는 건 정말 꿈같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영화니까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죠.
실제로 한국에 스키점프가 도입된 것은 1991년. 그리고 1994년에는 이미 대표팀이 전지훈련을 간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스키점프의 대명사인 네 명의 선수들, 김흥수(현 코치) 최용직 최흥철 김현기 등은 이미 10대 시절부터 유망주로 발탁돼 육성된 선수들입니다. 한국 스키점프 선수 중 최초로 국제대회 개인성적을 낸 최용직은 1997년 오베르스트도르프 대회에 만 16세의 나이로 참가해 40위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기록은 확실치 않지만, 21세기 들어서는 매년 1-2차례씩
해외 전지훈련을 다녀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가 2003년 타르비시오 동계 유니버시아드 금메달로 이어진 것입니다.
최흥철, 최용직, 김현기, 강칠구 선수. 사진출처=세계일보
물론 해외 전지훈련을 간다고 해서 호화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하이원이 실업팀을 창단해 최흥철과 김현기가 입단하기 전까지 이들 국가대표 선수들의 공식 수입은 연봉 38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유니폼이 모자라 기워 입어야 하고, 선수들이 직접 스키 날에 왁스를 입혀야 하는 열악함도 사실입니다. 다만 영화에서 보듯, '국가가 스키점프라는 종목을 버리려 했는데 선수 개개인이 살려냈다'는 식의 기술은 사실과 꽤 거리가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선수들이 개인 생활 유지를 위해 각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는 얘기는 영화에서 생략되어 있더군요.)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체육회를 비롯한 국가 기관에서는 스키 점프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그래도 해외 전지훈련 등의 지원을 했고, 그 결과 도입 12년만에 동계 유니버시아드 금메달이라는 성과가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에는 실업팀도 생겼습니다. 비인기 종목의 레벨로 따지면 이보다 못한 종목도 수두룩합니다.
영화에서 보듯 황무지에서 어느날 뚝딱 대표팀이 만들어지고, 그해 겨울에 국제대회에 나가고, 그 이듬해에 올림픽에 나가고...하는 식의 황당무계한 스토리는 오히려 스키 점프 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선수-지도자 외에 측면에서 지원한 많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꽤나 서운한 얘기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열정만으로 되는 일은 꽤 제한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런 부분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스스로를 구제한 작은 영웅들 이야기'라는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생략된 것입니다. 물론 전에도 한번 강조했지만
이런 부분들이 오락 영화로서 걸작인 '국가대표'의 가치를 해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를 현실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현실은 현실, 영화는 영화입니다.
양념으로 하나 끼워넣는 얘기라면, 이들 스키 점프 대표팀 선수 가운데 해외 입양 후 귀국한 선수는 없습니다. 해외에 입양됐던 스키 선수의 뿌리 찾기 이야기는 토비 도슨의 실화에서 따온 것인 듯 합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스키 스타 도슨은 자신의 뿌리인 한국을 찾아 아버지와 동생을 만났고, 이어 약혼녀와 한국에서 전통 혼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도슨은 이후 골프 선수로 변신, 2007년 이후 각종 대회에 출전하고 있습니다.
p.s. 영화 마지막에 봉구가 점프하기 직전, 키를 재고 방코치가 "키가 크니까 스키 더 긴거 타도 돼"라고 어필하는 장면은 시점의 착각입니다. 현재는 스키 점프 선수가 이용할 수 있는 스키의 길이가 자신의 키의 146%로 제한되어 있지만 이 규정이 생긴 것이 바로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일본이 3개중 2개의 금메달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선수들이 큰 스키를 쓰는 전법으로(영화에도 나오는 얘깁니다) 스키점프에서 강세를 차지했고, 나가노 올림픽 이후 유럽 각국이 이 전략을 차단하기 위해 신장 대비 스키 길이 규정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에는 없던 규정인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