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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호풍환우(呼風喚雨)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프로야구 한화이글스의 김인식 감독은 그런 의혹을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을 완패한 상황에서 지난 21일 내린 단비는 한화의 숨통을 터 줬고, 하루 연기돼 열린 2차전에서는 바람이 매 상황마다 한화에 유리하게 불었다. 1회말 삼성 조동찬의 홈런성 타구가 역풍에 꺾여 잡히는가 하면 기회 때마다 한화 타자들의 타구는 순풍을 탔다. 그야말로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빌린 적벽대전같은 한판 승부였다. (이건 2007년 한국시리즈의 상황을 놓고 한 얘깁니다. 지금 상황과는 무관하지만, 이 자리에 최근 벌어진 WBC 멕시코전 상황을 대입하면 같은 결론이 됩니다. 더블스틸, 번트, 버스터, 좌-우 투수들의 정신 없는 계투, 여기에 때맞춰 터져 준 타자들의 장타... 그야말로 현란한 '야구의 모든 것'이었죠.)

 아직 올해 한국시리즈의 최종 결과를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만약 김인식 감독의 이런 스토리가 실제상황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흥행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감독이 무슨 마술사라도 되나. 세상에 저런 만화같은 스토리가 어디 있냐. 대본에 개연성이 없다"며 혹평을 퍼부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야구장에서 '영화같은 일'이 일어나면 관중들과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것이 불보듯 뻔하지만 극장에서 '영화같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나 당연한 일로 여긴다. 즉 같은 사람이라도 야구장에 갈 때와 극장에 갈 때에는 기대하는 극적 감동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현실이 극적 상상력을 능가해 버리는 상황은 스포츠의 세계에선 그리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흔히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중에는 의외로 히트작이 드물다. 야구를 국민적 여가(national pastime)라고 부르는 미국에서도 야구를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 중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소재로 한 코미디 <메이저 리그>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흥행작이 없다.

 한국도 큰 차이는 없다. 이장호 감독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흥행 대박을 기록했을 뿐, 전설의 고교야구 영화 <자, 지금부터야>에서 <YMCA 야구단>, <슈퍼스타 감사용>에 이르기까지 '야구 영화'하면 내세울만한 작품이 딱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원래 야구영화는 안된다고 말해 버리기엔 저변이 너무 아쉽다. 매년 야구장을 찾는 관중만도 300만. 이승엽이며 박찬호의 성공 스토리, 올 연초 WBC 4강에 열광했던 잠재적인 야구 팬들은 한둘이 아니다. 프로 야구가 등장한지도 24년이나 돼 기반도 성숙했다.

 게다가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기 연예인들이 팀을 구성해 직접 공을 던지고 때리며 정규 리그를 치르고 이를 TV로 중계까지 하는 나라다. 개중에는 장진, 김상진 감독이 소속된 팀도 있고, 리그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야구단 플레이보이스에는 장동건 김승우 주진모 황정민 조인성 등 현역 최고의 톱스타들이 주전으로 뛰고 있다.

이 정도 저변이면 이제는 한국에도 '이런 야구 영화가 있다'고 말할만한 영화 한 편쯤이 나올 때가 된게 아닐까. 연예계 애구파(愛球派)들의 분발이 기대된다. (끝)





굳이 지금 이 글을 다시 올린 건 어제 올린 글이 너무 묻힌 데 대한 아쉬움입니다.



김인식 감독 얘기가 나와서 하는 얘긴데 이 분의 야구관에는 참 독특한 데가 있습니다.

김감독의 두산 재임 시절 한 선수와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선수: 감독님은 땅볼 치는거 별로 안 좋아해요.

나: 왜?

선수: 사실 땅볼로 깔아 쳐도 각 잡아서 잘 갈라 치면 안타 나오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은 플라이로 날아가는 공 치라고 맨날 그러세요. 신인들이 땅볼 치면 물어봐요.

나: 뭐라고?

선수: 이렇게요.


(김감독): 야, 내야에 (수비가) 몇명 서 있냐?
(신인): 여섯명요.
(김감독): 그럼 외야엔 몇명 서 있냐?
(신인): 세명요.
(김감독): 그럼 내야가 더 넓어, 외야가 더 넓어?
(신인): ...외야요.
(김감독): 그럼 자식아, 내야로 쳐야 되냐, 외야로 쳐야 되냐?
(신인): ...외야요.



나: 음.... 맞는 말이잖아. ;

선수: 맞는 말이긴 해요.


뭐, 감독님의 유머였는지, 진지한 얘기였는지는 지금은 알 길이 없네요. 하여간 김인식 감독님, 같이 있으면 절대 심심하지 않은 특급 유머감각의 소유자셨습니다. 건강 때문에 좋아하시던 술도 못 드신다는데 참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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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중되는 업무로 짜증만 늘어가는 나날에 WBC 경기는 단비와도 같더군요. 초반에 류현진이 살짝 흔들릴 때만 해도 잠시 불안하더니, 여지없이 뒤집는 솜씨는 짜릿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일본전 콜드게임패 이후 김인식 감독님을 비방하는 어처구니없는 찌질이들의 손질에 분개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실력으로 이렇게 모든 걸 보여주시는 데 감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감독님의 '집안 칼' 들인 류현진 김태균 이범호가 이렇게 펄펄 날아 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나머지 7개 구단 팬들이 한화 팬들에게 점심이라도 사야 할 듯 합니다.

모처럼 이른 야구의 계절을 맞아 옛날 추억을 되살려 써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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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감독과 영화 감독

90년대 초. 처음 신문사에 들어가자 야구 담당을 시켰다. 워낙 야구를 좋아하던 터라 거리낄 건 없었지만 야구 담당 기자라는 건 알고 보니 장돌뱅이였다. 노트북과 속옷을 둘러메고 전국 산천을 유람하는게 일이었다.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된 어느 날, 한 야구단 직원과 여유있게 노닥거리고 있었다. 서로 야구관이 달라서(물론 팬과 경기인의 시각 차이였겠지만) 옥신각신하던 차에 살짝 흥분한 그 양반이 물었다. "그래서 송기자가 생각하기에 한국 최고의 감독은 누구요?"

아니 그렇게 쉬운 걸 묻다니. "그야 임권택 감독이지." 그 다음날부터 다른 구단 직원들의 눈길이 달라진 걸 느꼈다. 그 양반이 "되게 웃기는 기자가 들어왔다"고 소문을 냈다나.

야구에도 감독이 있고 영화계에도 감독이 있다. 한국에선 다 감독이지만 원산지에선 야구 감독은 매니저(manager)고 영화 감독은 디렉터(director)다. 야구 감독은 운영자고 영화 감독은 지시자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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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복장 김경문 감독이 거짓말같은 한점차의 명승부를 연발하며 8전 전승, 감동의 금메달로 전 국민을 오르가즘에 빠뜨렸다. 이때 메달권에도 들지 못한 일본 야구 팬들은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WBC가 있다." 나오는 스타들을 보자면 솔직히 그렇다. 올림픽이 선댄스라면 WBC는 오스카다.

WBC를 앞두고 한국엔 썩 좋지 않은 소식이 잇달아 들려왔다. 영화로 치자면 흥행이 보장된 톱스타 이승엽과 박찬호의 캐스팅이 잇달아 불발됐고, 김병현은 여권이 없어서 출연할 수 없다는 통보를 했다. 추신수는 깐깐한 소속사에서 액션 신은 촬영해선 안된다고 감시 매니저를 붙였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영화를 살리는 최고의 조연배우 박진만마저 만두를 먹다 체해서 촬영장에 나오지 못했다. 명장 중의 명장 김인식 감독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지만 스타 없는 영화는 소 없는 찐만두다(박진만씨, 죄송합니다).

반면 같은 날 개봉하는 경쟁작을 만드는 재팬 픽처스는 신바람이 났다. 다르빗슈, 오가사와라, 조지마 등 일본을 대표하는 톱스타들이 자발적으로 출연 요청을 한데다 할리우드(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마쓰자카, 조지마, 이치로, 이와무라까지 참여를 선언했다. 그나마 뉴욕 양키스의 마쓰이가 빠져 1.00군이 아닌게 다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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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개봉 첫주는 콜드게임으로 끝났다. 일본 작품은 작품성과 재미를 겸비했다는 극찬을 받은 반면 한국의 주인공 김광현은 "가서 다트 게임 CF나 더 찍으라"는 혹평을 받았다. 냄비같은 언론들이 또다시 '한국영화 위기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지의 한국은 패자부활전을 딛고 일어섰고, 결국 30만 달러의 추가 보너스가 걸린 1라운드 1-2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제압했다. 김인식 감독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영화 감독과 야구 감독 얘기로 돌아간다. 두 감독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야구 감독은 선수와 똑같은 유니폼과 모자를 쓰지만(대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영화 감독이 배우처럼 입고 메이컵을 하면 스태프들이 수근거린다. 영화 감독은 배우의 동작이 마음에 안 들면 들때까지 다시 시킬 수 있지만 야구 감독에겐 한 번의 기회뿐이다. 즉 영화 감독은 각본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야구 감독은 각본 없이 드라마를 만든다. 배우 출신 영화감독은 그리 많지 않고 명감독으로 남는 경우도 별로 없지만(누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될 수는 없다) 선수 출신이 아니면서 야구감독이 되는 경우는 아예 없다.

하지만 공통점도 많다. 두 사람 모두 수십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자기 일에 최종적인 책임을 지며, 연패를 당하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성공해도 자기가 스타로 만들어 준 새파란 녀석들만큼 돈을 벌지는 못한다. 그래도 양쪽 모두 현장에서 감독이 죽으라면 톱스타들도 죽는 척 해야 한다.

얘기가 갑자기 산으로 가는 것 같지만 아무튼 하고싶은 말은 이거다. 대한민국 최고의 덕장 김인식 감독님! 영국의 대니 보일이란 감독은 '공도 못 만져본' 인도 꼬마들을 데리고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따냈습니다. 이번 한국 팀도 간판들이 빠져 김이 새지만 감독님을 믿습니다! 파이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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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 맨 위의 질문을 받은 순간엔 참 난감했습니다. 그 구단 직원 형님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그 구단의 감독님이자 당시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불리던 분이 바로 옆에 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때까지 제가 하고 있던 얘기는 '그 감독님이 왜 최고 감독이 아닌지'를 역설하는 거였기 때문에, 무척 곤란해 질 상황이었죠. 그걸 보고 이 직원 형님이 저를 궁지에 몰기 위해 그런 질문을 느닷없이 던진 거였습니다. (임권택 감독님, 감사합니다.^)

아무튼 WBC 얘기로 돌아가서,

실제로 베이징에 왔던 일본 팀도 강팀이었지만, 그 팀과 이번 팀은 무게가 다릅니다. 영화 캐스팅으로 치자면 '오션스 11'에 로버트 드 니로와 안젤리나 졸리가 조연으로 나오는 식이랄까요. 물론 일본 야구의 정식 1군(위에서 말한 1.00군)이 되려면 양키스의 마쓰이가 참가해야 하지만, 이 정도면 진정한 일본 야구의 진짜 실력을 대변해주는 팀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굳이 숫자를 매기자면 1.05군 정도?

반면 한국은 1.2군 정도로 평가해야 할 듯 합니다. 어쨌든 베이징 대표팀보다 현재의 진용이 살짝 무게가 부족하죠. 지금까지 한국이 해외에 내보냈던 최강팀은 개인적으로 1차 WBC 대표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의 시점에서 볼 때 박찬호는 몰라도 이승엽이 빠진 건 한국에겐 실제 전력을 떠나 정신적으로 상당한 허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1.2군이 일본의 1.05군과 당당히 맞서 1승1패를 했다는 건 두고 두고 자랑할 일입니다.

게다가 이번 대회는 2006년 이후 한국 야구 대표팀이 병역 혜택 없이 벌이는 최초의 빅게임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한국 야구의 힘 = 국방부의 힘이라고 비아냥거려온 일부 사람들에게 진정한 실력을 보여줘야 할 계기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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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님의 사퇴에 대해 이래 저래 말이 많지만, 솔직히 말해 한-미-일 대표팀이 최소 팀간 10차전 이상의 리그를 벌인다면, 김성근 감독님만한 적임자는 없겠죠. '김성근식 야구'는 상대와 만나면 만날 수록 조금씩 더 강해집니다. 데이터가 쌓이기 때문이죠.

반면 WBC처럼 단기전에다, 상대에 대한 전력을 거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기에 임해야 한다면, 김인식 감독님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순간적인 대응 능력이나, 자신이 키운 선수 아닌 여러 구단 출신의 톱스타들에게 두루두루 존경을 받는 인화의 힘 등에서 그렇죠. 물론 대표팀 감독 선정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알맞은 감독에게 지휘봉이 넘어간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한번 우승을 기대해 보는 것도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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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야구장의 봉중근 의사처럼 극장가에서는 봉테일 열풍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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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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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이런 좋은 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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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ing the truth to people who misunderstand you is generally promoting falsehood."
 
Anthony Hope Hawkins가 이런 말도 남겼군요.

네. 반성하고 있습니다.



p.s. 아, 참고로 4번은 "도둑이 제발 저리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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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고 장자연씨의 가족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려운 걸음이었지만 이번 사건 이후 한번도 언론과 마주 대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적이 없는 분들이어서 그만한 보람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로 그동안 유족들에게 쏟아졌던 오해나 어이없는 비방이 어느 정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유족들을 만나기 전까지 저도 속이 좀 탔습니다. 지난번 글, '장자연을 두번 죽인 KBS 보도'라는 글에 3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다 읽어보지 않아도 90%가 욕설에 가까운 내용이었죠. 아주 노골적인 욕설은 몇개 삭제하기도 했지만, 부분 부분 포함된 욕설은 뭐 다 보이지도 않더군요.

욕설은 아니더라도 저주에 가까운 악플도 많았습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욕을 섞지 않으면 자기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참 안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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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장자연 유족과의 인터뷰 기사를 먼저 보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http://isplus.joins.com/enter/star/200903/16/200903160300249506020100000201040002010401.html?click=isplus

만난 건 14일이지만 유족과의 교감은 사건 직후 계속 있었습니다. 다년간 이 분야에 종사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누군가 이승을 떠난 사람이 있었을 때 누구보다 아파하는 사람은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자살 사건의 경우, 유족들은 항상 말을 아낍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이 아끼던 사람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죠. 그러는 사이 사방에선 의혹이 판을 치고,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는 저 멀리 물 건너간 얘기가 되어 버립니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갑작스럽게 나타난 H 기획사 대표 유모씨가 던진 파문이 워낙 컸습니다. 돌연 빈소에 나타나 '죽음의 원인을 입증할 문서를 갖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유족들은 문서 내용의 공개를 거부했고, 파문은 그냥 잦아드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발인 다음날인 10일, 조선일보와 노컷뉴스에 '문서가 실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듯 '딱 한줄'의 문장이 공개됐습니다. 유족들은 이에 맞서 '제발 보도를 자제해달라'는 문건을 여러 언론사에 보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대체 저 유족들은 왜 저러냐. 억울하게 죽은 동생의 진실을 밝혀 줘야 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대체 어떤 가족이 자신의 딸, 자신의 여동생의 평판이 망가지기를 원하겠습니까. 더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처자에게 말입니다.

가족들의 분노는 13일 KBS 1TV '뉴스9' 보도에 극에 달했습니다. 오빠 장씨는 지금도 '그런 보도를 내보내려면 가족들에게 사전 상의는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특히 보도 자제를 요청하기 위해 전화한 목소리마저 녹취해서 방송에 사용한 데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더군요.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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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 전후로 번지수를 잘못 찾은 보도가 쏟아졌죠. 문제의 문서를 '유서'라고 지칭하는가 하면 '가족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 맡긴 것'이라는 폭언에서 장자연을 '목숨을 바쳐 연예계 비리를 폭로한 잔다르크' 처럼 몰고 가는 이상한 논설까지 나타났습니다.

문서의 본질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유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뻔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지장을 찍는 유서도 있답니까. 게다가 죽기 일주일 전에 유서를 써놓고 남에게 맡긴 다음 집에서 죽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물론 이 문건이 유서가 아니라는 것은 이런 추측이 아니라, 유족과의 교감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유족들의 코멘트를 이용해 기사를 쓸 수 없었죠. 유족이 그것 조차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쓸데없는 오해가 확산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블로그에 한 줄 붙였습니다.

p.s. 아직도 장자연이 남긴 이 글이 '유서'였다고 생각하고, 장자연이 이 문서의 내용을 밝히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군요. 여기에 대해 제가 말할 권리는 없지만, 이 문서는 유서도 아니고, 장자연이 그 내용을 이렇게 대중 앞에 공개하려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점 만큼은 분명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대체 네가 뭔데, 장자연이 그걸 알리려고 했는지 어떻게 아냐. 유서인지 아닌지 네가 알게 뭐냐'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유족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문제의 문서는 계약관계 해지를 위해 작성한 것일 뿐입니다. 결코 죽음을 예견하고 쓴 글도 아닐뿐더러, 그 글을 쓰고 나서 장자연씨는 장래의 활동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는 것이 유족과 측근의 증언입니다. 결코 '죽음을 예견하고 한 고백' 따위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장자연씨는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이 몰고 가려 했던 '죽음을 무릅쓰고 연예계 비리를 폭로한 잔다르크'는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이 쓴 대로 '힘없는 연예인'이었고,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내민 손을 선뜻 잡았던, 그리고 그 뒤로도 마음의 그늘을 극복하지 못했던 가엾은 아가씨였습니다. 스타덤을 꿈꾸고 연예계에 뛰어들었지만, 결코 이런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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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궁금해하시지 않을 우여곡절 끝에, 14일 낮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집으로 간 것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 밖에 나가기가 겁난다'는 유족들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장자연씨의 지인들과 함께 분당에 있는 집 대문으로 들어서는데 몇몇 기자들이 다가섰습니다. 추운 날씨인데 집 밖을 지키고 있더군요. 멀리 차 안에서 카메라를 대 놓은 사진기자도 보였습니다. 다행히 제가 아는 얼굴은 없었습니다. 다른 기자들이 '뻗치기'를 하고 있는 공간에 이렇게 태연히 들어간 적은 처음이라 저도 내심 긴장이 되더군요.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부모 없이 살아온 삼남매가 막내 여동생을 잃은 슬픔이 어떤 것인지, 아주 미세하나마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남매만 있으면 집안이 너무 어두워질까를 우려한 듯, 친척들이 집에 와 있었습니다. 알려진대로 이 집은 장자연과 언니가 단 둘이 살던 집입니다. 자매가 키우던 고양이 두 마리가 빤히 쳐다보더군요.

인터뷰를 하던 도중 눈길을 끈 것은 장자연의 친언니가 손에 꼭 쥐고 있던 흰 천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옷이었습니다. 왜 옷을 들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연이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라는 겁니다. 옆에 와 있던 장자연의 작은어머니며 다른 친척들이 "그러면 안된다. 이제 그냥 보내 줘야지"하고 야단을 쳤지만 언니는 그 옷을 놓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더 끌고 가려는 언니의 심정이 너무도 짙게 와 닿았습니다.

지난번 글에 유족을 이해할 수 없다며 악플을 단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죽음을 가장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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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을 단 사람들 중에는 압도적으로 '너 대체 기획사에서 얼마나 받아먹고 이런 글을 쓰느냐'는 것도 꽤 있었습니다. 물론 이 정도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악플러들이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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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사람들 투성이입니다. 언니는 언니대로 동생이 죽을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몰랐다는 사실을 미안해 했고, 오빠는 오빠대로 바쁘게 사느라 동생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몰랐다는 걸 미안해 했습니다. 친한 언니는 친한 언니대로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을 진작 언니 오빠와 나누지 않았다는 걸 죄스러워 했습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 산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시간으로 치자면 두어 시간이 눈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지만, 불과 일주일 전 젊디 젊은 혼이 이승을 등진 공간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자마자 몸이 천근이라 쓰러지게 되더군요.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두 사람의 매니저에게 가족들이 느낀 실망과 분노는 여러분이 상상하기 힘든 크기일 겁니다. 경찰 수사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장씨의 오빠에게 물었습니다.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기대하세요?" 솔직히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표정이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누가 나쁜 사람인지는 세상이 다 알 것"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흥분하고 분노하셨던 분들, 여러분이 할 일은 그것 뿐입니다. 잊지 않는 것.


p.s. 상황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는 듯 해서 한줄만 덧붙입니다.

지금 경찰 수사 진행중입니다. 유족도 협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수사를 가로막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도 수사하지 말자고 한 적 한번도 없습니다. 진실이 밝혀지면, 당연히 보도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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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시스'라는 스페인 영화를 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1996년작인 이 영화는 스너프(정사 뒤에 여자를 죽이는 포르노의 일종) 필름을 우연히 발견한 대학생들이 그 배후를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의 결말과 관계없이 마지막 장면은 TV 뉴스 화면입니다. 여성 앵커는 말합니다. "저희는 이 필름을 단독 입수하고, 공개할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결국 저희는 여러분의 볼 권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이 영상을 공개합니다." 미디어의 본질에 대한 아메나바르의 통렬한 '한방'입니다.

그리고 어젯밤 KBS에서 거의 비슷한 멘트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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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방송된 KBS 1TV '뉴스9'의 보도 리드 멘트입니다.

자살한 탤런트 장자연씨가 숨지기 직전에 남긴 자필 문건을, KBS가 단독입수했습니다. 술접대에 잠자리 강요까지, 연예계의 추악한 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KBS는 숨진 장씨의 명예와 불법행위 사이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 문건을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KBS가 이런 보도를 했다는 사실은 다시 다른 매체들에 의해 널리 퍼졌습니다. 유족들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이 문서의 공개를 거부해왔습니다. 그 기사들에 달린 댓글 중 수많은 댓글들 가운데서 "대체 왜 유족들은 이 공개를 꺼린 것이냐. 문서를 공개해서 동생의 억울한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댓글들이 꽤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지금 이런 얘기를 쓰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가족의 심정입니다. 이번 사건이 있은 뒤 유족들은 일관되게 문서의 공개를 거부해왔습니다.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지만 대략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 지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유족의 입장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 어느 가족이, 자신들의 여동생이, 그것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여동생이 저런 식으로 언급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두번째는 과연 문서의 공개가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위 리드 멘트를 보면 KBS의 명분은 '고인의 명예와 불법행위(에 대한 고발이라는 언론의 사명)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것이 더 공익에 부합한다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과연 공개한다고 처벌이 이뤄지고, 공개하지 않는 것은 악을 덮는 일일까요?

자, 여기서 전제는, 진실을 규명하고 악을 처단해야 한다는 데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 멘트는 변명입니다. 왜냐하면, 어제 보도가 나간 문건을 최초 확보한 기자에게는 일단 장자연의 명예를 지키면서도 불법행위를 견제하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확보한 문건을 경찰에게 인계하고, 비공개 수사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미 유족들은 10일 경찰에 문서를 확보하고 수사를 하더라도 절대 내용이 새 나가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일반인들이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듯, 문서의 내용이 공개된다고 해서 그 문건에 명시된 '처벌받아 마땅한 사람'이 곧바로 단죄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KBS 보도국과 해당 기자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보도는 너무나도 기계적인 보도였던 겁니다.

세번째, 아직도 왜 문건의 공개가 공익적이지 않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실 분들을 위해 덧붙입니다. 장자연이 남긴 문서의 내용에 따라 연예계 폭력의 실체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KBS도 저 보도를 할 때 문제의 매니저 이름을 '김모씨'라는 익명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과연 KBS에서 저 보도가 나간다고 해서 저절로 검증이 될까요? 과연 문서에 기록된 불법행위를 문제의 '가해자'들이 바로 인정하고 죄값을 받게 될까요? 이거야말로 수사 전문기관이 달라붙어서 해결해야 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아무튼 정의의 구현이 목적이라면, 기자는 문서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도 경찰이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진실이 입증되고, 책임자의 처벌이 가능해졌을 때 문서의 내용이 보도됐다면 아마도 KBS의 '진정성'을 믿어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의 이런 보도는, 일반 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외에는 실제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KBS 측은 "그건 경찰이 고민할 일이지 기자가 고민할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겁니다. 또는 "미쳤어? 우리가 보도 안 한다고 그 문서가 끝까지 안 나올 것 같아? 비공개 수사 요청? 제정신이야? 그러다 다른 놈들이 냄새 맡고 기사 쓰면 우리는 뭐가 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보도를 할 때에는 더 신중했어야 했던 겁니다. 특종 욕심에 온 정신이 가 있다면 이런 데에 생각이 미칠 리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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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저 고상한 KBS가 '저질 황색언론'이라고 가끔 표현하는 스포츠지 기자로 10년 넘게 일해왔습니다. 연예인들의 열애설 나부랭이를 팔아먹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죽음을 놓고 장난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수많은 연예인들의 죽음을 지켜봤지만, 이렇게 유족들의 간청을 무시해가면서 일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어제 KBS가 보도한 '유족과의 인터뷰'는 장씨의 오빠가 "제발 그런 보도로 자연이의 명예를 해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려고 직접 건 전화였습니다. 그 전화마저도 KBS는 녹취해서 보도에 이용했습니다. 과연 이 보도를 보고도 장자연이 편히 잠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p.s. 아직도 장자연이 남긴 이 글이 '유서'였다고 생각하고, 장자연이 이 문서의 내용을 밝히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군요. 여기에 대해 제가 말할 권리는 없지만, 이 문서는 유서도 아니고, 장자연이 그 내용을 이렇게 대중 앞에 공개하려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점 만큼은 분명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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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길 바라. 나보다 너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 있을거야." 가끔 드라마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대사지만, 현실에서의 이 말은 주로 "이제 네가 지긋지긋해"라는 말의 '고운 말'로 사용되곤 합니다. "어딘가에 네 짝이 있겠지만 난 아니다"라는 뜻이죠.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의 첫번째 시사회는 다른 바쁜 일로 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시사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을 체크했죠. 첫번째 사람에게 어땠냐고 물었습니다. 평소 영화를 냉철하게 보고, 특히 이런 멜러 영화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후배였죠. 그런데 "나쁘지 않다"는 의외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두번째 사람에게 물었을 때엔 놀랄만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번 사람은 업계에 종사한지 10년이 넘은 노련한 여자 관계자. '어땠냐'고 묻자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끝나고 여자 화장실에 갔더니 여기자들이 눈이 벌겋더라. 몇몇은 그때까지도 훌쩍거리고, 내가 들어가니까 다들 민망해하면서 시선을 피하던 걸." 다른 여자 후배 기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나도 좀 찡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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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어떤 영화 제작자도 기자 시사회의 반응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객들보다 냉정하기 때문이죠. '가문의 영광'도 기자 시사회때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정준호 등 배우들이 무척 불안해 하자 제작자는 "야, 이 사람들은 정상이 아니야(?)^^. 진짜 반응을 보려면 일반 시사회때 봐야 돼"라고 안심을 시켰다는군요. 그리고 이 영화는 실제로 '터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자들도 울었다니, 관심이 안 갈 수 없는 얘기더군요. 그래서 부리나케 영화를 봤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뮤직비디오와는 많이 다릅니다)

케이(권상우)와 크림(이보영)은 고교시절부터 단짝처럼 지내던 사이. 서로 부모 형제 없이 외톨이인 둘은 케이의 부모가 남긴 집에서 남매처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러다 케이는 라디오 PD가 되고, 크림은 작사가가 되죠. 두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케이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바로 옆 스튜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치과 의사 닥터 차(이범수)에게 크림이 관심을 보입니다. 하지만 닥터 차에게는 집안에 맺어준 약혼녀(정애연)가 있습니다. 케이는 약혼녀와 닥터 차를 헤어지게 해서라도 크림이 닥터 차와 결혼하게 해 주려고 애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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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었을 때에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지는 줄거리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와 맺어주려고 애쓰는 남자? 물론 영화를 보지 않아도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남자가 불치병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겠죠. (물론 스포일러도 아닙니다. 둔한 분들도 영화를 10분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치병이라도 이런 진행은 지독하게 비현실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성패는 자명합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스토리가 관객들에게 그럴법하게 여겨지게 포장되어 있다면 성공이고, 아니라면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거겠죠. 과연 원태연 감독은 이 한편의 뮤직비디오같은 스토리를 어떻게 구성했을까요.

아마 영화를 보기 전의 기대는 다들 비슷할 겁니다. 권상우 주연의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라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심 저의 첫번째 반응은 '이 뭥미?'였습니다. 영화가 원태연 시인의 영화 데뷔작이 될 거란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권상우가 또 가시밭길을 가는구나'라고 생각했죠. 권상우가 '너는 내 운명'의 박진표 감독과 함께 영화를 찍을 기회가 무산된 직후라서 더욱 그랬을 겁니다. 검증된 4번 타자를 빼고 무명 신인을 대타로 내는 감독을 바라보는 심정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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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원감독은 괜히 스타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신인답지 않게 노련했습니다. 우선 이 영화는 케이의 시선으로 사건의 진행을 죽 서술해준 다음, 이번엔 크림의 시선으로 같은 사건에서 케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정리해줍니다. 마무리는 닥터 차의 몫입니다.

케이의 시선으로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상당히 답답해합니다.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하지만 그 뒤로 크림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면 왠지 이 이야기를 납득해야만 한다는 묘한 설득을 당하게 됩니다. 아, 그렇다고 말이 안 되던 스토리가 갑자기 말이 된다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말이 안 되는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걸 꼭 짚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이 되는 겁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원태연 시인, 아니 원감독의 설득력은 본 사람으로 하여금 '그래, 저런 스토리가 실제로도 가능할거야'라고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런 얘기가 사실이었으면(혹은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라고 기대(또는 개입)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죠.

일각에선 사랑이 뭐냐는 질문에 양치질이라고 답하는 권상우의 말("남들이 안 볼 때엔 양치질 안 하세요?" - 언제나 하고 있다는 뜻) 같은 감각적인 대사가 원감독의 장점이라고 합니다만, 제가 보기엔 그 이상의 기획력이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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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동안 수많은 액션 느와르에 출연했지만 아직 권상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이런 식의 감성적인 멜로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형편없는 진행과 플롯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천국의 계단'이 4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히트한 것은 결국 권상우의 얼굴이 그런 말도 안되는 스토리를 극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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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영도 어느새 늘어난 주름살이 좀 아쉬움을 남깁니다만 탄탄한 기본기를 이용해 훌륭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범수 역시 흠잡을 데는 하나 없지만 역할이 너무 축소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뮤직비디오에서 더 큰 활약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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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통해 가장 큰 주목을 받을 배우는 정애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4년 영화 '아홉살 인생'에 피아노 선생님 역으로 출연했을 때부터 '흔치 않은 느낌의 좋은 마스크'라는 생각을 했는데 어느새 세월이 꽤 흘렀군요. 이 영화에서는 쉬크한 느낌의 사진작가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해 냈습니다. 단지 이런 마스크의 캐스팅 범위가 한국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커플을 괴롭히는 부잣집 딸 이미지로 너무 한정되어 있는 듯 해서 좀 더 넓은 도전을 위해선 본인의 노력도 꽤 따라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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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배우로는 가수 이승철 역의 이승철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과 함께 일했던 관록의 배우 출신답게 매우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누가 뭐래도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는 '한폭의 뮤직비디오'같은 영화입니다. 이런 스토리에 진력이 나고 몸서리가 쳐 지는 분들도 많겠지만, 같은 재료라도 주방장의 솜씨에 따라 사뭇 달라지는 법입니다. 제가 보기에 주방장의 솜씨는 A급입니다.

 

화이트데이에 저녁 식사 시간까지 함께 할 일이 필요한 연인들이라면 매우 좋은 선택이 될 듯 합니다. 40대 이상의 관객들이라면... 반응이 매우 궁금합니다.


p.s 주제가는... 빨리 연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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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가끔 주위 사람들이 "우리 애가 (연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소개시켜 줄 데 없느냐"는 질문을 해 오는 편입니다. 이럴 때 저의 대답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웬만하면 클 때까진 시키지 마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역 이기는 성인 배우 없다는 건 TV 드라마 시장의 철칙 중 하나입니다. 뒤로 가면서 처절한 실패를 맛보는 드라마도 앞 부분, 아역들이 나오는 부분만큼은 어느 정도 성적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히트작도 예외는 아닙니다. 최근 종영한 MBC TV '에덴의 동쪽'역시 장기간 히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송승헌의 아역으로 출연한 김범의 활약에 기댄 부분이 꽤 큽니다.

그럼 아역배우 본인의 삶은 어떨까요. 실제로 촬영장에 따라다니면서 본 결과, 아역배우들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의 환경이 문제일 수도 있고, 본질적으로 어린 나이에 생활 현장에 나와 있는 데서 오는 피로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이런 생각과 관련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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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역 스타

올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뭄바이 빈민가에서 성장한 청년 자말이 100만 달러가 걸린 퀴즈쇼에 출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유명 배우라곤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이 영화는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상의 작품상을 휩쓸면서 일약 최고의 화제작이 됐다. 실제 빈민가 출신인 아역 배우 아자르 무하마드 이스마일(10)과 루비아나 알리(9)는 오스카 시상식장에도 등장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전 세계의 관심이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한 것 같지는 않다. 이스마일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아들이 “피곤해 인터뷰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투정하자 보도진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때려 쓰러뜨렸다. (위 사진입니다.) 인도 정부는 이들에게 살 집을 주고, 제작진은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에 대비해 신탁기금을 마련했지만 부모들은 “지금 당장 돈을 달라”며 항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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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스타들과 돈에 눈먼 부모들의 문제는 할리우드 최초의 스타 아역 배우가 출현했을 때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영화 '키드'(1921년)에서 찰리 채플린과 공연, 7세의 나이로 스타덤에 오른 재키 쿠건은 21세가 되자 그가 번 400만 달러를 탕진했다며 어머니와 계부를 고소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 쿠건이 되찾은 것은 12만 달러뿐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역 배우의 재산 보호에 대한 논쟁이 일었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미성년 배우가 벌어들인 돈 중 최소 15%는 성년이 될 때까지 제3자가 신탁 관리해야 한다는 법규를 통과시켰다. 이 법은 지금도 '재키 쿠건 법'이라고 불린다. 이 법은 재산뿐만 아니라 교육과 촬영 시간 등 미성년 배우가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출연한 배우들은 하루 9시간30분 이상 촬영장에 머물 수 없었고, 그중 3시간은 영화사가 고용한 교사와 함께 공부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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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한국의 경우 아역 스타들을 위한 보호 장치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다. 연기나 노래를 하는 동안 아이들의 교육은 방임 상태에 놓인다. 한국의 미성년 연예인에게 가장 큰 위험은 부모의 탐욕보다 '어른 대접'의 유혹이다. 최근 왕년의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소년 노마 역을 맡았던 아역 배우가 한의사가 됐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그보다 유명했던 금동이 역의 아역 배우는 법의 심판을 받기도 했다.

10대 스타들의 성공이 각광받으면서 '어릴 때부터 재능을 키워주고 싶다'는 부모와 아이들로 연예 관련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지금, 재키 쿠건 법의 취지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져야 할 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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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쿠건이 벌어들인 1930년대의 400만달러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거액입니다. 그런 거액을 부모가 보호자라는 이유로 탕진해버린 것은 아역 배우 입장에선 참 기가 막힐 일이죠.

더 잘 알려진 경우로는 매컬리 컬킨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0년생인 컬킨은 1990년 '나홀로 집에 (Home Alone)'에 출연하면서 당대의 영화 흥행 성적표를 모두 바꿔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스타덤은 굵고 짧았죠. 부모의 이혼, 이혼 후의 양육권 다툼 등 다양한 사건으로 골치를 앓던 그는 15세 때 부모로부터 법적으로 독립하고(내 재산은 내가 지킨다!) 아버지를 매니저로 고용해 월급을 주고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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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때 이미 귀여운 맛이 사라지며 상품성을 잃기 시작한 컬킨은 18세때 동갑내기인 아역 배우 출신 레이첼 마이너와 결혼, 20세때 이혼하는 등 성인으로서의 삶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느낌으로 팬들을 실망시켰습니다. 2004년에는 마약 소지로 체포되는 물의를 빚기도 했죠. 여전히 배우로 활동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관심에서는 꽤 벗어나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아역 출신이 성인이 되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사례는 여러 번 보고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위험은 윗글에서도 살짝 다뤘듯 아역 스타들이 일찍부터 어른들의 세계에 노출된다는 것이죠. 이른 나이에 한 사람의 어른으로 대접받고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미성년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게 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일찍부터 음주나 흡연을 비롯한 어른들의 오락거리에 눈을 뜨고 비뚤어진 길을 걷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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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자체도 큰 스트레스입니다. 제가 옛날에 본 한 촬영장에서는, 활발한 성격의 아역 배우가 하루 종일 우울한 표정으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오늘 주사 맞는 장면이 있는데 진짜로 주사를 놓을 거다"라고 얘기를 했다더군요. 그래서 이 배우는 신이 끝날 때면 조연출에게 "정말 주사 맞아요? 오늘 찍어요?"라고 계속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주사 맞는 장면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그 아역 배우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요. 이 정도면 거의 아동학대입니다.

아역들이 겪는 스트레스에 대한 글은 전에 따로 쓴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아역 출신 배우들은 "그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게 한"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그 또래의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식은 물론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방법에도 꽤 큰 영향을 줍니다. 물론 지식 자체는 말할 것도 없죠.

모든 측면에서 살펴보더라도 하루빨리 한국에서도 선진국들처럼 아역 배우들의 인권과 건강, 교육을 감안한 규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초등학생에서 멀리는 '사실상 고교 휴학생'이 되어 버리는 10대 아이들 스타에 이르기까지, 무분별한 활동을 막는 방안 말입니다. 비록 당장은 '열심히 활동해서 성적을 내야 특차로 대학에 가지'라고 생각하는 부모들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자녀의 인생을 생각하면 꼭 그게 득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p.s. 아무튼 요즘 자꾸 무거운 얘기만 올리는 것 같아(심정 탓인가...) 분위기 전환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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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테이너 어쩌고 하는 얘기가 유행하던게 벌써 오랜 옛날 일 같습니다. 애당초 별 의미가 없는 말이기도 했는데 이름을 지어 부추기다 보니 한때는 떠들썩 했습니다만, 지금은 싹 사라진 분위기입니다.

사실 최근 몇해 동안 아나운서들이 떴던 시절이 있었다지만, 따지고 보면 유명했던 건 훨씬 더 옛날의 아나운서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름을 대자면 숱하게 댈 수 있죠. 그런데 지난해 이후에는 그런 식으로라도 유명한 아나운서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왜 요즘은 아나운서들이 전처럼 활개를 치지 못할까요? 그런 저런 궁금증에 대한 글을 쓰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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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스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스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태희의 외모도, 김제동의 개인기도, 강호동의 우기기도 없이 마이크 하나로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기며 온 국민을 사각 화면 앞으로 끌어모으던 왕년의 제왕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말을 듣고 '그러게. 한때 김성주, 강수정, 노현정이 방송을 다 하는 듯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떨더니 어떻게 된걸까'하는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아직 아마추어 시청자다. 그럼 아직도 가끔 화제에 오르는 황현정-황수경-황정민 '황 트리오'의 전성기 때 얘길까? 아니면 온 국민의 일요일 아침을 깨웠던 '열전! 달리는 일요일'의 최선규나 손범수 아나운서를 떠올려야 할까?

그 정도도 아직 멀었다. 진정한 스타 아나운서라면 왕년의 MBC 프로그램을 정확하게 양분했던 '장학퀴즈'의 차인태, '명랑운동회'의 변웅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밖에 KBS를 대표했던 미스코리아 전담 MC 김동건, '장수만세'에서 팝 DJ까지 TBC를 개인 방송처럼 휘저었던 황인용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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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 모두를 무색하게 만드는 '임택근'이라는 이름도 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가수 임재범과 탤런트 손지창의 아버지로나 알려져 있지만 50대 이상 연령층에게는 김지미나 신성일보다도 한 단계 위의 스타다. 톱스타 엄앵란과 춤 한번 춘 죄로 스캔들의 주역이 되고, 4.19때 KBS 앞에 몰려든 시위대가 '사장 나오라'가 아니라 '임택근 나오라'고 외쳤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물론 오늘날의 방송환경에서 이런 전설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1950년대의 스타 아나운서 임택근은 거의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낼 수 있었다. 인기는 곧 권력이 되었고, 한번 스타가 된 이들은 새로 올라오는 후배들의 진출을 막고 자신의 치세를 늘려 나갈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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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전만 해도 한두명의 탁월한 방송인은 전체 편성을 좌우할 수 있었다. MBC의 경우에도 변웅전과 차인태라는 두 스타가 각각 교양은 차인태, 오락은 변웅전이라는 식으로 황금분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두 스타는 수시로 이 경계를 넘나들며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신군부의 방송 장악과 함께 상황은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 MBC TV '영 일레븐', KBS 2TV '젊음의 행진'을 시작으로 젊은 층을 겨냥한 예능 프로그램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이런 프로그램에는 새로운 감각의 진행자들이 요구된다는 사실이 재빨리 상식이 됐다. 개그맨 출신의 주병진, 가수 출신의 이문세, 배우 출신의 송승환 등 '젊은' 전문 MC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런 예능 MC 전문화는 전 연령대에서 활기차게 이뤄졌다. '가족오락관'의 허참, '사랑의 스튜디오'의 임성훈, '우정의 무대'의 이상용, 그리고 '전국노래자랑'의 송해 등이 전면으로 나섰다.
이런 경향은 아나운서들의 활동 영역 축소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반발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80년대 이후 3S 정책하에서 예능 프로그램들은 급격하게 저질화(?) 되기 시작했고 대다수 아나운서들은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체면이 깎이는 일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 아나운서들은 9시 뉴스의 메인 앵커라는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데 있어 예능 프로그램 진행 경력이 오히려 짐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KBS의 전직 예능 PD는 "90년대 초에는 '연예가 중계'의 MC를 사내 공모했는데 지원하는 여자 아나운서가 단 한명도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이를 꺼리지 않았던 손범수, 김병찬 등은 동료들이 외면하던 예능 진행자로서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결국 스타 아나운서의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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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경제 상황에서 왔다. 1997년, 한국이 IMF 시대를 맞자 온갖 기업이 경비절감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방송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아도는 내부 인력 때문에 고민하던 KBS는 그 즉시 상대적으로 출연료가 비쌌던 외부 진행자들을 정리하고 소속 아나운서들을 대거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위에서도 거론한 황정민-황현정-황수경의 3황 아나운서가 방송계의 신데렐라로 다시 태어났다.

2006년 전후, '아나테이너 붐'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독일 월드컵 중계에서 보여준 탁월한 진행력을 바탕으로 김성주가 스타 아나운서로 뜨기 시작했고 KBS 2TV '여걸 식스'에서 소탈함을 뽐낸 강수정도 각광을 받았다. 이어 새로운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인 KBS 2TV '상상플러스'의 노현정, '스펀지'의 2대 진행자인 김경란 '하이파이브'에 투입된 이정민 역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이미 아나운서들의 스타 만들기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데다 어느 방송사보다 풍부한 인력을 자랑하는 KBS는 이번에도 한발 앞서갔다.

이들의 성공사례와 함께 다시 한번 각 방송사는 아나운서들의 스타 만들기에 전념했다. 무엇보다 싸고, 정확한 한국어 교육으로 자질 시비에 휘말릴 여지도 없고, 이미 선발할 때부터 외모를 고려했으니 방송사 입장에서는 이들이 MC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더 좋을 일이 없었다. SBS는 뻔한 논란을 무릅쓰고 미스코리아 출신 아나운서 김주희의 해외 미인대회 수영복 심사를 용인했고, MBC는 아예 서현진, 최현정, 손정은, 문지애 등 신인급 아나운서들을 한꺼번에 투입한 예능프로그램 '지피지기'를 신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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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최근 2년간에 대해 '아나테이너 전성시대'라는 말을 만들어 냈지만 사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말일 뿐이다. 예능에 재능이 있던 몇몇 아나운서들이 우연히 '반짝 인기'를 얻었지만 이들 가운데 방송계의 스타로 불릴 만한 인물은 배출되지 않았다. 여론의 호들갑이 거품만 키웠을 뿐이다.

강제형 아나운서 협회장은 스타 아나운서의 부재에 대해 "과거처럼 긴 호흡으로 사람을 키우지 않고, 장수 프로그램도 없는 방송의 '경박단소(輕薄短小)화'가 가장 큰 이유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왕년의 대형 아나운서들이 스포츠 중계에서부터 바닥을 다져 올라온 데 비하면 최근의 인기를 얻은 아나운서들은 2∼3년차의 경력 때부터 오락 프로그램에 투입되고, 빠른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 거듭되는게 스타 아나운서의 배출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에 대한 각 방송사의 냉담한 분위기가 스타 아나운서의 출현에 가장 큰 장벽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한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각 방송사의 예능국에서는 일정한 MC 풀을 갖고 오락 프로그램 진용을 짠다. 그 안에서 열심히 노력해 인정받으면 유재석, 강호동, 이휘재, 탁재훈 등의 위치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 하지만 스타 아나운서에게 과연 무엇이 따라오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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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같으면 인기 아나운서들은 프리랜서로 독립해 고액 출연료와 인기를 누릴 수 있었지만 지난해 이후 이건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KBS 노사는 최근 PD와 아나운서를 막론하고 프리랜서로 나선 전직 직원에게는 사직후 3년간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다른 방송사들 역시 자사 출신의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에게 비싼 출연료를 주는 데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의 푸념은 이어졌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뜨기' 위해서는 온 몸을 던져야 한다. 연예인 MC들이 개다리 춤을 추고, 한겨울에 얼음물에 뛰어들고, 까나리액젓을 자진해서 마시는 건 스타만 되면 그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봉급생활자인 아나운서에게 프리랜서로 클 통로까지 막아 놓으면 대체 뭘 기대하고 그 고생을 하겠나. 회당 몇만원의 수당을 받으면서 500만원, 1000만원 받는 '동료'들과 나란히 서는 게 '스타 아나운서'의 본질이라면 말이다."

어렵게 스타가 되어도 따라오는게 상대적 박탈감뿐이라면 과연 누가 스타가 되고 싶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아나운서의 정도(正道)'만 지켜선 스타가 될 수 없는 방송 환경이 유죄일까, 스타가 되어도 기대할게 없다는 매몰찬 현실이 문제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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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한건 분명합니다. 또렷또렷한 전달력보다는 프로그램의 맥을 꿰뚫는 재치가 훨씬 높은 가치로 평가받게 됐기 때문이고, 그런 식의 헝그리 정신을 갖춘 전문 방송인들에 비해 아나운서들이 갖고 있는 자산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죠.

이건 현재의 아나운서들이 진지하게 해야 할 고민입니다. 과연 '선진국에는 없는' 방송사의 공채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왜 한국에는 있는 것일까. 대외적으로는 스타지만 방송국 내부적으로는 '앵무새'라고 비하를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나운서는 과연 언론인일까. 그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는 열쇠가 있다고 해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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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절끝에 이뤄진 WBC의 지상파 TV 생중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다행한 일입니다. 비록 14대2로 참패하는 굴욕도 있었지만 1대0의 짜릿한 대첩을 안방에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방송사들은 절대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지상파와 중계권을 보유한 IB 스포츠의 줄다리기는 치열했습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경제난으로 방송사 사정이 어렵다. 광고주들이 몸을 사려 적자가 예상된다'는 주장과, '이 기회에 IB 스포츠의 콧대를 꺾어야 한다'는 두 가지 명분으로 초강경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 결과 2006년 중계료보다도 싼 150만달러(약 23억원)에 지상파 3사가 돌아가며 중계를 진행하게 됐습니다. IB가 요구한 금액의 절반 정도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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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WBC, 광고 없어서 못한다더니'라는 기사(http://isplusapp.joins.com/wbc/wbc_article.asp?aid=1107601&contcode=01070101)'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라운드 4경기를 소화한 결과 SBS는 10억원, MBC가 14억원, KBS가 10억원대의 광고 수입을 올렸습니다. 방송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광고주들이 앞다퉈 광고 물량을 제시한 결과죠.

앞서 말한대로 3사의 중계료 합계는 23억원 정도이므로 3사가 공동 부담하면 사당 8억원 정도. 이미 3사 모두 1라운드에서 최소 2억원씩의 소득을 올렸습니다. 하나 더 보태자면 이번엔 대회 직전에 중계 여부가 결정되는 바람에 중계팀을 파견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출장비까지도 아낀 셈입니다. 2라운드 몇 게임만 중계하면 당초 IB 스포츠의 요구액을 다 줬더라도 흑자가 날 상황입니다.

아무튼 이런 결과는 '광고가 없다'며 3사 합계 중계료 130만달러(약 20억원)를 고집하던 방송사들이 결국은 잇속을 모두 챙겼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행히도 중계가 실현돼 국내 야구팬들이 지상파로 중계방송을 볼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끝내 중계가 실현되지 않았더라면 그 욕을 어떻게 다 먹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중계방송 포기를 불사했던 KBS는 이번 1라운드에서도 염치불구 새치기를 감행했습니다. 3사가 돌아가며 중계하기로 한 합의을 무시하고, MBC의 몫이었던 마지막날 일본과의 1-2위 결정전을 KBS 2TV로 방송해버린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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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상파 TV들의 굵직한 해외 스포츠 중계의 역사를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식의 태도는 조금도 낯설지 않습니다. 마침 WBC 기간인 만큼, 다른 종목은 접어 두고 야구와 관련된 주요 방송권의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이렇습니다.

1998년, 박찬호의 경기 중계를 위해 지상파 방송 3사는 공동 대응을 약속합니다. 1년 전인 97년 KBS가 중계를 하면서 꽤 짭짤한 광고 소득을 올린 것이 소문났기 때문에 MLB도 높은 중계권료를 요구할 것이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사실 KBS의 복이었던 것이, 96년 5승에 그쳤던 박찬호는 97년 KBS의 중계 기간 동안 14승을 올려 처음으로 두자리수 승리를 쌓으며 에이스로 부상합니다. 당연히 시청자의 관심과 광고가 폭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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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98 시즌을 앞두고 중계권을 채간 것은 신생 지역민방인 경인방송이었습니다. 이들은 킬러 콘텐트 부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고, 3대 지상파 방송사가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난을 이유로 MLB와 줄다리기를 벌이던 도중 베팅에 성공했습니다.

닭쫓던 개가 된 3사는 '외화 낭비'라며 갖은 저주를 퍼부었지만 박찬호는 경인방송의 중계 3년간 각각 15승, 13승, 18승을 올리며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경인방송의 봄날이었죠. 송월타올 광고의 인기가 치솟았던 것도 이 무렵입니다.

3년 계약이 끝나고 역시 3대 방송사는 공동 대처를 합의하지만 MBC가 한발 빨랐습니다. 몰래 독자 계약을 추진한 MBC는 경인방송이 감히 낼 수 없는 거액을 내고 4년간 메이저리그 중계를 따냅니다. 역시 KBS와 SBS의 저주는 이어진 수순이었고, 이들은 보복으로 MBC가 국내 프로야구를 중계하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그러나 MBC가 새치기에 벌을 받았는지 박찬호는 계약 첫해인 2001년에만 15승을 올렸고, 2002년 텍사스로 이적한 뒤에는 9승, 1승, 4승으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재활에 투입합니다. 당연히 KBS와 경인방송이 누렸던 광고 특수는 없었습니다. 2002년 김병현이 36세이브를 올린게 유일한 위안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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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린 박찬호의 중계권은 아무도 탐내지 않았고 독점 중계권을 가진 IB스포츠의 자체 채널인 Xports가 중계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이 해에는 최희섭이 있었습니다. 최희섭은 이해 LA 다저스에서 한경기 3홈런을 터뜨리는 등 15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부풀립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2006년 시즌을 앞둔 당시, 3대 지상파 방송사는 IB 스포츠의 중계권 독점에 항의하는 뜻으로 연합 전선을 펴고 있었지만 KBS가 슬쩍 계약에 성공합니다. 최희섭의 선전과 박찬호의 부활이 기대되던 상황입니다.

즉시 다른 방송사들은 KBS의 신의 없음을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습니다(정해진 수순입니다). KBS는 당시 3사가 합의한 내용, 즉 'IB스포츠와 개별적으로 접촉하거나 구매를 의논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명백하게 어긴 것으므로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KBS의 역공은 입이 딱 벌어지게 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만 IB와 접촉한게 아니다. 다른 방송사도 이미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있었고 오히려 우리가 늦게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뒤로도 다른 방송사들이 그게 사실이니 아니니 한참 시끄러운 말이 오갔습니다. 어쨌든 KBS가 상대적으로 큰 돈을 낸 것도 사실이고, 합의를 깬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해 최희섭은 마이너리그로 강등돼 죽을 쒔고, 박찬호도 그닥 신통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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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것도 사실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동안 거쳐간 수많은 국가대표 축구 월드컵 예선전, 아시안컵, 월드컵 본선 등의 중계권에서 오간 실랑이와 새치기, 뒷돈 올리기 등은 이루 다 주워 담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합의는 지키는 쪽이 바보가 되어 온 것이 지금까지 한국 지상파들이 주도한 중계권 다툼의 교훈입니다.

이번에 KBS가 방송 3사를 대표해 IB스포츠와 협상을 진행한 것도 결국은 경제 상황 악화로 인한 방송 3사의 몸사리기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경기가 지난해 초만 같았더라도 KBS가 협상을 진행하는 사이 다른 방송사가 새치기로 끼어들어 거액을 주고 독점 중계권을 따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런 방송사들이 이번에는 모든 과거를 잊고 '외화 유출을 막고 IB 스포츠의 고액 중계료 요구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주장하며 WBC 중계를 무산시킬 뻔 한 걸 생각하면 참 속이 끓습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일 뿐이죠. 한마디로 국민의 볼 권리고 뭐고는 이들 방송사에게 아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얘기를 하자면 방송 중계권료가 전부가 아닙니다. 지지난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이 "나는 원래 독립제작사 PD다. 오늘 상 받는 자리지만 이 얘기는 해야겠다. 방송사들, 그동안 내가 방송사에 납품한 프로그램들의 저작권을 돌려달라. 너무 하는거 아니냐"며 수상소감에 항의를 덧붙이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든 다큐든, 지상파를 통해 실려 나간 프로그램의 저작권에서도 지상파는 절대 갑입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현재 3대 지상파 방송이 누리는 독점적 지위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어서 여기선 이만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동기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외화 절약도 크게 한 셈이니 그 돈으로 좋은 데 쓰길 바랍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할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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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중근 만세! 그저 이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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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모습이나 다시 보게 됐으면 합니다. (태극기 꽂는 행동 자체에 대해선 찬반이 있지만, 그냥 '저런 감격스러운 모습'의 뜻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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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온 세상이 기억하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리처드 닉슨. 그런 그에게 전혀 뜻밖의 인물로부터 인터뷰 제의가 들어옵니다. 인터뷰 제의를 해 온 사람은 장난스러운 토크쇼 진행으로 명성을 얻은 데이비드 프로스트(마이클 쉰이 연기합니다).

지구 최강국의 대통령으로서, 그 이전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의 부통령으로 10여년간 세계 정세를 좌우했던 노 정객 닉슨(프랭크 란젤라)은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떳떳함을 국민들에게 해명하고, 재기의 기회를 얻으려는 욕심에 인터뷰를 수락합니다. 프로스트 정도의 풋내기는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다는 확신 또한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뒤늦게 이 인터뷰가 자신의 방송 인생을 좌우할 수 있음을 깨닫고 전력을 다해 닉슨을 인터뷰합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닉슨 또한 유감없는 관록으로 여기 맞서죠. 과연 두 사람의 커리어가 달린 이 인터뷰는 누구의 승리로 끝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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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하워드 감독의 '프로스트 vs 닉슨(Frost/ Nixon)'은 처음 시놉시스만 들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박진감을 보는 이에게 제공하는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인터뷰라는 것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치열한 대결인지를 보여줍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한때는 1주일에 6회씩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일상적인 인터뷰들과, 상대방으로부터 들어야 할 말이 있고 준비할 자료가 있는 인터뷰와는 레벨이 다르죠.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인터뷰는 데이비드 프로스트라는 한 방송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이자, 미국 저널리즘의 역사에 남을 경험입니다. 이 인터뷰 이전의 프로스트는 언제 프로그램이 편성에서 밀려날 지 알수 없는 고만고만한 수많은 방송 진행자 중 한명이었지만, 닉슨의 본질을 꿰뚫은 이 인터뷰 이후 세계적인 셀러브리티가 되고, 영국 왕실로부터 OBE를 수여받고, 부와 명성을 한번에 꿰차게 됩니다. 시장의 논리가 미디어 업계까지도 지배하는 영-미의 상황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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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나라라면 여러가지로 이런 과정이 힘들어 질 겁니다. 닉슨 정도의 명망가가 3대 지상파 네트워크도 아닌, 프로스트같은 독립방송업자(혹은 군소 외주 프로덕션)의 인터뷰 제의에 응할 리도 만무하고, 인터뷰를 한들 콧대가 설악산 대청봉인 지상파에서 그 프로그램을 거액을 내고 사서 방송해줄리도 없습니다("돈을 달라구? 공짜로 틀어달라고 빌어도 틀어줄까말깐데...").

뭐 얼마쯤 실비를 낼 수도 있겠지만, 프로스트처럼 이것 '한방'으로 갑부가 되는 건 꿈도 꾸기 힘든 얘깁니다. 방송사에 적을 둔 사람이 이런 성과를 거둔다면 간부 승진 정도는 기대해도 좋겠지만 외부인이라면 뭐 그냥 유명해지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겁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미국 얘기고, 프로스트와 닉슨은 동상이몽을 품고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초반은 닉슨의 페이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닉슨에게 혐오감을 품고 있어 "절대 손을 내밀어도 악수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던 자료 조사원이 닉슨과 대면하는 순간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부르며 악수에 응하는 모습입니다. 그만치 대통령의 포스가 강했다는 것이죠. 닉슨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게 자신의 논리로 인터뷰를 리드해갑니다. 과연 그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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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풍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 타이틀과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감독 론 하워드라는 이색적인 조합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스포츠 영화의 문법으로 풀어갔다는 점에서 일단 가장 눈길을 끕니다.

수많은 스포츠 영화들은 누가 봐도 별볼일 없는 패자(underdog)이 절대적인 강자를 만나 승리하거나 승리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스토리를 통해 관객의 감동을 이끌어 냅니다. 격투기라면 '록키' 시리즈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고, 기록 종목이라면 '쿨 러닝'도 이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겠죠. 다윗과 골리앗의 격돌 이후 수없이 많은 이야기꾼들이 이 구도에 도전했지만 성공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로 든 두 작품은 이 구도가 주는 상투성에서 최대한 벗어난 걸작으로 꼽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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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에서 방송 인터뷰, 혹은 그 가운데 벌어지는 토론은 스포츠와 마찬가지입니다. 백전노장인 챔피언 닉슨과 야심만만한 무명 도전자 프로스트가 카메라가 지켜보는 링에서 자신의 온 지혜와 힘을 다해 겨루는 것이죠. 인터뷰는 본래 격투기와 비슷합니다. 격투기중에선 온몸을 다 쓰는 이종격투기보다는 복싱의 특징을 갖고 있죠.

이런 구도의 영화라면 자연히 도전자가 철옹성같은 챔피언의 가드를 뚫고 한방을 날리는 순간, 관객은 환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론 하워드 감독은 그런 관객의 속성을 꿰뚫고 있죠. 그래서 별다른 액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스트 vs 닉슨'은 박진감넘치는 볼거리를 관객에게 제공합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록키'의 사운드트랙이 울려퍼져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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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건과 실제 인터뷰를 영화화한 것이므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실존인물입니다.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바로 데이비드 프로스트의 오늘날이죠. 저 인터뷰를 통해 스타가 된 프로스트는 현재 알 자지라 방송(!)의 영어 채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지난번 '발퀴레'관련 포스팅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이스라엘에서의 바그너 연주와 이스라엘-아랍 청소년의 공동 오케스트라 활동 등에 대해 물어보던 토크쇼 영상을 퍼온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쇼의 진행자가 이 '프로스트/닉슨'의 실제 주인공인 데이비드 프로스트입니다. 쇼의 정확한 제목은 'Frost over the world'입니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 주목한 인물은 샘 록웰이 연기한 제임스 레스턴 주니어입니다. 언론계 전공자나 종사자들이라면 친숙한 이름이죠. 뉴욕 타임즈 편집국장을 역임한 20세기 최고의 미국 언론인으로 불리는 제임스 레스턴과 이름이 같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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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첫 부분에 "아버지가 닉슨 하야 방송을 보라고 전화해서 봤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 아버지가 바로 제임스 레스턴이었던 겁니다. 영화 뒷부분에서 레스턴 주니어가 닉슨과 대면하고 서로 소개하는 장면에서 "제임스 레스턴"이라는 이름을 댔을 때, 닉슨이 "그 제임스 레스턴과 어떤 관계냐"고 물어봤더라면 더 자연스러울 걸 그랬습니다. 닉슨이야말로 아버지 레스턴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죠. (뭐 영화의 흐름상 거기서 그런 군더더기를 달 필요는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보신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짧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론 하워드는 이 영화에서 관객의 호흡을 앞지르는 신공을 발휘합니다. 닉슨의 하야 원인이 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사전 지식 또한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두 파이터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 훌륭한 스포츠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듯 즐기면 어느새 122분짜리 영화가 끝나 있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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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의 어느날, 미국을 보호해온 히어로 집단 왓치맨 Watchmen의 일원 코미디언(제프리 딘 모건)이 괴한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역시 왓치맨의 한 사람인 로어셰크(재키 얼 헤일리)는 이 사건 뒤에 만만찮은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하지만 이미 현역을 떠나 은퇴해 있던 나머지 멤버들은 그리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왓치맨의 대표격인 닥터 맨해튼(빌리 크루덥)은 구 소련의 군비 확장으로 인한 인류 말살의 위협을 막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어 세세한 인간사에 관심을 돌리려 하지 않죠. 또 전 사회적으로도 핵전쟁의 불안감이 세상을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코미디언의 죽음은 쉽게 묻힙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멤버 오지맨디아스(매튜 굿)의 살해 시도 사건이 벌어지고, 결국 물러나 있던 와치맨 멤버들은 현역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듯, 음모의 규모는 엄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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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 Watchmen'은 지금까지 보던 슈퍼 히어로 영화들 중 가장 현실과의 경계가 엷은 작품이었습니다. 다른 히어로 영화들, 예를 들어 '배트맨'이 고담이라는 뉴욕을 모델로 한 가상의 도시를 무대로 하는 등 어느 정도 현실과 코믹스(혹은 그래픽 노블) 사이에 선을 그어 놓고 시작하는 반면, 왓치맨은 적극적으로 현실을 끌어들인 대체 역사물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진짜 역사와 '왓치맨' 사이의 거리는 월남전을 계기로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2차대전의 승전과 케네디 암살까지는 실제 역사와 차이가 없죠. 하지만 월남전에 초인중의 초인 닥터 맨해튼이 투입되면서, 미국은 승전국이 되고 지긋지긋한 월남전의 악몽에서 벗어납니다. 승리한 대통령 닉슨에게 워터게이트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 않고, 닉슨은 5선까지 성공하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군림합니다.

닥터 맨해튼과 왓치맨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사실 너무도 자명합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누가 봐도 미국을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려 놓은, 군부를 포함한 국가 지도 세력에 대한 은유입니다. 특히 그 핵심에 서 있는 것은 핵무기를 포함한 최강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닥터 맨해튼입니다. 닥터 맨해튼이라는 이름에서 2차대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연상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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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또 다른 분위기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지속되는 한 핵무기의 전능한 파괴력은 인류의 말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지미 카터의 민주당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한때 군축과 데탕트가 이슈가 되기도 했지만 극우파인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은 다시 한번 전쟁 발발의 위기감을 부추깁니다.

어느 쪽이든 핵전쟁을 일으키면 양쪽 모두 파멸을 면치 못한다는 위기감, 즉 '공포의 균형'이 세계 정세에서 유일하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이론이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미국의 핵 배치에 반대하는 데모대가 '죽음보다는 공산주의가 낫다'는 구호를 외쳤고, 미국은 여기에 맞서 '공산주의는 죽음이다(스탈린 치하에서의 대숙청을 예로 듭니다)'라는 프로파간다로 맞서던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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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왓치맨'은 바로 이 시기, 핵무기를 알게 된 인간이 스스로 인류의 미래를 말살시켜 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비관이 팽배해 있던 시절의 소산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불안감은 꽤나 기우였던 셈이죠. 이 작품이 나오고 몇년 가지 못해 무리한 군비경쟁의 결과로 소련은 패망해 지금의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민족 국가로 흩어졌고, 엄청난 규모의 핵군비는 대량으로 해체됐습니다. 일부 남은 자투리 핵탄두가 중앙아시아의 암시장을 떠돈다는게 가끔 액션 블록버스터의 소재로 쓰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왓치맨'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핵전쟁의 공포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건 뭥미'라는 반응을 낳을 만도 합니다. 물론 80년대의 세계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 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40대 이상의 구세대가 보면 재미있을만한 요소도 꽤 있습니다. 리처드 닉슨을 비롯해 미국 극우파의 상징인 패트 뷰캐넌, 크라이슬러 자동차 신화의 주역 리 아이아코카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실명으로 출연 - 물론 닮은 대역이 -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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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인정하듯 잭 스나이더의 손맛은 여전합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강렬한 액션과 깔끔한 화면, 그리고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영상은 충분히 현대 관객들의 수준에 맞춰진 것이죠. 사실 이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우려의 소리도 높지만 이미 1분에 50명씩 테러범들을 쏘아 죽이는 '둠'같은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자라난 세대에게 이 정도의 영상으로 폭력성을 말한다는 건 농담에 가깝죠.

그렇다고 해서 스나이더의 원초적 폭력성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생각하지 마라, 그냥 즐겨라'라는 수준에서 조금도 더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 영화의 철학적 메시지나 심오함에 대한 논설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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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터는 '어쩌면 스포일러'인 내용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영화를 보겠다는 분들은 건너뛰시고, 영화에 대한 입장이 궁금하신 분은 마지막 문단만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원작의 마니아가 아닌 일반 관객들에게 있어 가장 난감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결말 부분입니다. 음모의 전모가 밝혀지는데 그 음모의 내용에 주인공 중의 주인공인 닥터 맨해튼은 너무도 쉽게 수긍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닥터 맨해튼은 누가 뭐래도 신의 캐릭터입니다. 신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그에게서는 인도-힌두 신화 혹은 불교의 영향이 짙게 느껴집니다. 절대적인 평화를 기원하기도 하지만, 인간사의 사소한 문제에는 이미 초탈해버린 면이 그렇습니다. 전체 우주의 차원에서 인류 하나가 멸종하거나 말거나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화성으로 날아가 순식간에 수백미터 높이의 구조물을 뚝딱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은 이 영화의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있는데 핵전쟁 따위를 고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앞부분에 고의적으로 "소련의 핵탄두는 5만개나 된다. 닥터 맨해튼이라 해도 그 모두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99%를 막는다 해도 나머지 1%만 목표에 적중하면 인류는 끝"이라는 대사가 들어 있지만 영화의 다른 부분에서 보여주는 닥터 맨해튼의 능력은 5만개 아니라 500만개의 핵탄두가 날아온다 해도 그걸 모두 초콜렛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수준으로 보입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쉽게 러시아 어딘가로 날아가 소련의 전략 미사일 발사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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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든 것을 초월해 있던 듯한 닥터 맨해튼은 한편 자신의 내면에서는 초등학생 수준의 번민과 판단 실패에 시달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가 결론적으로 선택하는 내용은 관객을 아연실색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작가의 편의에 의해 주인공이 지나치게 희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강대한 힘과 거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판단력과 지성, 이 두가지를 겸비한 닥터 맨해튼이 바로 미국의 현주소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건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의 결론에서는 서구인의 정신적인 취약성이 짙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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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팬들이라면 생각이 다르겠지만, 이 '왓치맨'에서 어떤 철학적인 심오함이나 깊이를 찾기는 힘듭니다. 그저 남아 있는 것은 80년대 한때 유행했던 인간의 판단력에 대한 혐오 정도일 뿐입니다. 그나마도 지금에 와선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니 어디서 이 작품의 위대함이나 통찰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왓치맨'이 주는 교훈은 한 시대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통찰은 10년도 못 가 뒤집힐 수 있다는 데 대한 경계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왓치맨'이 그 당시, 혹은 1990년대쯤에 영화화됐다면 이보다는 훨씬 설득력있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무엇이 이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어 줄까요. 그저 원작을 재미있게 보았던 팬들의 동호회용 영화로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뿐입니다.

잭 스나이더의 팬들이라면 여전한 파괴와 살육, 그리고 입가심으로 슈퍼 히어로들의 정사신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걸로 만족하실 분들이라면 얼마든지 보셔도 좋겠죠. 하지만 오랜만의 슈퍼 히어로 무비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데이트를 생각하셨던 분들이라면 다른 영화를 고려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p.s. 마지막으로 원작 팬들께 질문:

1. 코미디언이 실크 스펙터를 강간하려 할 때 제압하는 캐릭터는 누굽니까?

2. 영화에선 케네디 암살의 범인이 코미디언으로 보이던데, 원작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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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망 제보를 받았을 때, 그리고 '장자연'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었을 때 불현듯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 즉 KBS 2TV '꽃보다 남자'에 나오는 '진선미 삼총사'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비슷한 입장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직업이 직업인지라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배우 장자연' 보다는 '진저, 써니, 미란다 - 그 셋 중의 하나'라는 이미지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망자가 생전에 가장 바랐던 것은 '써니 장자연', 혹은 '배우 장자연'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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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꽃보다 남자'에서 F4 따라다니는 세 여자애들 가운데 하나"로 고인을 기억합니다. 이 세 사람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당연히 지난주 끝난 백상예술대상입니다. 사실 이 세 분을 모실 계획은 없었습니다. 단지 행사 직전, F4가 모두 행사장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이 진선미 트리오의 한 측근이 "삼총사도 이 자리에 서고 싶어하는데 가도 되겠느냐"고 문의해 왔습니다.

저희로서는 당연히 행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단 F4가 그랬듯, 이 셋도 함께 모여 들어와 주기를 바랬습니다. 당연히 셋이 함께 있는 것이 더 화제도 되고, 임팩트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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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진선미 트리오는 이미 '꽃보다 남자'에서는 공식적으로 물러난 상태였습니다. 본래 이들의 역할은 12부까지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마지막회 쯤에는 우정출연을 하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볼 수 없게 됐고, 저 백상예술대상 레드 카펫에 선 모습이 이들의 마지막 함께 한 모습이 될 전망입니다. 이날 행사장에선 참 밝기만 한 모습이었는데...

고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인의 소속사사 사실상 매니지먼트 관련 업무를 정리하면서 '매니저 없는 연예인'이 됐다는 건 대략 알고 있었지만, 10년 전 부모를 모두 여의고 언니와 살고 있다는 것 역시 이번 사고가 난 뒤에 알았습니다.

신화고 미녀삼총사는 모두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장자연이 1982년으로 27세, 국지연과 민영원은 1984년생이어서 25세입니다. 주연급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꽃남 F4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준과 구혜선이 25세, 가장 어린 김범은 1989년생으로 만 20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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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나 구혜선이야 주연급이니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25-27세의 나이로 여고생 역할을 한다는 건 그리 바람직한 경우는 아닙니다. 그만큼 20대 역할로 한창 활동해야 할 나이에 아직 연기자로서의 기반을 잡지 못했다는 얘기니까 말입니다. 연기자에게는 그보다 더 아픈 일이 없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수많은 스타 지망생들 가운데서는 이 '미녀삼총사'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만세를 부를 사람들이 수백 수천명 있을 겁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연예인들의 밝은 면만을 봅니다. 연예인이 되면 누구나 스타크래프트의 개조 밴을 타고, 돈을 물쓰듯 쓸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작 연예인이 되려고 준비하거나 해 본 사람들은 드라마에 단역 한번 서는 데까지도 얼마나 많은 운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고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진짜 연예인'이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말입니다.

물론 장자연의 죽음을 통해 세상은 다시 한번 무명 연예인의 비애를 거론할 것이고, 한 젊은이의 못다 이룬 꿈에 눈물을 흘릴 겁니다(물론 오래 가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같은 미녀삼총사 멤버인 국지연의 말에 따르면 장자연은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연기학원을 다녔고, 소속사와 장래 문제로 고민은 많았지만 무슨 일에 대해서도 '잘 되겠지'라고 말하는 낙천적인 사람으로 비쳤다고 합니다.

더구나 '꽃보다 남자'의 이민정과 함께 출연한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도 개봉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그가 왜 이런 죽음을 맞았는지 참 의아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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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선 누구나 아는 얘깁니다만, 제가 초년병일 때 한 노장 연기자가 물었습니다. "송기자, 배우가 뭐 하는 직업인지 아나?" 느닷없는 우문에 우물쭈물하다 "연기하는 직업이죠"라는 평이한 답을 내놨습니다. 당연히 그건 답이 아니었죠.

그의 답은 "기다리는 직업"이었습니다. "연기자가 20년을 하건, 30년을 하건 실제로 연기하는 시간은 얼마 안 돼. 나머지는 전부 기다리는 시간이야. 좋은 대본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맞는 배역이 나한테 올때까지 기다리고, 연기 하러 가서는 내 차례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몇 배나 더 많아."

이 말의 속뜻은 '그러니 기다리는 시간에 넋 놓고 기다리지 말고, 잘 준비해 두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될 거라고 기대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죠. 배우가 아니라도 이 말은 모든 젊은이들에게 유용한 얘기일 겁니다. 하지만 이런 지혜는 정작 한껏 나이가 들어서야 얻게 되는게 보통입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갑작스런 죽음이 더욱 아쉬울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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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나이의 젊은이, 그것도 사람들이 선망하는 연예인이란 직업에서 이제 막 빛을 발할 무렵의 연예인이 이런 죽음을 맞았다는 건 경악과 함께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아무쪼록 좋은 데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고인도 고인이지만 힘겨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연기자 지망생들, 연예인이 아니라도 한창 장래를 준비할 나이의 젊은이들은 부디 다시 한번 마음을 독하게 먹어 제발 이런 뉴스를 다시 안 보고 안 듣게 해 줬으면 하는 마음 뿐입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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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블로그 방문자 천만 해볼만 하다'는 소감이 들게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의 오프 모임을 통해 기량을 갈고 닦은 분들은 한결 원숙해진 반면, 새롭게 등장한 강자들은 저마다 만만찮은 내공을 보여주셨다고나 할까요.

자리를 함께 하신 분들은 아마 거의 동의하실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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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시간을 제가 엉뚱하게 생각한 관계로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습니다. **4*, *****C, **닥, **이, ***+***, ***c 님이 먼저 와 계셨고 이어 ***** 님과 그 부군, **, **차, **리 님이 오셨습니다. 저까지 12명. ***한자 님은 강북에서의 회식을 중단하고 달려오시는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감동적입니다.

뭐 늘 그렇듯 대략 있을 법한 이야기와 살짝 간보기가 이어졌고, 초반 탐색전을 지나 공부가주가 한 둬병 쓰러질 무렵 전통의 퀴즈가 진행됐습니다. 아마도 가장 안타깝게 틀린 분은 '철수와 미미의 청춘스케치', 그리고 '송우빈'이 생각 안났던 분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음번에는 꽝을 더 늘려서 스릴 넘치는 경기를 이끌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2차에서 15세 이전에 거세를 해야만 구사할 수 있다는 절정의 쌍화점 창법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이날의 소득이 아닐까 합니다. **4*님의 신공에 다들 놀랐습니다. 그동안 어정쩡한 가성으로 목소리만 컸던 **리 님의 굴욕의 날이었다고나 할까요.

3차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주류를 멀리 한 탓에 두통이 심해서 좀 버티기가 힘들었던 점을 다시 사과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3차를 강행하셨다는 몇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박수를 보냅니다.^

다음번에는 서울 아닌 곳에서 뵐 수 있길 바랍니다.^^ 와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아, 염장질이 남았군요.

이런 초콜렛과 (잘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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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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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전은 딱 두개를 받았는데 그중 하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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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님의 축전은 모자이크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남사스러워서 공개할수가...^^

아무튼 다음 off는 (1)통산 2000(먼저집과 합해서)   (2) 새로 1500   (3) 새로 2000 정도쯤에 있을 듯 합니다. 이번에 아쉽게도 불참하신 분들은 그때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다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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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도착한 순진찌니님의 순진무구한 축전(?) 입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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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게 웬 백인이 한국식 트로트를 노래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입니다. 멜로디는 무척이나 친숙합니다만, 정작 제목은 처음 듣습니다. '오 그대여 춤추자'. 가사도 한국어 가사라고 하기엔 참 엉성하지만, 어쨌든 서양 사람이 이렇게 구성지게 트로트를 구사한다는 건 참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유튜브를 통해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들은 뉴질랜드 출신의 듀오 플라이트 오브 콘코즈(Flight of Conchords)입니다. flight는 알겠는데 conchords는 뭔지 모르겠군요. 사전에도 안 나오는 희한한 말인데... 아무튼 못 보신 분들이 있다면 이들의 노래를 일단 들어보시는게 급선무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면 설명이고 뭐고 필요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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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트 오브 콘코즈는 브렛(브렛 매켄지)과 저메인(저메인 클레멘트)의 듀오입니다.

뉴질랜드 출신이긴 하지만 이들은 지금 미국에서 활동중입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HBO의 시트콤 Flight of Conchords의 주인공으로서죠. 이들은 극중에도 실명으로 출연해 웃음을 자아냅니다. 매회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나오고, 저 트로트 가요 '오 그대여 춤추자'도 그중 하납니다.
시트콤은 2007년부터 시작됐고, 현재 시즌2가 방송중입니다. 위 노래는 2008년 시작된 시즌 2의 7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것으로, 지난 2일 방송됐다는군요. 정말 전파가 빠릅니다.

이들이 부르는 저 트로트곡의 배경이 한국식 노래방 화면이라는 건 금방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에피소드를 짠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 정통했다는 얘기죠. 또 노래하는 브렛 매킨지를 보면 한국식 트로트를 들어 볼 만큼 들어봤다는 것도 드러납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오 그대여 춤추자

그가 너를 쳐다본다
넌 꿩처럼 건강하다 (대체 왜 하필 꿩?)
하지만 사랑은 가끔은 방해가 된다
방해는 이처럼 다양하다
가끔은 사랑이란 갈비처럼 달콤하다
다른 때는 사랑이란 변한 우유처럼 새콤한
(잘못된 소의 우유처럼) 맛을 낸다

삶이란 가끔 집을 짓는 어떤 돌처럼 힘들다
쉬울 때도 있다
오 그대여 춤추자
오 그대여 춤추자
오 해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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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얘긴지 참 엉성하지만 아무튼 노래는 노랩니다. 멜로디는 정말 그럴듯 하죠. 정교한 스토리보다는 노래가 위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방송한다 해도 뭐 그리 썩 히트할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저 트로트 노래 하나만큼은 압권입니다.

이들의 프로필에는 '포크 듀오'라고 되어 있지만 부르는 노래는 포크 뿐만이 아닙니다. 우선 힙합입니다. 제목은 하마 대 코뿔소(Hiphopopotamus vs. Rhymenoceros)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노래의 제목은 '우주의 보위(Bowie's in Space)'. 그렇습니다.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 낸 노래입니다.




마지막은 좀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포크. '인간은 죽었다(Humans are dead)입니다. 인간이 사라지고 로보트들만이 살게 된 미래의 지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에 개그맨 정재환씨가 이런 식의 코믹 듀오로 활동한 적이 있었죠. 사실 코믹송이라고 해도 매주 이런 노래를 만들어 낸다는 건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가사가 문득 생각나는군요.





p.s. 아, 물론 나탈리 화이트를 이 대목에서 빼놓으면 안되겠죠.^^  '스타킹' 녹화에서 어떤 내용이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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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김연아 공화국입니다. 최근 월간 포브스 코리아가 조사한 결과에서도 김연아는 온갖 연예인들을 모두 제치고 한국의 파워 셀러브리티 1위에 올랐습니다. 추정되는 수입, 매스컴의 주목도, 일반인들의 평가를 종합한 결과입니다.

이런 종합적인 순위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흔히 '귀한 몸'의 지표로 기록되는 것은 광고 모델료입니다. 여기서도 김연아가 최정상에 올라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었는데, 새로 드러난 결과를 보면 'top of top'으로 대우받고 있다고 합니다. 흔히 광고업계의 3 top이라고 불렸던 전지현-송혜교-김태희보다도 한 단계 위의 대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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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광고업계는 통상적으로 모델의 순위를 정합니다. 모델료의 액수까지 얼마라고 정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S급, A급, B급, C급 정도로 규정해 놓죠. 모델이 되는 당사자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이 내부 구분이 바로 모델료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결정합니다.

대부분의 큰 대행사들은 자체적으로 구분을 해 놓고 있고, 필요에 따라 대행사들끼리 정보 교환을 통해 구분을 재조정하죠. 예를 들어 스타 A의 결혼설이나 이혼설이 돌면 모델 우선 순위는 뚝 떨어집니다. 반면 최근의 F4 붐처럼 화려하게 떠오르는 스타는 갑작스럽게 모델료가 급상승하죠. 그 올라간 모델료를 유지하는지, 다시 과거의 수준으로 떨어지는지는 좀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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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전만 해도 연예인들은 앞다퉈 모델료를 공개하지 못해 안달을 했습니다. 어느 시기에나 한 시기를 이끌어가는 리드 모델이 있기 마련이고, 거기서 누구나 인정하는 '대세'가 되기 위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델료에는 어느 정도 뻥튀기도 있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6개월 단발을 1년 전속이라고 발표하기도 했고, 1-2억원 정도를 늘려 발표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연예인들이 이렇게 발표하는 동안 대행사들은 '관례에 따라 모델료는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확인할 길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CF 모델료와 관련된 기사는 엄청나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국세청. 연예인들의 소득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세금 추적이 극심해졌습니다. 미디어를 상대로 할 때에는 모델료를 부풀리던 연예인들은 반대로 종합소득세 신고 때에는 수입을 줄여 신고하곤 했지만 세무서에서는 "몇월 며칠자 보도를 보니 무슨 무슨 모델을 해서 총 얼마를 벌었다고하던데 그건 뭐냐"고 따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 이후로 특히나 CF 수입 총액이 상위 TOP 10 안에 드는 연예인들일수록 CF 계약 내용을 비밀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공개하는 경우도 물론 아직 남아 있지만,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광고 관련 기사들은 '추정액'이라는 단서를 달고 나오게 됐죠.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광고대행사들은 여전히 '관례에 따라 공개할 수 없다'며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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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공개된 한 광고대행사의 모델료 기준표를 보면 김연아의 모델료는 1년 전속 기준으로 10억원. 이때의 전속이란 '다른 모든 광고에 출연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동일 계열의 다른 광고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계약기간은 3개월 단발, 6개월 단발, 1년 전속 중 하납니다. 부침이 심한 연예계에서 2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하는 건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죠. 장동건-삼성전자나 김혜자-CJ 정도 외에는 10년 이상의 오랜 파트너십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 동안에도 혜교-지현-태희 급의 모델들(S급)은 '10억원 선'의 모델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대행사의 자료에는 김연아가 10억원 급, 나머지 S급들은 8억원 급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액수는 김연아가 혜교-지현-태희급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급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김연아가 10억원을 받으면 송혜교는 8억원만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송혜교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광고주가 있다면 10억원 급이 될 수도 있죠. 다만 현재로서는 최고의 큰손들인 대기업들 가운데 김연아에 대한 수요가 가장 크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아울러 CF 몸값에 대한 순위를 보면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 가요를 통해 대중에게 소구하는 힘(즉 티켓 파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지현 김태희 송혜교의 예를 보더라도 이들의 최근 출연작은 그리 아름다운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현재 연예인으로서의 가치를 보면 이들보다 손예진이나 이효리가 훨씬 우위라고 할 수 있지만 광고업계는 흥행력 있는 여배우나 가수보다는 생명력이 다소 떨어져도 모델로서의 이미지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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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모델로는 비가 최상위에 올라 있어 장동건이나 송승헌보다 인기 있는 모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남녀 모델을 통틀어 최상위에 있어야 할 모델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다소 의외일 수 있습니다. 배용준이나 이영애, 서태지도 없습니다. 이런 모델들은 다소 특수한 경우들입니다. 모델료는 S급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봐야 하지만 활동 범위를 스스로 엄청나게 축소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한꺼번에 여러 개의 광고에 출연해 매출액을 최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보다는 모델 활동조차도 극도로 제한하고, 이미지 메이킹을 무엇보다도 우위에 놓고 있는 사람들의 특별한 경우죠.

이런 저런 점을 종합해 볼 때 김연아가 최고의 모델로 대우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답 1번은 김연아의 인기와 지명도입니다. 그리고 2번은 용모와 실력의 조화, 3번은 미혼이라는 점(눈치채셨겠지만 위 표의 등장인물들 중 기혼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4번이 '안티가 없다는 점'일 겁니다. 아마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는 게 5번쯤 되겠죠.

누구나 인기가 있으면 그늘이 있기 마련입니다.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나쁜 소문도 달고 다니기 마련이고, 안티 집단도 존재하죠. 하지만 지금 현재 국내의 유명인 가운데 안티가 가장 없는 사람이라면 김연아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이벌이 있다면 아마 얼마 전에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 정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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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김연아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이미지 위에 덧씌우고 싶을 겁니다. 김연아의 위업 중 하나는 LG 냉장고와 삼성 에어컨 광고에 모두 출연했다는 겁니다. 삼성과 LG의 가전 분야는 특히나 라이벌 의식이 강해 절대 비슷한 시기에 모델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LG텔레콤과 삼성 애니콜 광고에 동시 출연할 뻔 했던 F4 이민호가 결국 빠진 걸 봐도 알 수 있죠. 하지만 김연아에게는 삼성과 LG 어느 쪽도 감히 시비를 걸지 못했습니다. 이게 바로 현재 김연아가 갖고 있는 위력입니다. (물론 이민호가 표적이 된 사이 슬며시 두 광고에 모두 출연한 김범의 경우도 있긴 합니다. 김연아처럼 '감히' 건드리지 못한 건 아니지만.^^)

스포츠 스타로서는 이전에 누구도 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국민 영웅 박찬호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현역 시절 안티 그룹의 존재에 시달렸고, 박지성이나 박세리, 최경주도 각자 부족한 부분이 있었지만 김연아는 어찌 보면 그동안의 스포츠 스타들에게 있었던 모든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은 완전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하긴 그러고 보니 박태환이 있군요. 조금 경우가 다른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

물론 일각에서는 장미란보다 김연아가 몇 배 더 잘 나가는 광고 모델이라는 게 불편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인지상정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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