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시스'라는 스페인 영화를 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1996년작인 이 영화는 스너프(정사 뒤에 여자를 죽이는 포르노의 일종) 필름을 우연히 발견한 대학생들이 그 배후를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의 결말과 관계없이 마지막 장면은 TV 뉴스 화면입니다. 여성 앵커는 말합니다. "저희는 이 필름을 단독 입수하고, 공개할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결국 저희는 여러분의 볼 권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이 영상을 공개합니다." 미디어의 본질에 대한 아메나바르의 통렬한 '한방'입니다.
그리고 어젯밤 KBS에서 거의 비슷한 멘트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13일 방송된 KBS 1TV '뉴스9'의 보도 리드 멘트입니다.
자살한 탤런트 장자연씨가 숨지기 직전에 남긴 자필 문건을, KBS가 단독입수했습니다. 술접대에 잠자리 강요까지, 연예계의 추악한 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KBS는 숨진 장씨의 명예와 불법행위 사이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 문건을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KBS가 이런 보도를 했다는 사실은 다시 다른 매체들에 의해 널리 퍼졌습니다. 유족들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이 문서의 공개를 거부해왔습니다. 그 기사들에 달린 댓글 중 수많은 댓글들 가운데서 "대체 왜 유족들은 이 공개를 꺼린 것이냐. 문서를 공개해서 동생의 억울한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댓글들이 꽤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지금 이런 얘기를 쓰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가족의 심정입니다. 이번 사건이 있은 뒤 유족들은 일관되게 문서의 공개를 거부해왔습니다.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지만 대략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 지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유족의 입장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 어느 가족이, 자신들의 여동생이, 그것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여동생이 저런 식으로 언급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두번째는 과연 문서의 공개가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위 리드 멘트를 보면 KBS의 명분은 '고인의 명예와 불법행위(에 대한 고발이라는 언론의 사명)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것이 더 공익에 부합한다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과연 공개한다고 처벌이 이뤄지고, 공개하지 않는 것은 악을 덮는 일일까요?
자, 여기서 전제는, 진실을 규명하고 악을 처단해야 한다는 데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 멘트는 변명입니다. 왜냐하면, 어제 보도가 나간 문건을 최초 확보한 기자에게는 일단 장자연의 명예를 지키면서도 불법행위를 견제하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확보한 문건을 경찰에게 인계하고, 비공개 수사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미 유족들은 10일 경찰에 문서를 확보하고 수사를 하더라도 절대 내용이 새 나가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일반인들이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듯, 문서의 내용이 공개된다고 해서 그 문건에 명시된 '처벌받아 마땅한 사람'이 곧바로 단죄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KBS 보도국과 해당 기자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보도는 너무나도 기계적인 보도였던 겁니다.
세번째, 아직도 왜 문건의 공개가 공익적이지 않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실 분들을 위해 덧붙입니다. 장자연이 남긴 문서의 내용에 따라 연예계 폭력의 실체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KBS도 저 보도를 할 때 문제의 매니저 이름을 '김모씨'라는 익명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과연 KBS에서 저 보도가 나간다고 해서 저절로 검증이 될까요? 과연 문서에 기록된 불법행위를 문제의 '가해자'들이 바로 인정하고 죄값을 받게 될까요? 이거야말로 수사 전문기관이 달라붙어서 해결해야 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아무튼 정의의 구현이 목적이라면, 기자는 문서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도 경찰이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진실이 입증되고, 책임자의 처벌이 가능해졌을 때 문서의 내용이 보도됐다면 아마도 KBS의 '진정성'을 믿어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의 이런 보도는, 일반 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외에는 실제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KBS 측은 "그건 경찰이 고민할 일이지 기자가 고민할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겁니다. 또는 "미쳤어? 우리가 보도 안 한다고 그 문서가 끝까지 안 나올 것 같아? 비공개 수사 요청? 제정신이야? 그러다 다른 놈들이 냄새 맡고 기사 쓰면 우리는 뭐가 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보도를 할 때에는 더 신중했어야 했던 겁니다. 특종 욕심에 온 정신이 가 있다면 이런 데에 생각이 미칠 리가 없겠죠.
저는 저 고상한 KBS가 '저질 황색언론'이라고 가끔 표현하는 스포츠지 기자로 10년 넘게 일해왔습니다. 연예인들의 열애설 나부랭이를 팔아먹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죽음을 놓고 장난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수많은 연예인들의 죽음을 지켜봤지만, 이렇게 유족들의 간청을 무시해가면서 일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어제 KBS가 보도한 '유족과의 인터뷰'는 장씨의 오빠가 "제발 그런 보도로 자연이의 명예를 해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려고 직접 건 전화였습니다. 그 전화마저도 KBS는 녹취해서 보도에 이용했습니다. 과연 이 보도를 보고도 장자연이 편히 잠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p.s. 아직도 장자연이 남긴 이 글이 '유서'였다고 생각하고, 장자연이 이 문서의 내용을 밝히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군요. 여기에 대해 제가 말할 권리는 없지만, 이 문서는 유서도 아니고, 장자연이 그 내용을 이렇게 대중 앞에 공개하려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점 만큼은 분명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기양 살다가 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 모리스 자르와 함께 가버린 음악들 (19) | 2009.03.30 |
---|---|
장자연씨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230) | 2009.03.16 |
WBC 중계, 결국 실속은 방송사 몫 (33) | 2009.03.11 |
장자연, 더 이상 이런 죽음은 없었으면 (28) | 2009.03.08 |
대체 웬 백인이 트로트를 부를까? (16) | 2009.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