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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덥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군요.

며칠 쉬고 온 듯 한데 피로가 장난 아닙니다. 역시 휴가지에서는 누구나 무리하게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다들 휴가는 다녀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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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무한도전'에 나왔던 명카드라이브의 '냉면' 열풍이 몰아치는 핑계를 대고 냉면 얘기를 써 봤습니다. 아, 물론 박명수와 소녀시대 제시카가 부른 '냉면'은 '차가운 얼굴'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한자로 쓰면 '冷面'이죠. 중의적인 표현의 가사가 신선합니다. 일각에서는 '30분만에 쓴 노래'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이런 발상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제가 냉면에 환장한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테니 자세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하겠습니다. 아무튼 오늘의 주제는 대체 왜 한국에서, 하필이면 한국에서 냉면이라는 음식이 꽃을 피웠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똑부러진 대답이 나오기엔 글의 분량이 너무 짧습니다. 진짜 답은 읽는 분들이 내려주셔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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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냉면'이란 노래가 급격한 인기 물살을 탔다. '차디차 몸이 떨려/ 질겨도 너무 질겨/ 그래도 널 사랑해'라는 단순한 가사의 쉬운 노래지만 지난 11일 MBC TV '무한도전'에서 소개된 뒤 무서운 기세로 각종 음원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장마철의 끈끈한 더위가 노래의 인기에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여름만 오면 유명한 냉면 전문점 앞에 줄을 서는 일이 반복된 것일까. 작가 성석제에 따르면 김유정이나 이효석의 1930년대 저작에도 냉면 식도락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특히 이효석은 1939년 쓴 '유경식보'에서 '평양냉면은 유명한 것으로 치는 듯하나 서울 냉면보다 희지 못하다'고 쓰고 있다. 김찬별의 '한국 음식, 그 맛있는 탄생'에 따르면 여름 냉면집의 단체 식중독 기사가 1929년부터 거의 매년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니 냉면이 외식 산업의 선두 주자로 나선 것도 만만찮게 오래된 일인 듯하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냉면이란 음식이 대체 어쩌다 한국에서 이런 인기를 누리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더위로 치자면 훨씬 더운 나라 천지고, 국수 사랑으로 따져도 결코 한국에 뒤지지 않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스파게티의 나라 이탈리아에도 식혀 먹는 국수가 있긴 하나 샐러드에 파스타를 얹는 정도다.

이웃 중국과 일본의 대표 음식 중에도 차가운 국수는 쉬 눈에 띄지 않는다. 중국엔 량몐(凉麵)이니 렁반몐(冷拌麵)이니 하는 음식들이 있지만 그냥 초보적인 비빔국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과 옌볜의 영향으로 동북식냉면이니 조선냉면이니 하는 음식들이 침투하고 있다.

일본에도 히야시추카(冷やし中華)라는 차게 식힌 라멘이 있지만 이름만 봐도 자국 음식 대접을 못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냉면만큼 보편화된 품목을 찾자면 장에 찍어 먹는 메밀 소바 정도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처럼 벌컥벌컥 육수를 들이켜며 더위를 쫓는 음식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평양냉면 매니어들은 여름 아닌 한겨울이 제철임을 지적한다. 싸늘한 동치미 육수를 싹 비운 뒤, 거리로 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아, 시원하다(물론 '씨원하다'라고 써야 더 느낌이 온다)”고 중얼거리는 바로 그 맛. 대체 한국인들은 어쩌다 이런 별난 습성을 갖게 된 걸까. 한국인의 냉면 유전자가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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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예전에 냉면에 대해 썼던 글 안내입니다. 이른바 냉면 챌린지.

일단 여기선 생략했지만 냉면의 역사는 최소한 조선시대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형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제가 수시로 우려먹는 김찬별 선생의 명저 '한국음식, 그 맛있는 탄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오미자로 국물을 우려낸 냉면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19세기 이후의 문헌을 보면 사 먹는 냉면은 쇠고기, 돼지고기, 닭뼈 등으로 육수를 우려 낸 것이고 집에서 해 먹는 냉면은 깻국이나 콩국에 말아 먹는 것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조상들은 냉콩국수와 냉면에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냉면이란 음식은 독특합니다. 이렇게 차가운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도 하죠. 혹시 윗글을 보다가 왜 요즘은 국내에서 세를 꽤 넓혀가고 있는 중국냉면 이야기가 안 나오나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이 중국냉면이라는 것이 이름과는 달리 사실상 한국 음식이라는 데 있습니다. 중국냉면을 직접 만들고 있는 화교 주방장들조차도 "중국사람은 이런 음식을 모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짬뽕'이라는 음식이 없듯(이 음식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중국냉면 또한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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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볼 수 있는 이 '중국냉면'의 형태는 대략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이건 나중에 다시 한번 집중소개하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중국에는 본래 차가운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풍습이 없습니다. 중국인들이 먹는 량몐은 대략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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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윗부분에 이탈리아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래 전 이탈리아의 한 소도시에 갔을 때 한 노천 카페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더운 날이어서 콜라를 주문했는데, 잔과 콜라 병을 갖다 주더군요. 그런데 콜라는 냉장고에서 꺼낸 것은 분명했지만, 기대만큼 차지 않았습니다. 또 당연히 잔에 얼음이라도 채워다 줄 걸로 생각했는데 그냥 빈 잔이었습니다. 웨이터를 불러 얼음을 좀 갖다달라고 했더니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군요.

현지 생활이 10년 넘은 동행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 아마 여기서 일하면서 얼음 달라는 사람은 처음 봤을 거야." 실제로 그때 그 카페 안의 손님들 중 얼음이 들어있는 잔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이었는데도 다들 그냥 미지근한 물잔을 들고 있더군요. '아이스 워터'가 기본인 미국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잠시 후 나타난 웨이터는 얼음통도 아닌 사발에 얼음을 담아 와서, 얼음집게도 아닌 숟가락으로 얼음을 떠서 제 잔에 넣었습니다. 딸랑 한 개를 넣더니 "더 드릴까요?"하고 물어보더군요. 잔에 가득 채우라니까 '오 마이 갓' 하는 표정으로 얼음을 딸랑 딸랑 채우곤 어깨를 으쓱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아주 찬 음식도, 아주 더운 음식도'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더군요. 뭐 세계적인 건강식이라는 지중해식이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이가 시린 냉면 한 사발을 보여주면 과연 뭐랄지 궁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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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처음부터 예고했지만 답은 없습니다. 그냥 더운 여름에는 시원하게, 추운 겨울에도 더 씨원하게 살 수 있도록 냉면을 만들어 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p.s. 명카드라이브의 '냉면'도 좋지만 역시 냉면 노래는 '한 촌사람 하루는 성내와서/ 구경을 하는데/ 이골목 저골목 다니면서/ 별별것 보았네' 가 제격이죠. 이 노래는 미국의 구전가요인 Vive La Compagnie에 작곡가 박태준이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맛좋은 냉면이 여기 있소/ 값싸고 달콤한 냉면이오/ 냉면 국물 더 주시오/ 아이구나 맛 좋네'. 절로 침이 넘어갑니다.

'냉면'으로 녹음된 곡은 없군요. 그냥 곡조만 들으시기 바랍니다. 앞의 30초 정도를 지나가면 노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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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에 대한 기억을 더 잊기 전에 정리해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여러가지 일로 분주하다 보니 자꾸 늦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첫번째 내한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야 할 듯 싶습니다.

1996년 10월 11일, 역사적인 첫번째 공연 당일까지도 매표 성적은 꽤나 부진했습니다. 아마도 팝 아티스트의 공연으로는 최초로 10만원을 넘긴 티켓 가격이 워낙 고가였던 탓도 있었을 것이고, 공대위까지 결성해 조직적인 공연 반대 운동을 펼친 일부 기독교인들의 영향도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공연 주최측인 태원예능 측은 "한국 공연이 마이클 잭슨의 월드 투어 중 유일하게 매진을 기록하지 못한 불명예를 안게 될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공연 전날, 보도진에는 몇가지 생소한 지침이 내려졌습니다. 우선 사진촬영은 공연 시작 후 첫 3곡까지만 허용된다는 것, 그리고 무대에서 거의 100m 떨어진 포토라인 이외의 지역에서는 일체 사진 촬영을 불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이라면 상식적인 제한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 매체들은 이런 제한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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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공연 전 김정민과 클론이 오프닝을 할 계획이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핵심 장비를 실은 잭슨의 전용 수송기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공연은 1시간 이상 지연됐고, 무대 설비가 덜 끝난 탓에 오프닝 공연은 자동 취소됐습니다.

그래서 오후 8시가 다 된 시각, 마침내 공연의 막이 올랐습니다. 공연의 표제인 History에 걸맞게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잭슨의 모습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고, 애니메이션 속의 로켓이 실제로 무대에 착륙(?) 하면서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첫 곡은 'Sc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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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순서는 이랬습니다.

"Gates of Kiev" Computer Animation Introduction
"Scream" / "They Don't Care About Us" / "In the Closet"
"Wanna Be Startin' Somethin'"
"Stranger in Moscow"
"Smooth Criminal"
"The Wind" Video Interlude
"You Are Not Alone"
"The Way You Make Me Feel"
Jackson 5 Medley: "I Want You Back" / "The Love You Save"
Jackson 5 Medley: "I'll Be There"
Off the Wall Medley: "Rock with You" / "Off the Wall" /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Remember the Time" Video Montage Interlude
"Billie Jean"
"Thriller"
"Beat It"
"Come Together"
Black or White "Panther" Video Interlude
"Dangerous"
"Black or White"
"Earth Song"
"We Are the World" Video Interlude
"Heal the World"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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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때의 영상을 캡처한 것인 듯 합니다. 아무튼 크레인이 등장해서 그냥 참고로 보시라고 가져다 놓았습니다.)

잭슨의 무대는 가운데가 길게 타조 목처럼 객석 깊숙이 튀어나와 있는 형태였습니다. 이 튀어나온 부분의 정체는 크레인이었죠. 'Beat It' 때와 'Earth Song' 때 이 크레인은 높이 솟아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특히 Earth Song은 탱크가 등장하고, 탱크에서 내린 군인에게 소녀가 꽃을 달아주는 퍼포먼스를 통해 공연의 주제를 전달하는 중요한 곡이었죠.

11일 공연은 별 무리 없이 끝났습니다. 국내 초유의 스타디움 공연이었으므로 "무대가 너무 멀어서 안 보인다"는 불평들이 있었지만, 공연의 수준에 대해서는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죠. 수많은 기자들이 잭슨의 예측불허 동선을 쫓느라 지쳐 조금만 허물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긁기(?) 위해 날을 세우고 있었지만 차마 공연에 대해서는 뭐라 악평을 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3일 공연은 같은 날 바로 옆인 잠실 야구장에서 현대와 쌍방울의 플레이오프 최종전이 열리는 가운데서도 거의 매진에 가까운 성과를 거뒀습니다. 13일. 데스크에서 "잭슨 공연을 못 가본 사람도 많으니 오늘은 공연장에 가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어차피 모스크바에서도 똑같은 공연을 본데다 사흘동안 잭슨의 뒤를 쫓느라 지쳐 있던 터라 오히려 반가운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형사고는 13일에 터졌습니다. 바로 '마이클 잭슨에게 매달린 남자' 사건입니다.

(처음부터 감상하셔도 좋지만 노래가 좀 깁니다. 3분 50초 정도부터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전 세계 히스토리 투어 중 한국 영상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13일 공연 도중인 오후 9시40분쯤, 크레인을 사용하는 노래 두 곡 중 한곡인 Earth Song이 연주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대로 기어올랐습니다. 경호원들이 제지하려 했지만, 남자는 가볍게 피해 막 공중으로 올라가려는 크레인 끝에 탄 잭슨을 껴안았습니다. 이미 크레인은 공중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잭슨은 남자의 허리를 꼭 끌어 안아 사고를 예방했습니다. 크레인이 공중에 떠 있는 동안 남자는 '완전히 얼이 빠져 보였고', 내려오자마자 경호원들에 의해 무대 뒤로 끌려갔습니다.

혹시라도 경호원들에 의해 구타(?)라도 당하지 않을까 몇몇 기자들이 무대 뒤를 체크했지만 남자는 마냥 황홀해 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남자라는 것도 나중의 일입니다. 체구가 작고 머리가 단발이어서 이 상황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웬 여자가 마이클 잭슨에게 매달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실제로 한 신문은 '한 10대 소녀가 잭슨에게 매달렸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만한 상황(?)이 연출됐지만 불행히도 이 모습을 기록한 사진은 단 한장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모든 취재 카메라가 퇴장한 다음이었기 때문이죠. 또 요즘처럼 디지탈 카메라가 보편화된 세상이라면 누가 찍어도 찍었겠지만, 불행히도 이건 13년 전의 얘깁니다. 결국 유일한 자료는 동영상인 셈입니다.

이날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휴지통' 란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3일 밤 9시20분경 서울 잠실경기장에서 열린 마이클 잭슨의 2차공연 도중 마이클 잭슨이 무대 중앙 9m 높이의 리프트에 올려진 순간 김**군(19·**전문대 1년 휴학중)이 갑자기 『나도 가수가 되고 싶다』며 관람석에서 리프트계단을 타고 올라가 마이클 잭슨을 포옹하는 깜짝쇼를 연출…▶…관객들은 이 「사건」을 주최측이 연출한 것으로 알고 열렬한 환호를 보냈으나 김군이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벌인 해프닝으로 뒤늦게 밝혀져 실소…▶…한편 경호상의 책임을 놓고 대한경호협회와 백호기획은 상대방에 책임을 떠넘기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정작 마이클 잭슨측 관계자는 『우리도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었던 기막힌 쇼였다』며 김군에게 감사를 표시…

그토록 까다롭게 굴었던 잭슨 측이 "기막힌 쇼였다"고 즐거워 했다니, 참 뜻밖입니다.^^

이 대목에서 혹시 당시의 본인이 이 글을 보시거나, 주변 사람 가운데 이 분을 아시는 분이 있으면
fivecard@naver.com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이 때 이 분의 근황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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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두 차례의 공연을 마친 다음날인 14일, 잭슨 일행은 다음 공연국인 타이완으로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 아침, 잭슨은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해 축복을 받기도 했죠. 이때 잭슨은 교황, 김 추기경과 함께 '스톱 더 워'라는 노래를 만들자는 얘기도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날 저녁 한국을 떠나면서 잭슨이 보여준 마지막 기행(奇行)은 공항에서 한 청원경찰의 유니폼을 산 것입니다. 제복 마니아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잭슨은 공항에서 청원경찰 박모씨가 입고 있는 푸른 색 제복을 보고 "저 옷을 갖고 싶다"고 손가락질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경호원이 500달러를 주고 청원경찰에게 "옷을 벗어 달라"고 요청, 이 분이 뜻밖의 횡재를 했다는군요.

5일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예측 불허의 스케줄로 기자들을 농락(?)했던 잭슨은 이렇게 한국을 떠났습니다. 워낙 고생을 했던 터라 기자들은 대부분 "제발 다시 오지 마라"라며 출국을 진심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 옛날 일이군요.

그리고 나서 1년 뒤, 잭슨은 거짓말처럼 한국에 나타납니다.

이 포스팅 앞뒤의 내용이 궁금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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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혼혈왕자'가 드디어 개봉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 가면 시내 한 복판에 조안 K.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구상할 때 들렀다는 카페가 있습니다. 당연히 이 카페는 '해리 포터가 태어난 곳'이라는 선전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에딘버러는 여름 기온도 20도 위로 잘 올라가지 않는 북유럽형 도시입니다. 그나마 여름에는 맑은 날씨가 꽤 계속되지만 그 밖에는 쌀쌀하고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는 곳입니다. 여름 한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miserable" 하다고 표현하길 꺼리지 않습니다. 해가 지면 중세 도시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교회와 종탑의 그늘에서 스물스물 귀신들이 기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절로 연출됩니다. 묘지와 지하실들을 도는 '유령 투어'가 인기를 끌기도 하죠.

이런 도시를 배경으로 탄생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아주 처음부터, 밑바닥에 결코 아동소설답지 않은 어둠을 깔고 있었습니다. 1부에서 2부, 3부로 넘어갈 수록 조금씩 고개를 들던 이 음울한 기운이 극에 달하는 것이 바로 6부,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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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15세?)가 된 해리 포터와 친구들. 시리우스 블랙의 죽음 이후 호그와트는 학교로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짐 검사를 할 정도로 위기감에 휩싸입니다. 덤블도어는 옛날 볼드모트가 호그와트 학생일 때 그를 지도했던 슬러그혼을 다시 교수로 불러들이고, 해리 포터는 드레이코 말포이가 죽음을 먹는 자(볼드모트의 추종자)가 됐다는 확신을 갖고 그의 뒤를 쫓습니다.

이런 사건들 사이로 성장한 해리와 론의 여자관계가 전면으로 부상합니다. 해리는 론의 여동생 지니가 다른 남학생과 데이트하는 것을 안타깝게 쳐다보고 매일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론과 헤르미온느(허마이오니라고 쓰지는 않겠습니다) 사이에서도 뭔가 일어날듯 일어날듯 하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마침내 해리와 덤블도어는 볼드모트의 가장 중요한 비밀에 접근하지만, 그 비밀을 안 대가는 생각보다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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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혼혈왕자'는 해리가 우연히 얻게 된 마법약 교과서를 옛날에 썼던 학생의 별명입니다. 사실 그 학생이 왜 그런 별명을 얻게 됐는지, 그가 누구인지는 꽤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기는 합니다만, 이름 자체가 극의 흐름에 큰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이미 소설로는 7부까지 다 나와 있는 상태이기도 하지만 6부와 7부는 그저 드라마를 끝내기 위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영화도 마찬가지. 6편은 7편에서 거대한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 단계에 해당합니다.

이전까지 '해리 포터'의 매편은 볼드모트라는 거대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항상 해리 포터의 성장과 희망을 담은 마무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6편은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짓밟습니다. 스토리의 음울함은 극단으로 치닫고, 볼드모트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어린 시절의 모습만 나옵니다), 악의 세력은 이미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화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는 전체 여덟 편의 영화 시리즈(마지막 7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두 편의 영화로 각각 2010년과 11년에 개봉될 예정입니다) 중 한 편으로 의미가 있을 뿐,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기엔 어려운 영화가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이 영화의 관객들은 인질이 되어 버린 상태이니, 꼬박꼬박 극장에 출석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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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6부나 7부가 이런 스토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저자 조안 K. 롤링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오늘날의 결과를 낳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다니엘 래드클리프라는 배우라고 봐야 합니다.

2001년만 해도 너무나 동화 속 소년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했던 그가 '아즈카반의 죄수' 때부터 턱이 넓어지기 시작하고, 아무리 좋게 봐 줘도 10대 후반의 얼굴이 되어 버린 것이 소설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이미 소설과 영화가 한 배를 타고 나아가고 있는 마당에,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해리 포터가 얼굴이 삭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으로 바꿔 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스토리도 그에 따라 성장해야 하는 것은 작가로서는 불가항력의 일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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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러다 보니 무리도 꽤 따릅니다. 배우가 성장하고, 작가가 거기에 연령대를 맞췄으니 해리 포터와 친구들은 꽤 자란 상태이건만 하는 짓거리는 1, 2부때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나이와 몸은 성장했으되 정신적으로는 취약한 상태 그대로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죠.

사춘기의 주인공들을 그리다 보니 당연히 멜로드라마가 강조됐고, 여러 가지로 연애담들을 펼치고 있지만 이건 우리나라의 요즘 중학생들에 비해도 턱없이 유아적인 수준입니다. 한마디로 몸만 어른에 가까워지도 보니 불균형이 꽤 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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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다섯 편의 전작이 거둬들인 천문학적인 성공 탓에 6편과 7편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책은 팔리고, 영화는 대박이 나는게 정상인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에서 초기의 발랄함과 힘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중간에도 얘기했듯, 어쩌겠습니까. 차라리 시작하지 말았다면 모를까, 이제 두 번만 더 견디면 결말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텨야죠. 6편과 7편의 세 작품은 2009, 2010, 2011년 3년간 매년 개봉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전의 작품들처럼 2년 간격으로 개봉했다간 래드클리프가 30대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제작진을 마구 몰아치게 된 듯 합니다. 그때까지만 래드클리프가 버텨 주길(?) 바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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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래도 세 주인공 중 하나는 건졌다는 것이 6편의 유일한 위안거리입니다. 참... 잔인한 자연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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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 '태양을 삼켜라'는 일명 '올인 2'라고 불립니다. '올인'의 두 주역인 최완규 작가 - 유철용 PD가 다시 뭉친 작품이기도 하고, 지성이나 진구, 정호빈 등 '올인' 때 호흡을 맞췄던 멤버들이 다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밑바닥에서부터 다져 올라가 야망에 젊음을 거는 주인공 김정우의 모습에서는 '올인'의 김인하가 언뜻언뜻 보입니다.

하지만 15일 방송된 2회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올인'이 아닌 다른 작품의 향기가 짙게 풍겼습니다. 설정은 극중 장회장(전광렬)이 제주도에서 발견한 정우(지성)를 쓸만하게 여기고 아들 태혁(이완)의 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타리스트 태혁이 어떤 여자와 진하게 키스하는 장면을 본 정우가 태혁에게 아버지가 보내서 왔다고 하자 태혁은 "우리 아버지가 보냈으면 양아치 아니면 쓰레기"라며 아버지에 대해 극도의 경멸을 표현합니다.

자, 이 대목에서 어떤 영화가 떠오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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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0년작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는 20세기 최고의 미남 배우로 꼽히는 알랑 들롱의 25세때 모습을 볼 수 있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이 영화에서 들롱이 연기하는 톰 리플리는 한 백만장자의 부탁을 받고 비뚤어진 아들 필립(모리스 로네)을 찾아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합니다. 어찌어찌하다가 필립과 톰은 친구가 되는데 톰은 어느새 필립의 애인 마지(마리 라포레)에게 연정을 품게 됩니다. 물론 친구라고 해도 둘 사이에는 엄밀히 신분의 격차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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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맷 데이먼 - 주드 로 - 기네스 팰트로가 주연한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 1999)'의 오리지널인 바로 그 영화입니다.

드라마 보기 30여년의 경력으로 짐작해 볼 때 '태양을 삼켜라'의 다음 진행은, 당연히 수현(성유리)과 태혁을 맺어주려 애써야 하는 입장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수현을 좋아하게 되는 정우의 내면 갈등이 될 것 같습니다. 뭐 '태양은 가득히'나 '리플리'를 보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구성이죠.

정우와 톰 리플리는 재능은 있지만 배경이 없고, 가진 것에 비해 야심만만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태혁이나 필립은 성공의 끈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끈을 놓칠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한눈에 반하게 된 여자에 대한 갈증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합니다.

물론 톰 리플리는 이 정념때문에 파멸의 길을 가겠지만, 정우의 운명은 좀 다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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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태양을 삼켜라'의 전략은 '올인 2'라는 평가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드라마들이라면 '올인 2'라는 이름에 다소 짜증섞인 반응을 보일 법 하지만, 이 드라마는 아예 내놓고 '올인'과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 TV 드라마의 시청층을 생각할 때 익숙한 코드와 영상의 재현은 그리 나쁜 전략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최근 들어 '선덕여왕'이 다소 유치한(?) 구도로 돌아서면서 그동안 걸려 있던 30% 벽을 훌쩍 뛰어넘은 데서도 알 수 있듯 적절한 선에서의 '어디선가 본듯 한 느낌'의 재현은 시청률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물론 이런 화려한 출연진과 제작진을 갖춘 드라마가 성공했던 전작의 자기 복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성을 평가할 때에는 엄연한 감점 요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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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묘하게도 지성의 얼굴에서 자꾸 '에덴의 동쪽'의 송승헌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뭐 여기까진 괜찮은데 정작 심각해야 할 장회장의 얼굴에서는 어쩐지 '씁쓸한 인생'의 김준호가 연상되어 웃음을 자아냅니다. 그러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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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선덕여왕'은 끊임없이 화제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초반의 기대에 못 미친다, 자꾸만 '궁정 내 싸움'으로 작은 드라마가 되어 가는 것 아니냐는 등의 비판이 있지만 경쟁작들의 추월 가능성은 이제 거의 희박해졌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이런 인기와 관련해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선덕여왕'의 메시지입니다. 굳이 옛날의 예를 들지 않아도 모든 사극은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의 자유로운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건을 소재로 삼느냐부터 바로 이 '메시지'는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덕여왕'은 현대의 위정자들이 보기에 두 가지 두드러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관련된 문제, 또 하나는 위정자의 도덕성과 능력 사이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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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과연 화랑들은 누구의 아들들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로 우리 사회에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명문 귀족의 자제들이 모두 화랑을 이끄는 화반들이고, 아무리 명문 거족의 후예라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지 못하면 고위직에 발탁될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흥왕의 동생이며 미실의 남편인 세종도 일찌기 장군으로 수차 전장에 나갔고, 세종과 미실의 아들인 하종 또한 전투에 나가지 않았으면 관직에 나갈 명분이 없다는 내용이 수차 방송됐습니다.

비단 이런 내용은 드라마 '선덕여왕'이나 '선덕여왕'이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는 '화랑세기' 만의 기록은 아닙니다. 이른바 정사인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귀한 가문 출신의 화랑들이 앞다퉈 목숨을 내던졌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일찌기 구리공의 아들이며 5세 풍월주인 사다함도 16세의 나이로 선봉의 중책을 맡아 대가야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을 비롯, 김유신 또한 약관의 나이에 백제와의 국경을 지키는 중책을 맡아 무장으로서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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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가장 잘 말해주는 인물들은 너무 유명해서 다시 거론하기가 힘들 지경인 반굴과 관창이 있습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김유신의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를 돌파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역사의 기록입니다.

관창에 가려 명성이 덜 알려진 반굴은 유신의 동생인 흠순의 아들이니 신라군 총사령관의 조카인 셈입니다. 반굴이 먼저 단기로 적진에 달려들어 용맹을 뽐내고 죽은 뒤 관창이 풀려나면 달려들고 풀려나면 다시 달려들어 오늘날까지 이름을 남겼습니다.

조카를 희생시킨 마당에 아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펼쳐진 나-당 전쟁에서 김유신은 전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원술을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고 내칩니다. 고위층 자제들이 가끔 병역 문제로 물의를 빚는 오늘날의 모습과 관련해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른 분위기인지 실감이 납니다.

얼마전 '선덕여왕'의 전투신에서 부상당한 화랑 알천이 자신은 퇴각의 짐이 될 뿐이니 죽이고 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작가의 창작이겠지만, 전반적인 화랑의 분위기를 볼 때 크게 벗어남이 없는 진행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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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권력을 쥔 자들이 어떻게 정당성을 얻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14일 방송분으로 볼 때 '선덕여왕' 제작진이 제시한 미실의 권력 기반은 한발 앞선 정보력과 기술력에서 온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찌 보면 속임수이고, 또 미실은 당시 세계 최첨단의 과학 기술을 먼저 도입했고, 비록 그 기술을 사사로이 사용했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그들이 아니었다면 신라가 혜택을 보지 못했을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한 것 역시 미실 일파의 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미실과 '선덕여왕' 속 권력자들은 세계의 흐름과 문명의 발전에 있어 일반 국민이나 그들에게 도전하는 다른 세력에 비해 한발 앞서 있었다는 것이 제작진의 주장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90% 이상 창작이니 사실 여부와는 무관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첨단 기술에 의한 사회의 변화 속도가 날로 빨라지고 있는 시점에서 제작진이 굳이 '정보와 기술의 이해'를 권력의 핵심으로 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잣대를 들이미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권력은 뒤로 밀려나 마땅하다는 생각도 도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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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은 덕만에게 '미실이 악이냐'고 묻습니다. 이미 미실은 정권을 잡기 위해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는 것을(드라마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그런 분위기를 짙게 풍깁니다) 전제라고 하고 있고, 지금도 공포를 정치의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덕만은 미실이 악에 더 가깝다고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게다가 미실은 민본주의자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덕만은 미실의 도덕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실은 '지금 신라에 나보다 더 이 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보다 더 세계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고, 나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으며, 나보다 더 국민들의 신망이 두텁고, 나보다 더 무사 집단이 존경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당당하게 던질 수 있고, 여기에 대해 누구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위정자라면, 과연 국민들은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까요. 과연 우리는 이 시대에 이런 위정자나 거기에 걸맞은 대안을 갖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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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MBC TV '선덕여왕'이 한창 인기인데, 거기에 대한 포스팅을 너무 자주 하는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사실 선덕여왕을 열심히 보다 보니 거기에 대해 쓸 거리가 많아지는 것은 아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겁니다. 특히 드라마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신라사나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책인 '화랑세기'와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집필의 의욕을 좀 많이 느끼게도 합니다.

그 중에는 특히 문노, 미실, 칠숙, 대남보, 보종 등 기존의 역사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 인물(심지어 실존 인물인지도 아리송한)들에 대한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서라벌의 10화랑이라든가, 또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긴 하지만 김유신의 드라마 밖 이야기 같은 것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등등의 이야기들을 새롭게 포스팅할때마다 지난 포스팅들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게 좀 아쉽더군요. 또 그렇게 적극적으로 찾아서 보실 분들이 얼마나 될지도 궁금하고... 그래서 아예 인덱스 포스팅을 하나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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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포스팅들에 대한 목록과 안내의 성격을 갖는 포스팅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선덕여왕에 대해 썼던 글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서 찾아보시면 될 듯 합니다.


천추태후 덕을 본 선덕여왕

첫번째로 쓴 글입니다. 미실이란 어떤 인물이며, 그 복잡다단한 사생활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선덕여왕'이란 드라마를 보실 때 꼭 필요한 내용일 겁니다. 물론 미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젊은 날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건 다음 포스팅의 주요 내용입니다.




미실의 첫사랑, 사다함
 
신라를 이끌어갈 젊은 화랑이던 사다함이 어떻게 해서 요절하게 됐는지, 그리고 미실과 그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주로 다뤘습니다. 지금 방송되는 '선덕여왕'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부분입니다.



사다함과 미실의 진짜 비밀은

사다함이 마침내 어린 미실과 함께 드라마 '선덕여왕'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다함과 미실의 관계에는 상당히 큰 의혹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 김정현이 연기하는 미실의 아들 하종의 출생의 비밀에 대한 것이죠.



터미네이터, 칠숙의 정체

이 칠숙은 의외로 실존인물입니다. 그리고 정사에 나오는 칠숙의 모습은 앞으로 이 드라마에서 안길강이 연기하는 칠숙 캐릭터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도 슬슬 엿보게 합니다. 그리고... 드라마 속 칠숙의 모습은 정말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더군요.^^




선덕여왕의 문노, 진정한 화랑

많은 분들이 '선덕여왕'을 보면서 '도대체 왜 문노는 말로만 나오고 실제로는 안 나오는 거냐'고 궁금증을 느끼곤 합니다. 선덕여왕 최대의 떡밥 문노.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김유신의 어린시절, 화랑세기 기록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10권의 열전 중 3권을 김유신의 전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김유신이란 인물은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인물이죠. 이런 유명한 인물고, '선덕여왕'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관계로 묘사되었는지 '화랑세기' 기록을 통해 살펴봤습니다.



드라마에 없는 김유신의 첫사랑

지금까지 김유신이 등장한 모든 드라마에는 천관녀가 등장했습니다. 특히 말 목을 베는 에피소드는 김유신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유명한 일화죠. 이를 포함해 삼국사기 기록에 나오는 김유신의 실제 여자관계를 살펴봤습니다.



서라벌 10화랑, 총정리

화랑세기 기록과 '선덕여왕' 작가진의 상상력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F10, 서라벌 10화랑에 대한 참고 사항 총정리입니다. 각 화랑의 성격과 그 역할을 맡은 연기자들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위정자들이 봐야할 선덕여왕
 
드라마 선덕여왕이 과연 오늘날에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를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측면에서 본 글입니다.


선덕여왕 3대떡밥 언제 다?

'선덕여왕'이 위기에 놓이면 드라마에 등장할 세가지 비밀무기에 대한 글입니다. 첫째가 덕만의 출생의 비밀, 둘째가 문노의 재등장, 그리고 세째가 김춘추=유승호의 등장입니다. 이때는 비담의 등장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비담 캐릭터 어디서 봤다

비담에 대한 내용은 별도 포스팅으로 처리했습니다. 비담과 '베가본드'에 나오는 무사시의 공통점, 그리고 이런 캐릭터의 역사와 김남길(이한)의 경력에 대한 간략한 정리입니다.


무삭제로보는 19금 선덕여왕
 
'선덕여왕'을 제대로 만들면 19금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 '선덕여왕'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의문의 사서 '화랑세기'에 나오는 '마복자' '용양신' 등의 특수 용어를 통해 신라인들의 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재미로 본 화랑들의 전투력 랭킹
 
과연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갖고 있을까요? 화랑 전투력 랭킹 베스트 5를 꼽아 봅니다.



'선덕여왕'에서 소외된 화랑들
 
진지왕-진평왕대에 이름을 날렸으면서도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등장하지 않은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특히 세속오계를 남긴 원광법사, 원광으로부터 오계를 받아 화랑들에게 전파한 귀산과 추항 등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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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면서 옷을 하나씩 벗는다. 혹은 아예 아무 것도 안 입은 여자가 뉴스를 진행한다. 처음 들으면 참 솔깃한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네이키드 뉴스 서비스가 국내에서도 시작됐습니다. 엄청난 인기라는 사람도 있고, 정작 보니 시시하더라는 사람도 있더군요. 사실 그렇습니다. 성인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자극적인 성인용 오락물에 비해 지독하게 단순하고 심심하겠죠. 여기에 살짝 뉴스라는 서비스를 얹어 상품으로 개발해 낸 발상이 웃음을 짓게 합니다.

뉴스를 보기 위해 네이키드 뉴스를 찾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런 뉴스도 뉴스 아니냐?'고 누가 물어보면 아니라고 말하기가 좀 궁색해 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네이키드 뉴스는 왜 뉴스가 아닌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키드 뉴스만 욕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쓴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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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뉴스

일본에 뇨타이모리(女體盛り)라는 묘한 풍속이 있다. 옷을 벗은 여자의 몸에 생선회나 초밥을 올려 놓고 먹는 것을 말한다. 최근엔 일본 음식 붐과 함께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런 풍습이 꽤 유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생선회를 여자의 몸 위에 올리면 맛이 각별할까. 아무리 시각이 미각에도 영향을 미친다지만 맛 때문에 뇨타이모리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번 달 시작된 네이키드 뉴스가 화제다. 지난 1999년 캐나다에서 시작된 네이키드 뉴스는 근엄한 정장 차림의 앵커 대신 나체의 여자가 뉴스를 읽어준다는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감출 것은 없다(Nothing to hide)'는 광고 문구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현재 세계적으로 1000만명에 가까운 유료 이용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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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네이키드 뉴스를 놓고 뉴스의 질을 논하는 것은 뇨타이모리의 초밥 맛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둘 다 벗은 여자를 보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이 인터넷 방송의 음란성을 주목하겠다고 밝혔지만 성인용 유료 서비스를 놓고 새삼 이런 얘기를 할 때는 아닌 듯 싶다. 굳이 지적하자면 이 '뉴스 아닌 뉴스'의 진짜 문제는 단 한명의 기자도 없고, 단 한 건의 기사도 직접 취재하지 않으면서 뉴스 서비스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같은 뉴스라도 어떤 기자의 손을 거쳐 어떤 앵커가 보도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는 상식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이들 스스로 '뉴스는 그냥 구색 맞추기'라고 자백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긴 눈을 돌려 보면 이것이 네이키드 뉴스만의 문제는 아님을 알게 된다. 기자 없이도 뉴스를 생산하는 매체들이 이미 널려 있기 때문이다. '신문과 방송' 7월호에 따르면 올해 3월을 기준으로 한국의 인터넷 신문은 1399개나 된다. 절반은 유명무실이지만 실제로 기사가 공급되는 곳만도 706개에 이른다.

그나마 상당수는 실제 취재 인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남이 쓴 기사를 '긁어다 붙여(copy and paste)'. 바이라인도 없는 기사를 양산하고 있는 곳이 부지기수다. 이 과정에서 기사의 저작권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된다. 이런 '사이버' 사이비 언론들이 멀쩡히 숨쉬고 있는데 누가 네이키드 뉴스를 '무늬만 뉴스'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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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CSI 뉴욕'을 보다가 이 뇨타이모리가 나오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검색을 해 보니 인터넷 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뇨타이모리와 관련된 사진은 서구인들이 등장하는 게 훨씬 더 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물론 서양에서 뇨타이모리를 그렇게 많이 즐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걸 '변태 짓'이라며 아예 거론하기를 꺼리는 우리 쪽과는 달리, 서구에서는 그냥 신기한 서비스 정도로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전혀 해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뜨뜻한 스시는 생각만 해도 별로일 것 같거든요. 아, 왜 남자들을 위한 서비스만 있냐고 분개하실 여자분들을 위해 난타이모리(男體盛り)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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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에도 썼지만 뇨타이모리의 스시와 네이키드 뉴스의 뉴스는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그냥 눈가림이란 얘기죠. 물론 이 스시로도 배는 채워지고, 그 뉴스로도 시사 상식은 채워질 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왜 네이키드 뉴스의 뉴스가 '진짜 뉴스'가 아닌지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기자 없는 뉴스'의 심각성은 인터넷의 폐해 중 하나입니다. 요즘 이쪽 업계에서는 '기사 도둑질'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매체에 나온 기사를 받아 쓰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매체가 똑같이 취재를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기사가 사실인지, 혹시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 있는지 보충 취재를 한 다음에 기사를 쓰는 것이 상식이죠. 하지만 특종성 기사가 하나 보이면 다짜고짜 휙 긁어다 토씨 몇개를 고쳐 자신들이 취재한 기사인 양 내보내는 비양심 매체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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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매체들의 비양심이 1차적인 문제지만, 그런 무자격 매체들의 기사를 싼 맛에(거의 공짜에 가까운 값이라고 합니다) 게재해 주는 포털들도 문젭니다. 이렇게 '무슨 일만 생기면 쌍둥이같은 기사들이 쏟아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써 둔 글이 있습니다.

아무튼 결론은 이렇게 아무 기사나 척척 베껴서 내 기사인 척 하는 기괴한 매체들은 네이키드 뉴스에 비해 나을 게 없다는 얘깁니다. 그쪽은 그나마 '보여주기'라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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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을 보내는 자리에 가족이 아닌 '여자'로 나온 사람은 결국 브룩 실즈 뿐이었습니다. 브룩 실즈는 그와의 추억, 어린 왕자였던 잭슨의 모습을 찬찬히 털어놔 사람들을 감동시켰죠. 실즈의 말 가운데 가장 가슴에 남는 말은 "우리가 같이 다니고 사람들로부터 열심히 사진을 찍힐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이상한 커플, 있을 수 없는 커플'이라고 손가락질 했지만 우리에겐 그런 둘만의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살아 있는 동안, 여자관계에 대한 소문은 하루도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여자들과 MJ가 진지한 관계(육체적인 관계?) 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점 역시 아이러니죠. 다이애나 로스에서 시작하는 잭슨과 여자들의 관계는 테이텀 오닐, 브룩 실즈,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거쳐 두 아내와 보모에 이릅니다. 어떤 이야기들이 명멸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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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에게 있어 첫 여인은 아무래도 다이애나 로스일 겁니다. 1967년, 9세의 잭슨이 형들과 함께 할렘 아폴로 극장에서 모타운 레코드 오디션을 겸한 무대에 섰을 때 23세의 로스는 이미 슈프림스의 일원으로 스타덤에 올라 있었습니다.

14세 차이는 이 정도 연령대에선 거의 엄마와 아들의 차이죠. 아무튼 잭슨5도 곧 스타가 됐고 잭슨과 로스는 자주 얼굴을 대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무렵 다이애나 로스는 어린 마이클에게 이른바 미의 전형 역할을 했고, 마이클의 심미안은 이후로 줄곧 로스를 기준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80년대 이후, MJ가 잇단 성형수술을 할 때 그 모델이 로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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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재미있는 동영상이 있어 퍼 왔습니다. 10대 초반인 듯한 마이클이 프랭크 시나트라의 'It was a very good year'를 부르며 20대 중반인 다이애나 로스에게 쿨하게 이별을 통보하는 플레이보이를 연기합니다.

영상에서도 보듯 이 두 사람의 사이를 염문설로 묘사하는 건 좀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뭐랄까, 사이 좋은 모자 같은 관계라고 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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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MJ의 인생에는 테이텀 오닐이 등장합니다. 요즘에 와선 잊혀진 이름이지만 테이텀 오닐은 '러브 스토리'의 남자 주인공 라이언 오닐의 딸로, 11세 때인 1974년 아버지와 공연한 영화 '페이퍼 문'으로 사상 최연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가 됐습니다.

오닐은 지난 2003년 "12세 때 17세인 마이클 잭슨이 나를 덮쳤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건 "테이텀 오닐이 12세 때 나를 집으로 유혹해 키스하려 했다"는 잭슨의 주장을 반박한 것입니다. 오닐은 "잭슨이 나에게 키스하려 했지만, 내가 거절하자 머쓱한 얼굴로 '나 갈래'라고 말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별 것 아닌 얘기지만, 당시 잭슨은 오랜 아동 성추행 재판중에 있었고 오닐의 이런 주장은 원고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예민한 얘기였죠.

아무튼 이들이 친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이미 모든 사람이 알아보는 스타가 된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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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오랜 팬인 쿨탱씨는 MJ의 여자들로 꼽히는 테이텀 오닐, 브룩 실즈,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공통점으로 '이미 유년 시절에 웬만한 성인들을 능가하는 스타가 된 사람들'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죠.

그렇게 조명과 분장, 박수갈채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남들은 죽었다 깨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을 거란 점을 생각하면 매우 타당한 이론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MJ의 내면을 감싸 줄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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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스릴러'로 지구 최고의 팝스타가 된 MJ는 당시 버전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브룩 실즈를 데리고 그래미상 시상식에 나타납니다. 둘의 로맨스는 널리 널리 퍼져나갔고, 이때 한창 피어나던 커플인 존 본 조비-다이언 레인은 아예 이들의 화제에 묻혀 뒤 페이지로 밀려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커플은 어딘가 어색하다는 평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최고 스타들끼리의 만남이라는 건 좋지만 MJ는 이미 이 시절부터 성적 정체성을 의심받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만큼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이상한 소문을 떨구기 위한 위장 데이트라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브룩 실즈 또한 극성스러운 엄마 때문에 '순결 선언' 같은 닭짓을 할 때였으므로 '별난 것들'이란 시선이 따가웠죠. 결국 이 커플은 소리없이 그냥 해체돼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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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MJ가 아무리 유별나다 해도 26년 연상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관계를 그냥 사이 좋은 의붓 모자 이상을 보는 건 힘들 듯 합니다. 테일러는 마이클의 죽음을 맞아 "I loved Michael with all my soul and I can't imagine life without him" 이란 비탄 어린 코멘트를 남겼을 정도로 끈끈한 사이였습니다. 특히 2005년 재판 때 잭슨을 위해 증언한 사실도 유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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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리즈 테일러는 저 위 사진의 '화장 짙게 한 할머니' 이미지로 남아 있겠지만, 전성기 때의 리즈 테일러는 정말 '세계 최고의 미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미모를 자랑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모르시는 분들에게 한번 보시라고 끼워 넣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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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정작 그의 아내들은 참 뭐라 말하기 묘합니다. 잭슨이 1994년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을 때 대다수 인물들의 반응은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정략결혼"이라는 것이었죠. '팝의 제왕(King of Pop)'인 잭슨이 로큰롤의 제왕(King of Rock'n Roll)의 딸과 결혼했으니 이건 글자 그대로 왕가의 결혼인 셈이니까요. 두 사람은 왕자와 공주 자격으로 리사 마리가 7세 때인 1975년 라스베가스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결혼을 하긴 한거냐(?)'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2년만인 1996년 갈라섭니다. 리사 마리는 한참 뒤인 2002년 니콜라스 케이지와 결혼하지만 오래 가지 못합니다. 물론 지금의 케이지는 '케서방'이 되어 있죠.

마이클 잭슨의 팬들이 리사 마리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리 만무하지만 인터뷰 등을 종합해 볼 때 리사 마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답게,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태어날 때부터 몸에 익힌 사람이었고 MJ와도 충분한 공감의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MJ가 정신적으로 리사 마리를 많이 의존했다는 주장도 있죠. 하지만 리사 마리의 자유분방함을 '소년 그 자체인' MJ가 감당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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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리사 마리와 이혼한지 10개월만에 잭슨은 간호사 출신인 백인 여성 데비 로와 결혼한다고 발표해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로는 두 아이 프린스1과 패리스를 낳고 99년 MJ와 이혼해 사라집니다. 셋째인 프린스2(블랭킷)는 로와 이혼한 뒤에 태어난 아이로, 누가 낳았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로는 팬들에겐 저주의 대상입니다. 아이들의 생모이지만 실제로는 수정된 난자를 받아 아이들을 낳은 대리모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아이들에 대해 아무런 애정을 보이지 않았으면서도 MJ가 죽고 난 지금 아이들의 양육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죠. 참고로 MJ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아이들을 어머니인 캐슬린 잭슨이나 다이애나 로스가 맡아 주었으면 한다는 유언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생부와 생모 중 한 쪽이 사망했을 때 다른 한 쪽이 친권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데비 로는 지난 2003년 했던 인터뷰 내용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로는 "아이들은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도 아이를 낳아 주기로 했지만 엄마가 될 생각은 없었다"며 아이들을 마이클에게 내주고 혼자 위자료를 챙겨 떠난 데 대해 아무런 후회나 고통이 없음을 밝힌 바 있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인 엄마라고는 하지만 스스로를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심어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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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의 마지막 여자로 기록될 사람은 아마도 아이들의 보모인 그레이스 르와람바일 듯 합니다. 비서와 보모로 총 17년 동안 잭슨가와 인연을 맺었던 르와람바가 사실은 MJ와 비밀 결혼을 올린 사이라는 보도까지 나왔지만 사실이라면 이미 본인이 아이들과 재산에 대한 권리를 천명하고 나섰을테니 별 근거는 없는 얘기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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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영결식에서 딸 패리스의 눈물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찢어 놓은 가운데 세 아이는 어떻게 될지, 특히나 '마이클 잭슨의 딸' 패리스는 어떻게 자라게 될 지, 제왕의 후계자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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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기대도 하지 않다가 반가운 얼굴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MBC TV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가 나오시더군요. 한때 MBC 뿐만 아니라 한국 예능의 큰 흐름을 이끌었던 스타 PD였고, 최근에는 저술가로 변신하신 분입니다. 아프리카를 다녀 오신 경험을 쓰셨더군요.

사실 PD가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온다는 것은 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현재 MBC 예능의 주력인 여운혁 CP 계열의 직계 선배이고, MBC 예능국장을 역임하신 분이라는 점, 그리고 현재 예능 PD로 일선에 복귀를 앞두고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무릎팍 도사'에 이 분이 출연한 것은 지나친 전관예우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그건 방송을 보기 전 얘기고, 어제 이 분이 풀어 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만한 분이었다는 걸 수긍하게 될 겁니다. 특히 '양심냉장고'와 '이경규가 간다'가 당시 온 국민에게 줬던 감동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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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라는 방송사는 드라마건 예능이건, PD를 스타로 만드는 데 있어 다른 방송사들보다 항상 한발 앞선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영희 PD는 90년대 중반의 MBC를 대표하는 예능 PD였죠. 그 위로는 송창의 주철환 은경표와 같은 거물들이 있었고, 이후에는 고재형 여운혁 김태호로 예능 스타 PD의 명성이 이어집니다.

이 분을 처음 뵈었을 때가 주철환 전 OBS 사장의 조연출일 때였으니 참 오래 전 일입니다. 그 무렵이 바로 이 분이 '몰래카메라'를 열심히 찍고 계실 때였죠. 방송에서도 이범학의 몰래카메라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몰래카메라'라는 포맷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송창의 PD(현 tvN 대표)였지만, 이범학과 이경규가 등장한 '몰래카메라'는 주철환 PD가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지휘봉을 넘겨 받은 첫 회의 기획이었습니다. '퀴즈 아카데미'를 연출하던 주 PD가 '일밤'으로 옮겨가면서 '퀴즈 아카데미'의 포맷을 오락 프로그램에 응용한 것이었죠.

이 얘기는 지난번에 상세히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선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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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예능 스타 PD의 계보에서 김영희 PD와 주철환 PD는 유독 밀접한 관계입니다. 바로 MBC 예능에 면면히 계승되는 '교양파'의 전범을 만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능도 생각하면서 봐야 한다' 혹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가운데서도 뭔가 느끼고 생각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당의정 이론'의 대표자들이죠.

물론 엄밀히 말해 이런 이론을 주창한 사람은 주PD지만 이를 실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구현한 사람은 김PD였던 겁니다. '남는 것이 있는 예능'은 이른바 '양심냉장고'와 '이경규가 간다', 그리고 신동엽의 '신장개업'과 '러브하우스', 또 '느낌표'의 '기적의 도서관'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 사람들은 TV가 그저 웃기고 울리고, 화려하고 요란한 세상만을 펼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작은 힘을 모아 큰 힘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공 뒤에는 김PD의 힘이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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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의도 MBC 3층에 있던 예능국의 '일밤' 회의실에 가 보면 이 분은 깨 있는 모습보다 잠자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회의실 한켠에 아예 야전 침대가 있고, 거기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죠. 방송에서도 '예능국장이 되자 집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놨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미 평 PD일 때부터 회의실에는 침대가 있었습니다. "왜 매일 주무시느냐"는 농 섞인 질문에 "송기자, PD 해봐. 간이 상해"하던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양심냉장고'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당시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정지선을 칼같이 지켰습니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생각, '잘하면 횡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래. 이게 원래 지켜야 하는 선이었지'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파고 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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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이경규와 김PD는 수없이 많은 작은 영웅들을 발견해 냈습니다. 그 많은 주인공들 중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사람은 지하철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 앞에서 망설이는 할머니(네. 이 분이 바로 설정이죠)의 짐 보따리를 선뜻 들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 한 국군 장병이었습니다.

얼굴도 늠름하게 잘 생겼던 이 장병은 "할머니를 보는 순간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가 생각났다"는, 쪽 빠진 멘트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선물을 받고 난 마지막 말까지도 "혼자 휴가 나와 미안한데, 동료 전우들에게도 한턱 내야 겠다"는 환한 웃음으로 마무리하더군요. 장동건이 나온 들, 이영애가 나온 들 이보다 멋진 방송을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김PD와 이경규의 실험은 "톱스타 없이도 시청률 1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전례를 확실하게 남겼습니다. 물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실험과 도전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낳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극복한 건 아이디어에서 끝나지 않는 끈기와 뚝심의 힘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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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도 일본 후지TV 연수 얘기가 나오던데, 이분이 일본 연수를 다녀와서 하신 얘기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10년 이상 전의 얘기라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에 가니 우리와 큰 차이 없는 방송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인력이 우리의 몇 배나 됐다. 예능 프로그램 하나 만드는데 PD가 10명, 스태프가 60명이 넘었다. 현지인들에게 '우리는 이런 걸 PD 2-3명이 한다'고 했더니 다들 놀라면서 '아, 한국 PD는 슈퍼 PD다'라며 칭찬을 하더라. 그런데 그날 저녁, 술자리에 갔는데 선임 PD가 한마디 하는거야. '사실은 일본도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더 높은 품질을 위해 급속도로 투입하는 인력이 많아진거다. 다 필요해서 늘렸다.' 그러니까 낮에는 예의상 그렇게 얘기했던 거지."

2009년, 한국 예능 프로그램도 2시간짜리 주말 버라이어티를 만드는 데 모두 합치면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투입됩니다. 하지만 예전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국장 아닌 김PD의 복귀 출사표는 마냥 반갑습니다. 뭐 늘 성공하는 프로그램만 만드신 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한 건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p.s. 혹시 이 글 보시게 되면 책 한권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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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영결식이 새벽에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참 지나서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tvN에서 새벽 1시부터 생중계라는 자막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시작할 생각은 안 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포기하고 그냥 잠들어 버렸는데 2시30분에나 시작했더군요. 다행히 아침에 스트리밍 채널을 찾아 행사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자막도 없고 해설도 없는 방송;; 한번 보고 뭘 쓰려니 좀 꺼려집니다만, 아무튼 중계를 못 보신 분들이나, 보시고도 기억할 거리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 정리해 봅니다. 아무래도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정리된 내용은 별로 없을테니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행사 지켜보신 분들의 많은 지적과 수정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좀 더 남을 가치가 있는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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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7월7일, 미국 서부 시간 11시 로스 엔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

- 스모키 로빈슨이 다이애나 로스와 넬슨 만델라의 서한을 관객들에게 읽어줌.
로스는 "마이클은 내 인생에서 뭐라 표현하면 좋을지 적절한 말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다. 그가 내게 그의 아이들을 부탁했으니, 나는 그들이 나를 원할 때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함.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공연하면서부터 그를 알게 됐고, 그와 점점 친근해져 나중엔 가족의 일부가 됐다. 마이클은 거인이었고, 음악계의 전설이다. 수백만 팬들과 함께 애도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음.

- 7명의 남자들이 마이클 잭슨의 관을 무대로 옮김.

- 성가대의 찬송.

- 루시어스 스미스(Lucius Smith) 목사의 추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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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라이어 캐리와 트레이 로렌즈(Trey Lorenz), 잭슨5의 히트곡 'I'll be there'를 부름. (그러나 돌고래 소리는 트레이 로렌즈의 몫...) 마지막은 캐리의 "We miss you."

아시다시피 이 노래는 캐리의 초기 히트곡이기도 하죠.

- 퀸 라티파(Queen Litifah), 추도시 낭송

-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  'Jesus is my love'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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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 고디(Berry Gordy, 전 모타운 레코드 사장) 추도
'드림 걸즈'를 통해 잘 알려진 베리 고디는 마이클 잭슨을 비롯한 수많은 흑인 음악의 슈퍼스타들을 발굴해 키워낸 인물.
"그는 내겐 아들과도 같았다. 재키, 저메인, 티토, 말론과 함께 그를 만났을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는 모두 그가 특별하고 세상을 앞서가는 아이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상에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The Greatest Entertainer Ever Lived)였다."

...다이애나 로스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게 좀 의외로군요.


- 마이클 잭슨 추모 비디오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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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비 원더 등장. 간단한 스피치와 함께 "I Never Dreamed You'd Leave in Summer"와 "They Won't Go When I Go" 두 곡을 부름. 노래 도중 "Michael, why didn't you stay?" 라는 가사로 관객들을 뭉클하게 함.

- 코비 브라이언트 & 매직 존슨 등장.
브라이언트는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팝스타로서의 그를 기억하자. 그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다"고 추도.
Remember the Time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한 매직 존슨(그도 MJ군요...), "그의 형 재키 잭슨과 알고 지낸지 벌써 30년이다. 그와 말론은 레이커스 홈티켓 소지자다. 그러면서 자연히 마이클과도 친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나를 좀 더 나은 포인트가드로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는 흑인들에게 세상의 문들을 열어줬다. 그를 통해 흑인들은 각계에서 보다 많은 기회를 얻게 됐다"고 좀 길게 추도.

Remember the Time에는 에디 머피, 이만, 매직 존슨이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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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니퍼 허드슨, 잭슨의 'Will you be there' 부름.

- 알 샤프톤(Sharpton) 목사(흑인 민권운동가). "절대 포기하지 않아서 그는 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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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메이어, 일렉트릭 기타로 잭슨의 'Human Nature'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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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룩 실즈 등장. 
"13세때 그를 처음 만났다. 우리가 한창 여기 저기서 사진을 많이 찍히고 다닐 때, 사람들은 주로 우리를 이상한 커플, 존재할 수 없는 커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동질감을 느꼈다. 가끔 나는 '난 11개월 때 데뷔했는데 당신은 다섯살때 데뷔했나? 게을러(slacker)' 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는 가끔 내게 문워킹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나는 배우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주로 그를 왕(King of Pop)이라 불렀지만, 내 생각에 그에게 알맞는 이름은 어린 왕자다. 그는 너무나 많은 명곡들을 만들었지만 마이클 잭슨이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Smile'이었다. 이 노래는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를 위해 직접 작곡한 노래였다."

1980년대, 브룩 실즈와 마이클 잭슨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염문설'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잭슨이 성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가짜 애인이 필요한 모양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죠. 아무튼 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면서 열애설은 꽤 오래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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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메인 잭슨, 'Smile' 부름.

- 마틴 루터 킹 3세(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아들)과 누이동생 버니스 추도사.

- 셸라 잭슨 리(텍사스 주 출신 의원. 흑인 민권운동가), 잭슨의 인권 기여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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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셔 등장, 잭슨의 'Gone too soon' 부름. 감정에 복받쳐 흐느낌.

베이비페이스의 MTV 언플러그드 라이브에서 잭슨이 부른 이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 잭슨5 시절의 추모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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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 등장.
"(Who's Loving you의 끝자락이 흐르자)네. 제가 이 노래를 만든 사람입니다. 10살때의 잭슨을 처음 봤는데 이건 10세 소년의 노래가 아니었어요. 그 나이에 그런 soul이 들어 있는 아이는 처음이었죠. 그는 세상 최고의 축복이었어요."

스모키 로빈슨은 당시 모타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가수 겸 작곡가였습니다. 로빈슨의 Who's Loving You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리메이크됐지만 누구나 이 노래를 잭슨5, 혹은 마이클 잭슨의 노래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탁월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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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섀힌 자파골리(Shaheen Jafargholi), 잭슨5의 'Who's Loving You' 부름.
노래 끝난 뒤 "정말 감사드려요. 사랑합니다. 마이클 잭슨"이라고 코멘트.

잘 아시겠지만 얼마 전 '브리튼스 갓 탤런트'를 통해 마이클 잭슨의 재림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소년 가수입니다. 이번 This is it 공연에서 설 예정이었다는군요.

- 케니 오르테가(Kenny Ortega, 공연 디렉터, 안무가)
This is it 공연을 준비하던 디렉터이자 잭슨의 사업 파트너였다고 자신을 소개. 잭슨이 얼마나 This is it 공연에 공을 들여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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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슨의 공연을 준비하던(?) 백 보컬들이 'We are the World'를 부르며 모든 등장인물들이 무대로 올라옴. 노래가 'Heal the World'로 바뀌며 어린이 합창단이 무대를 감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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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들의 추도사. 잭슨의 딸 패리스(Paris), "아빠는 정말 최고의 아빠였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림.

- 루시어스 스미스 목사, 폐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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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대중 아티스트의 영결식'이란 느낌이 역력했습니다. 추도하기는 하되 모든 것이 엔터테인먼트의 일부라는 사실이 너무도 뚜렷했죠. 추도사를 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청중들에게 웃음을 자아냈고, 퍼포먼스에 나선 가수들은 최선을 다해 노래했습니다. 어셔가 노래 막판에 울음을 터뜨렸지만, 슬픔으로 인해 노래가 끊겨서는 안된다는 프로 정신도 돋보였습니다. 팝의 제왕에겐 영결식도 훌륭한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압권은 잭슨가 형제들의 패션입니다. 모두 저렇게 검은 양복에 노란 넥타이, 그리고 검은 선글래스와 한 손엔 잭슨의 반짝이 장갑으로 통일했더군요.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제왕은 이 세상과 결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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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의 매화'가 호기심을 자극한 MBC TV '선덕여왕'의 한편이었습니다. 물론 일부러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시도이니 6일 방송에서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을 것은 뻔하지만 아무튼 정보 빠른 네티즌들에 의해 이미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사다함의 매화는 월력, 즉 달력이었죠. 미실이 기우제를 지내자 바로 비가 온 것도 사실은 미실이 선진 책력을 이용해 천기를 짐작한 덕분이었던 겁니다.

과학 기술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김영현 작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미 '서동요' 때, 시청자들이 기대하던 신라와 백제의 패권 다툼 이야기보다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전파 이야기에만 주력하다가 시청률이 고비(30%)를 넘기지 못한 기억이 여전하겠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김작가는 다시 과학 이야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물론 '서동요'때는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꽤나 근거 있는 이야기가 될테니 - 어차피 드라마 후반에 첨성대 이야기가 나와야 할테니까요 - 너무 과학 기술 이야기에 깊이 빠지지만 않는다면 이번엔 시청률에 대한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 아무튼 달력은 달력이고, 사실 사다함과 미실 사이에는 다른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화랑세기'가 부인하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너무 의혹이 짙은 부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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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다함의 매화'가 달력이라는 것은 제작진의 1급 비밀이었지만 드라마가 끝난 직후 검색해보니 이미 '매화의 정체는 달력'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더군요. 뭐 짐작으로 맞췄다 해도 사실 그리 엄청난 건 아닙니다. 소화와 덕만 얘기에서도 달력 이야기가 나왔고, 6일 방송 끝자락, 다음회 예고에 보여준 '책력(冊曆)'이라는 글자(위 사진이죠)가 이미 답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의 각국은 이미 모두 국가 지정 달력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미실 혼자 독점했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듯도 하지만, '보다 정확한 달력'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몰래 감춰 둔 승려는 그걸 신라의 날짜에 맞춰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봐야 하겠죠.

아무튼 아쉬웠던 것은 미실과 사다함의 러브스토리가 너무 축소됐다는 것입니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이야기는 그 자체가 드라마 한편을 충분히 뽑아낼 수 있을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금하신 분은 지난번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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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에서 빠진 내용에 대해 몇가지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사다함은 삼국사기 열전 4권에 전기가 나오는 실존 인물입니다. 실존 여부가 분명치 않은 미실이나 설원 등 '화랑세기'의 주요 인물들(혹은 드라마 '선덕여왕'의 인물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뜻이죠.

 

그런 의미에서 '화랑세기'는 사다함을 중심으로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실은 사다함의 옛 연인이며, 설원은 사다함과 어머니가 같은 형제입니다. 둘 사이는 참 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사다함의 아버지 구리지공이 설성(설원의 아버지)의 어머니를 첩으로 취하자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은 소년 설성을 정부로 취해 설원을 낳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원랑의 입장에서 보면 구리지공은 할머니의 정부이면서 어머니의 남편이라는 복잡한 촌수입니다.^

하지만 '화랑세기'의 이런 기술과는 달리 정사인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사다함은 그냥 씩씩한 화랑일 뿐입니다. 16세의 나이로 5천 병력을 거느리고 대가야 정벌의 선봉을 맡았고,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지만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조한 친구 무관랑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병들어 죽어간 비운의 화랑입니다.

그러나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이 죽은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다시 한번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첫번째 이유는 전쟁에 나간 사이 연인이던 미실이 세종전군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무관이 자신의 낭도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화랑세기' 기록에 따르면 금진은 미실 못잖은 남자 밝힘증 환자입니다. 설성을 비롯해 다섯 남자를 동시에 거느렸고, 아들의 친구인 무관랑도 정부로 삼습니다.

사다함은 이를 알고도 뭐라 하지 못했지만, 사다함의 낭도들은 풍월주의 어머니를 탐한 무관을 용서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무관은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다함의 낭도들로부터 달아나다가 해자에 떨어져 죽고, 무관이 비참하게 죽어간 데 대해 사다함은 비애를 이기지 못합니다. 두 겹의 슬픔이 사다함을 일찍 숨지게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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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 역의 박재정과 미실 역의 유이... 대사가 하나도 없는게 영 아쉽군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다함이 죽은 뒤 세종과 미실 사이에선 아들 하종이 태어납니다. 네. 지금 김정현이 연기하고 있는 바로 그 하종입니다. 과연 이 하종의 친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이 오늘의 미스터리입니다.

 

사다함이 죽은 뒤에 대한 '화랑세기' 세종전의 기록입니다.

(사다함이 죽은 뒤) 천주사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과연 사다함공이 미실의 품에 들어오며 "나와 그대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그대의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 하였다. 미실이 세종공에게 아뢰니 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을 낳았다. 하종공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누가 봐도 저 '그렇지 않다' 가 너무 궁색한 변명으로 들립니다. 또 미실이 진흥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권세가 날로 높아가는 대목을 설명하는 데에도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영혼이 미실의 가슴 안에 있으며 좋은 계책으로 도와주는 덕분이라고 하였다.

물론 '화랑세기'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이 자손을 낳을 때 한 여자가 아버지가 제각각인 아이들을 낳는 것은 흉이 아닌 듯 합니다. 하지만 이미 아버지가 죽고 없는 아이라면, 왕의 아들인 전군의 아들로 포장하는 것이 죽은 화랑의 아들이 되는 것 보다는 장래를 위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세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하종은 뒷날 전군의 칭호를 달고 왕자 대접을 받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봐도 하종의 생부는 세종이 아니라 사다함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무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이 '사다함의 좋은 계책'이 바로 달력이 된 셈입니다. 혹시 '선덕여왕'에서도 나중에 언젠가 세종의 입으로 "하종이 내 아들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뭐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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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나저나 대남보가 미생의 아들이었다니, 실망입니다.

미실이 왜 조카를 못 알아보는지 궁금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본래 미생은 수많은 첩들로부터 수많은 아이들을 낳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선덕여왕'에서도 미실이 미생에게 "아우님은 자기 아이들 이름은 다 압니까?"하고 면박을 주는 장면이 나왔죠.

 

대남보가 누군지 궁금하신 분들은 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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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콩을 들다'가 얼마나 선전할지에 관심이 몰리고 있습니다. '트랜스포머 2'가 전체 스크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개봉관을 많이 잡지 못한 것은 분명한 일일 듯 한데 관객은 꽤 몰리고 있는 듯 합니다.

'킹콩을 들다'는 그 배경이 현재이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과 많은 부분에서 겹칩니다. 장미란이 금메달을 딴 2008 베이징 올림픽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장미란은 출연하지 않았지만 한국 역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전병관 감독과 이배영 선수가 나옵니다. 실명으로도 여러번 거론되는 전병관은 국가대표 감독 역으로, 이배영은 역도 심판 역으로 나오죠.

그런데 시점이 친숙하다 보니 과연 영화의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일단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역도 동메달을 딴 이지봉 감독'은 실존 인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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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줄거리를 살짝 살펴봅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앞둔 여자 역도 선수 박영자(조안)은 출국 직전 옛 친구들로부터 소중한 추억이 담긴 앨범과 이지봉 선생님(이범수)이 남긴 동메달을 건네받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옛 추억에 잠깁니다.

10여년 전, 한 시골 여자중학교 교장이 테니스부와 사격부에 이어 역도부를 신설합니다. 하지만 코치로 내려온 '88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이지봉 선생은 아이들을 지도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역도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그는 역도부를 형편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급식하는 곳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꿈은 그렇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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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떠오르는 궁금증은 88올림픽에서 역도는 어떤 성적을 거뒀나 하는 겁니다. 당시 52kg급의 전병관이 은메달, 82.5kg급의 이형근이 동메달을 땄습니다. 이형근 감독은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때 남자 역도 팀의 감독을 맡았던 그 분입니다. 일단은 동메달이라는 점에서, 아예 없는 얘기는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병관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다음 대회,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입니다.)

하지만 이형근 감독은 운동을 때려 친 적도, 술집 웨이터를 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범수와는 체급이 좀 다르죠. 이범수의 체격에 82.5kg급은 좀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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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재혁의 팔을 번쩍 들어주는 분이 이형근 감독입니다. 사진이 어찌나 없는지.)

'킹콩을 들다'가 끝날 무렵이면 이 영화가 실제 모델로 삼았던 고 정인영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화에선 이지봉 코치의 지도를 받은 학생들이 전국체전을 휩쓰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지난 2000년 정인영 감독이 지휘하던 전북 순창고 여자 역도 선수들이 남긴 기록을 모태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순창고는 5명의 선수가 출전해 15개 부문 중 14개의 금메달을 가져가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당시 박은진 이현정 등의 선수들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이밖에 순창고 출신 남자 선수로는 이배영이 있죠.

정인영 감독은 역도 영웅 전병관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분입니다. 본래는 역도 문외한일 뿐, 그냥 체육교사였던 이 분은 전북 진안 마령중학교에서 역도부를 창설하고 그때부터 이론서적을 읽어가며 선수들을 훈련시켰다고 합니다(이 분의 경력을 보다 보면 수영과 롤러스케이트 코치로도 명성을 떨쳤더군요). 이때 그 학교에 전병관이라는 소년이 발굴됐죠. 그리고 2000년, 전국체전 순창고의 신화를 남긴 뒤 그해 뇌출혈로 작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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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지도하던 선수들과 함께 한 정인영 감독의 모습. 영화에도 잠깐 이 사진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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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조안이 이 영화에서 박영자라는 이름의 선수로 나오는데, 박영자라는 실제 역도 선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2001년 전국체전 당시 전북체고의 박영자 선수는 48kg급에 출전해 3관왕이 됐습니다. 이 선수 역시 순창여중 시절 정인영 감독의 지도를 받았고 전북체고로 진학해 여자 역도 유망주로 명성을 떨쳤더군요. 하지만 이 선수는 베이징 올림픽 무대를 밟지는 못했습니다. (굳이 진짜 선수의 실명을 쓴 이유는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라면 이 영화의 무대는 정작 보성이 아니라 순창이어야 했을 것 같은데, 여기에도 무슨 사연이 또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제 영화 얘기로 넘어갑니다. 많은 분들이 '우생순'과 비교하는 이 영화는 두 가지로 평이 갈릴 여지가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하자면 정석에 충실하고 진정성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이를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도식적이고 촌스러운 영화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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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의 역자도 모르는 소녀와, 역도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진 지도자가 만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극장에 가면, 여러분이 상상한 모든 것이 영화에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극빈자 소녀, 다른 운동부와의 신경전, 미남 소년에 대한 짝사랑, 못된 다른 코치, 부상, 세상의 몰이해.... 순서대로 나옵니다. 그리고 주로 이범수의 대사에 나오는 70년대풍의 '공자님 말씀'도 가끔 몰입을 방해합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보는 사람들을 자지러지게 웃게 하고, 눈물을 짜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 진정성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이 영화의 1등공신은 여섯명의 역도소녀들입니다. 정말 고교 운동부 선수처럼 보이는 이 아가씨들은 그야말로 영화 찍는 내내 죽을둥 살둥 뛰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이범수도 여느 때처럼 좋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필생의 명연기로 꼽기엔 대본이 너무 정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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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준 사람이라면 교장 역의 박준금을 꼽게 됩니다. 아주 오래 전,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에서, 김수현 작가의 리메이크 '사랑과 야망'을 통해 연기파 중년 배우로 변신해(이유리의 시어머니 - 전노민의 어머니)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분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아주 '작살인' 코믹 연기를 보여줍니다. 아마도 '킹콩을 들다'에서 가장 창의적인 부분을 꼽자면 이 교장 캐릭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연 이 영화도 '우생순'의 기적을 재현할 수 있을까요. 트랜스포머의 압박이 무척 거세긴 하지만 이번 주말을 넘기고 이 영화가 얼마나 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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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보성여중은 실제로 있는 학교입니다. 서울에도 남산 자락에 보성여중-여고가 있지만, 차 산지로 유명한 전남 보성에도 보성여중이 있습니다. 역도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중앙여고라는 학교는 없는 지역이 없는 듯 합니다. 서울과 광주에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제주, 김해, 포항, 창원에도 있다고 합니다.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중 지리적으로 보성과 가장 가까운 곳은 여수 중앙여고인 듯 한데, 이 학교도 역도부가 있다는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학교와 관련된 부분은 그냥 이름만 빌려 왔다고 알고 있으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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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시사회에 온 장미란 사재혁 선수. 영화에 장미란이 나왔으면 정말 대박이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쉽습니다. '무릎팍도사' 때의 말솜씨를 생각하면 연기도 천연덕스럽게 잘 할 것 같던데.. 물론 선수는 경기에서 좋은 성적 보여주는 것이 최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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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뷰에 올라온 연예 관련 포스팅 중에서 황당무계한 것을 보게 되는 건 꽤 일상적인 일이긴 합니다. 아무래도 인터넷 이용자들의 관심도 높고, 또 특별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포스팅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도 합니다.

블로그라는 것은 대개 자기의 의견을 자기 생각대로 쓸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다음 뷰와 같은 포털의 채널을 통해서 꽤 많은 블로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열배, 백배, 천배 이상 크게 증폭시켜 세상에 던질 수 있게 됐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이런 것은 매체 종사자들의 특권이었죠. 이 특권이란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특권이란 책임 없이 손에 쥐어선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책임이란 뭘까요. 당연히 거짓말을 해선 안되고,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전달해도 안 되고, 근거 없는 얘기를 해도 안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커진 특권에 비례하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바로 '큰 목소리'에 따르는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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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가 길었지만 본론은 이렇습니다. 한 블로거가 자기 블로그에 '박진영의 거짓말이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라는 포스팅을 했습니다. 내용인 즉 박진영이 지나치게 소위 '매스컴 플레이'에 의존하고 있으며, 많은 거짓말로 언론과 독자들을 현혹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진영이 비를 띄우고, 원더걸스를 띄운 것은 언론사와 결탁해서, 기자들에게 거짓 기사거리를 제공하고 그 기사를 본 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들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속아서 생긴 결과라는 식입니다.

그 포스팅을 보다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클릭하시면 글자가 안 깨져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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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따르면 요즘 박진영이 하고 있는 거짓말의 예에는 대략 세가지가 있습니다(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짓말 중에서 대표적인 세가지를 꼽은 것이겠죠). 가능한 한 원문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1. 원더걸스를 미국 가수(조나스 브라더스)의 콘서트 게스트로 내보내면서도 미국을 정복한 것으로 포장하고 싶어 한다.

2. 알 켈리와 인간적인 아픔을 공유한 사이라고 떠벌리게 만들었다.

3. 미국 한 블로거의 포스팅을 가져와 미국 언론 전체가 그와 원더걸스를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짓도 했다. 마치 한국 어느 블로그에 싱가포르 가수와 관련된 글이 포스팅되면, 그 가수가 한국에서 최고 인기 가수로 주목받고 있다는 우습지도 않은 논리까지 가져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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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거짓말은 좀 아리송한 부분이 있습니다. '포장하고 싶어한다'.... 프로듀서가 자신의 가수를 더 크게 포장하고 싶어 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없죠. 가능하면 어떤 프로듀서라도, 사소한 것 하나라도 자신의 가수가 한 것이라면 크게 보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박진영이 원더걸스의 오프닝 출연과 관련해 보낸 보도자료들을 다시 살펴봐도, "...이로써 대한의 딸 원더걸스는 미국 대륙을 정복하고 톱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와 같은 구절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톱스타들도 처음에는 자기보다 먼저 성공한 스타들의 오프닝에 출연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는 식의 의미 설명이 붙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프닝 쇼에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아, 원더걸스가 미국 최고의 스타가 됐구나'라고 생각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기자들이 원더걸스가 '미국에서 아무개의 쇼 오프닝에 섰다'는 기사를 크게 처리하는 것은 원더걸스가 한국에서 스타이기 때문이지, 오프닝에 선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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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두번째, 알 켈리와 박진영이 얼마나 친한지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 부분은 쉽게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자, 알 켈리 같은 거물과(알 켈리 대신에 브래드 피트라든가, 안젤리나 졸리라든가, 버락 오바마라든가, 다른 이름들을 넣어 봅시다) 친분이 있다면, 토크쇼에 나와서 그런 걸 자랑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일겁니다.

이 블로거는 아마도 자랑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친분을 과장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박진영은 그동안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문화계 거물들과 친분을 자랑해왔죠.

이를테면 박진영과 릴 존(21세기 초 미국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하나)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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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지 직접 봤다고 하더라도, 정말 이들과 아픔을 공유하고 마음속을 내보이는지는 알기 힘들죠. 그런데 문제는 그 부분에 있습니다. 박진영이 '알 켈리와 정말 친하다'고 말한다면, 그걸 반박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는데, 쟤들 실제로는 하나도 안 친해"라는 주장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저 블로거는 대체 박진영과 알 켈리 사이의 친분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요? 그들이 '박진영이 주장하는 것 만큼 친하지 않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참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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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거짓말에 대해서는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 부분을 계속 다시 읽어보다 보면 혹시 이 블로거가 박진영과 원더걸스의 열혈 팬이고, 박진영의 안티 팬들을 조롱하기 위해 이런 낚시 포스팅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JYP 쪽에서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을 환영한다'는 포스팅을 반가워한 블로그는 그냥 우수마발의 블로그가 아니라 유명한 페레즈힐튼의 블로그(perezhilton.com)이기 때문입니다. (이 블로그가 처음 소개될 때에는 '파리스 힐튼의 블로그'라고 잘못 소개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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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블로그라고 되어 있으니 어쨌든 블로그이긴 합니다. 하지만 판자집도 집이고, 타워팰리스도 집이죠. 더 실감나게 하자면 유원지의 오리배도 배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도 뱁니다. 똑같이 '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냥 다 같은 배라고 할 수는 없겠죠.

페레즈 힐튼은 한때 자신의 블로그의 하루 방문자가 800만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고, 그의 적들은 "그건 말도 안된다"고 반박한 적도 있었죠. 아무튼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누구도 그 트래픽이 엄청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알렉사(alexa.com)를 이용해 페레즈힐튼 닷컴의 트래픽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봤습니다. 이곳에서는 트래픽을 숫자로 보여주지는 않고, 상대평가로 등수만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세계적인 사이트들의 트래픽 총량을 대략 비교할 수 있는 곳으로는 이 정도가 유력합니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1위는 뭐니뭐니해도 구글. 중국의 바이두가 9위, 한국이 자랑하는 네이버는 88위에 올라 있습니다. 페레즈힐튼 닷컴은 427위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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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위가 어느 정도인가 비교해보기 위해 다른 사이트들을 찾아 봤습니다. 한국의 네이트가 463위입니다. 뭐 이건 서구 이용자을 대상으로 주로 조사하다 보니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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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닷컴이나 롤링스톤스 매거진이 2000위 대에 올라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특종 보도로 최근 약진한 인터넷 뉴스 사이트 tmz.com이 450위군요. 한마디로 페레즈힐튼은 그냥 블로거가 아닙니다. 권위는 어쨌건 미국에서 16세-20세 사이 여성들이 선호하는 사이트 1위라는 보고도 있었고, 그 영향력이 어지간한 매체를 능가합니다.

블로그를 통해 성장한 그는 요즘 전국 각 라디오사에서 방송하는 신디케이트 라디오 쇼를 갖고 있고, 수없이 많은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했습니다. 올해는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기도 했죠. 오히려 이제는 그 자신이 셀러브리티가 된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이 원더걸스를 소개한 것과, '한국의 일개 블로거가 싱가포르의 듣보잡 가수를 소개한 것'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건 몰상식의 극치이거나, 대단한 유머감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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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블로거가 혹시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괜히 내가 낚시에 걸려 농담을 진담으로 오해하고 있는게 아닌가 열심히 다시 읽어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물론 '홍보에 의존하지 말고, 진정한 실력으로 가수를 평가하자', '미디어가 하는 말을 그냥 수용하지 말고 꼼꼼하게 체크하고 감시하자' 다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말은 더욱 해롭습니다.

문제의 포스팅은 이미 4만여명이 봤고, 무려 800명이 이 글에 동의한다는 추천을 했더군요. 이 정도면 자신의 글에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이렇게 무책임한 주장으로 네티즌들을 선동해선 곤란합니다. 이런 글은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닙니다. 박진영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 쪽에 더 가깝죠.


p.s. 혹시 내 댓글이 왜 삭제됐나 궁금해하는 분께 대답: 같은 아이피로 여러 사람인척 하는 댓글은 사절입니다. 앞으로 댓글 달고 싶으면 한가지 닉을 이용하세요. 익명이라는 이유로 어둠 속에서 음침하게 굴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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